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글쓰기 삶쓰기 ㉠ 말을 가꾸고 글을 일구기


 말사랑벗님은 글쓰기 숙제를 얼마나 하는가요. 책을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쓰라는 숙제나, 일기를 쓰라는 숙제나, 어디 현장학습 다녀와서 보고서 쓰라는 숙제 들을 하는지요?

 저는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글쓰기 아닌 글짓기 숙제를 몹시 많이 하며 살았어요.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초등학교 여섯 해를 다닐 때에는 무엇보다 일기쓰기가 가장 벅찼습니다. 그때 일기는 한 주에 세 번 넘게 써야 매를 안 맞았어요. 한 주에 사흘치를 썼더라도 일기를 쓴 길이가 일기장 한쪽 2/3를 넘지 않으면 안 쓴 셈치고 똑같이 매를 맞았고요. 한 주에 너덧새는 일기를 쓰라는 소리를 들었고, 한 주에 예닐곱 날치 일기를 쓴 아이들은 선생님이 따숩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 같은 동무들한테서 부러움을 샀어요.

 다달이 느낌글 쓰기가 아닌 독후감 숙제를 해야 했고, 두어 달에 한 차례씩 반공 글짓기를 하면서 웅변처럼 발표를 해야 했습니다. 한 달 걸러 과학 글짓기를 하고, 군인 아저씨께 올리는 위문편지를 쓰는 한편, 부모님께 띄우는 효도편지를 써야 했어요. 게다가 한 해에 몇 차례씩 동시쓰기까지 했어요. 방학을 맞이하면 방학숙제로 여행글 쓰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제 둘레에는 가난한 동무가 많아 여름이고 겨울이고 방학이라 해 보았자 어디 나들이 다니지 못하는 아이가 많았기에, 다른 글보다 여행글 쓰기를 아주 힘들어 했습니다.

 한편, 날마다 받아쓰기를 하고, 교과서 베껴쓰기 숙제를 했어요. 히유, 이제 와 돌아보면 그때 학교를 어떻게 꾹 참고 다녔나 모를 일이에요. 숙제만 해도 한 가득인데요. 중학교에 들어서자 ‘깜지’라는 이름으로 손목이 달아날 만큼 힘겨운 베껴쓰기 숙제를 날마다 수없이 해야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에 교사들이 베푸는 매질은 가벼운 어루만짐이라 느낄 만큼, 중학생 때부터는 큼직한 나무몽둥이에 골프채에 밀걸레 자루에 곡괭이 자루에 야구방망이에 …… 선생님들은 매타작을 하러 학교에 나오는가 싶도록 ‘베껴쓰기 숙제 안 한 아이를 두들겨패며’ 하루를 보냈어요.

 열두 해에 걸쳐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처럼 매질하고 글짓기가 어우러지다 보니, 제 동무들 가운데 ‘글 좀 쓰라’는 이야기를 달가이 맞아들이는 녀석은 거의 없어요. 다들 몸서리를 쳐요.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둥, 글을 왜 쓰느냐는 둥 이야기합니다. 말사랑벗님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어떠한가 궁금하네요.

 가만히 돌아보면, 글을 써서 내 마음을 나타내는 일은 몹시 뜻이 있습니다. 쓸모가 있고 보람이 있어요. 그렇지만 글을 써서 내 마음을 이웃하고 나누도록 즐거이 이끄는 몫을 우리네 학교에서는 제대로 맡지 못했어요. 제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한 반에 아이들 숫자가 지나치게 많기도 했고, 교사마다 주어진 행정업무 짐이 참 컸습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더 벅차며 무거운 짐이나 굴레는 대학입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학교며 사회며 정치며 문화며 온통 ‘더 이름나고 훌륭하다는 대학교로 보내는 일’에 얽매였으니까요.

 저는 고등학생 때 릴케 시집이나 황순원 소설책을 선생님한테 빼앗기곤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와 참고서 아닌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 모조리 ‘불온도서’로 여겼어요. 지난해였나, 우리나라 국방부에서 불온도서를 스물 몇 가지인가 꼽으며 이런 책을 군인한테 읽히지 못하도록 한 적 있는데, 이 불온도서 가운데에는 동화쓰는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우리들의 하느님》 같은 책도 끼었어요. 그저 우리한테 ‘첫손 꼽는 대학교에 들어갈 생각만 하라’고 짓누르는 흐름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모습이라 할까요. 초등학교부터 아이들을 짓누르고 길들이면서 홀가분하거나 너그러운 마음꽃이 피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고 할까요. 아니, 초등학교에 앞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갖가지 지식그림책과 과학동화를 읽히니까, 모두 똑같은 틀에 똑같은 생각에 똑같은 눈길로 살아가도록 옥죈다고 할까요.

 좋은 책 하나를 좋은 넋으로 읽으면 좋은 삶을 일구는 밑거름을 넉넉히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애 아빠인 저부터 학교를 다니는 말사랑벗까지, 누구나 좋은 책 하나로 좋은 넋을 보듬고 좋은 삶을 일구면서 하루하루 아름다이 여미면 즐겁습니다. 이처럼 좋은 삶이라 느끼며 하루하루 아름다이 여밀 때에, 이 같은 결과 무늬와 빛깔이 내 넋으로 곱게 아로새겨지고, 내 넋이 곱게 아로새겨질 때에 내 말 또한 곱게 아로새길 수 있습니다.

 글쓰기를 한다고 할 때에는, 머리로 이 생각 저 생각 쥐어짜서 글을 써서는 내가 읽어 보아도 따분하며 싱거운 글만 쏟아지지만, 나 스스로 내 삶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가운데 꾸밈없이 한 줄 두 줄 적바림하노라면, 내가 내 글을 읽으면서 빙긋 웃거나 뚝뚝 눈물을 흘려요. 가슴으로 책을 읽듯이, 가슴으로 글을 씁니다. 가슴으로 책 줄거리를 받아들이듯이, 가슴으로 내 삶을 일구면서 이 이야기를 글로 담아요. 말을 가꾸는 일이란 삶을 가꾸는 일이고, 삶을 가꿀 때에 바야흐로 빛나는 말 하나 알뜰살뜰 얻어요. 글을 일구는 일이란 삶을 일구는 일이고, 삶을 일굴 때에 비로소 알찬 글 하나 기쁘게 얻습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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