나. 글쓰기 삶쓰기 ㉣ 말로 이룬 열매, 글로 빚은 꽃
우리가 쓰거나 읽는 글은 여러 갈래로 나눕니다. 이른바 문학이라는 이름을 맨 앞자리에 놓은 다음, 시하고 산문하고 소설하고 희곡을 나눕니다. 산문은 수필이라고도 하며, 소설은 어른소설하고 청소년소설이 있습니다. 소설하고는 다른 틀로 어린이한테 읽히는 동화가 있으며, 연극이나 영화나 연속극을 올릴 때에 쓰는 희곡이나 대본이 있어요.
갈래로는 이렇게도 나누고 저렇게도 나누는데, 글이란 다 똑같은 글입니다. 이 글을 이런 갈래에 넣든 저런 갈래에 넣든 딱히 다른 뜻이 없습니다. 남자가 더 나은 사람이 아니듯 여자가 더 나은 사람이 아니에요. 교사가 가장 거룩한 일거리가 아니듯 농사꾼이나 대통령이 더 훌륭한 일거리는 아니에요. 저마다 제 몫이 있으며 제 길과 자리가 있어요.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알맞으면서 좋은 가운데 나와 내 이웃을 아름다이 보듬을 일거리를 찾을 때에 즐겁습니다. 흔히들 대통령을 가장 높은 자리로 두곤 하지만, 흔히 하는 말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틀에서 바라본다면 농사꾼이 가장 사랑스러운 자리라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농사꾼은 높거나 거룩한 자리에 올라서려 하지 않으면서, 늘 나와 내 이웃을 먹여살리는 일꾼이거든요.
글을 갈래로 나눌 때에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누구한테는 시가 가장 사랑스러울 수 있고, 누구한테는 산문이 가장 즐거울 수 있으며, 누구한테는 소설이 가장 기쁠 수 있어요. 희곡을 좋아하든 동화를 좋아하든, 모두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이쯤에서 말사랑벗들이 하나 더 헤아려 주면 좋을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요. 글쓰기를 시험으로 친다고 할 때에 100점을 맞아야 좋은 글이 아니에요. 0점을 맞는다고 엉터리 글이 아니에요. 우리가 쓴 글에는 점수를 붙일 수 없어요. 우리가 꾸리는 삶에는 점수를 매기지 못하거든요.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찾고, 나부터 기뻐하는 삶을 보듬으면 넉넉합니다.
글을 쓰는데 맞춤법을 잘 몰라서 받침이나 홀소리를 잘못 적었다고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돼요. ‘찌개’로 써야 맞는지 ‘찌게’로 써야 맞는지, 또는 ‘빨래집게’하고 ‘빨래집개’하고 어느 쪽이 바른지를 몰라도 글쓰기를 하면서 걱정스러울 일이란 없어요. 맞춤법은 틀릴 수 있고, 띄어쓰기를 모를 수 있어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나중에 혼자서 새로 배우면 되고, 틀렸으면 바로잡으면 돼요.
그런데 말사랑벗들이 쓰는 글에 알맹이가 없다면 나중에 어찌저찌 손을 쓰지 못합니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없는 글이라면 값이나 보람이나 뜻이 없어요. 동무들도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할 말’이 없으면 서로 멀뚱멀뚱하거나 쭈뼛쭈뼛하겠지요. 속이야기나 참이야기가 될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속마음이나 참마음을 나눌 고갱이가 있어야 해요. 내 동무랑 어버이랑 이웃이랑 오순도순 주고받을 깊은 사랑과 따순 믿음이 있어야 해요.
모든 글에는 바로 이 사랑과 믿음이 깃들어야 글이라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사랑과 믿음이 깃들지 못하고 껍데기로만 시 모양을 갖추거나 소설 틀을 이루거나 산문 모습이라 할 때에는, 허울은 좋게 시요 소설이요 산문이요 하겠으나, 우리가 기쁘게 맞아들일 문학이라 하는 시나 소설이나 산문은 못 되어요.
그러니까 서울대학교라든지 제주대학교라든지 대구대학교라든지 인천대학교 같은 곳에 들어가는 일은 크게 마음쓸 일이 아니에요. 어느 대학교를 바라보며 입시 공부를 하든지, 내가 가려는 대학교에서 ‘커다란 배움’을 맞아들여 아름다운 삶과 넋과 말로 학문꽃을 피우도록 마음쓸 일입니다. 조금 더 마음쓸 수 있다면, 굳이 대학교에 가지 않으면서 내 배움꽃을 피울 수 있어요. 텃밭을 일구거나 꽃밭을 돌보면서 배움꽃을 피웁니다. 도서관이나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읽는 가운데 배움꽃을 이룹니다. 튀김닭이나 신문이나 우유를 나르면서 배움꽃을 얻습니다. 막일판이나 공장 일꾼으로 살아가면서 배움꽃을 깨달아요.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삶을 엿보는 가운데, 내가 쓰거나 읽는 글에 어떠한 빛줄기를 담아 어떠한 삶줄기를 이루면 좋을지를 몸으로 느끼지요.
자, 그러면 문학 갈래에 따라 쓰는 글이 무엇인지 살짝 살펴봅니다.
- 산문 쓰기
모든 글은 산문에서 비롯합니다. 한자말로 ‘산문’이고 우리말로 ‘줄글’인데, 낱말책에서 풀이하는 ‘줄글’은 먼 옛날 한문으로만 글을 쓰던 이야기에 머무릅니다. 한문으로 글을 쓸 때에도 우리말 ‘줄글’로 가리키겠지만, 우리가 한문이 아닌 우리말을 한글이라는 그릇에 담는 글을 쓸 때에도 ‘줄글’이라 할 만해요. 따로 어떤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 줄줄이 쓰는 줄글이에요. 줄을 따라 한 줄 두 줄 써 내려 가는 글이 줄글이고요.
따로 어떠한 틀에 매이지 않고 쓰는 글이 산문, 곧 줄글인데, 이렇게 쓴 줄글은 시가 되기도 하고 소설이나 동화가 되기도 합니다. 내 마음이 흐르는 결을 곱게 살피며 꾸밈없이 적바림할 때에는 산문이 돼요.
- 시 쓰기
모든 글은 시에서 태어납니다. 시는 한자로 ‘詩’라 적는데, 한자로 적지 않아도 시는 시예요. 어쩌면 앞으로 말사랑벗님 가운데 ‘시’를 갈음할 만한 새 우리말 하나 빚을 수 있겠지요. 이 시란, 내가 글을 쓴다고 할 때에 가슴으로 담아 나누는 말밥입니다. 고픈 마음을 살찌우는 밥 같은 말, 이리하여 말밥이라 할 만한 글이 시예요.
시를 쓸 때에는 가락을 살린다거나 글자수를 맞춘다거나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가락이나 글자수를 살피기 앞서, 내 마음이 흐르는 결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산문은 내 마음이 흐르는 결을 꾸밈없이 적바림하면서 태어나고, 시는 내 마음이 흐르는 결을 꾸밈없이 적바림하면서 태어나기도 하지만, 더도 덜도 아닌 밥그릇 하나에 알뜰히 밥을 담듯, 잘 짜 놓은 틀에 걸맞게 담아내어 태어나기도 합니다.
- 소설·동화 쓰기
소설하고 동화는 따로 갈래를 나눌 수 있으나, 둘을 하나로 여길 수 있습니다. 어른이 읽는다고 꼭 소설이거나, 어린이가 읽는다고 반드시 동화는 아니에요. 소설이나 동화는 산문이나 시에서 ‘어느 만큼 길이가 되는 줄거리’라는 살을 입히면서 이러한 ‘줄거리 살결’에 여러 가지 옷을 입힌다든지, ‘옷을 입힌 줄거리 살결이 여기저기 마실을 다니듯 돌아보는 삶’을 골고루 담아내는 이야기잔치입니다.
산문은 꾸밈없이 적바림하는 티없는 글이고, 시는 꾸밈없이 적바림하려는 티없는 넋을 밥그릇 하나에 담은 글이며, 소설이나 동화는 꾸밈없이 적바림하려는 티없는 넋을 날마다 고마이 즐길 밥상을 꾸준하게 차리듯이 두고두고 즐기면서 언제나 새로운 기쁨을 베푸는 이야기잔치 같은 글입니다.
- 희곡·대본 쓰기
희곡이나 대본을 처음부터 따로 쓸 수 있기도 할 테지만, 희곡이나 대본을 쓰자면 먼저 산문이랑 시랑 소설이나 동화랑 밑바탕을 다스려야 한다고 느껴요. 사람에 따라 한달음에 모든 일을 이루기도 하지만, 웬만한 여느 사람은 차근차근 발걸음을 떼면서 나아가잖아요.
희곡이나 대본은 무대에 올려 ‘나 스스로 하든 다른 사람한테 맡기든 서로 다 함께 하든’ 몸짓과 목소리와 노래와 춤 들을 알맞게 섞으며 선보일 수 있도록 하나하나 풀이말을 달아 놓은 시나 산문이나 소설이나 동화라고 할 만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이 몫을 맡은 사람이 이런 목소리 높낮이와 어떠한 빠르기로 말을 한다고 풀이말을 달고, 저 대목에서는 무대 한쪽에 무엇을 꾸며 놓는다든지 하는 풀이말을 달아야 해요. 산문·시·소설·동화를 쓰거나 읽을 때에는 말없이 머리로 ‘이들 글로 이루는 이야기에 나타나는 모습’을 가만히 생각합니다. 희곡과 대본은 머리로 가만히 여러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누구나 두 눈으로 바라보거 두 귀로 들으며 가슴으로 뭉클하게 느낄 수 있게끔 풀이말을 꼼꼼하며 알맞춤하게 달아야 합니다.
앞서, 글쓰기는 삶쓰기라고 했어요. 삶쓰기로 나아가는 글쓰기는 말로 이룬 열매를 맺고, 글로 빚은 꽃을 피웁니다. 글을 잘 써도 좋고 못 써도 좋아요. 아니, 잘 쓴 글이란 없고 못 쓴 글 또한 없어요. 나 스스로 내 삶이랑 넋을 고운 말결과 글투에 담아 소록소록 새로 태어나도록 한다면 즐겁습니다. 말사랑벗님들 누구나 예쁘며 착한 말열매를 신나게 빚으면 좋겠어요. 말사랑벗님들 모두모두 참다우며 해맑은 글꽃을 꾸준하게 이루면 기쁘겠어요.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