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개
박기범 글, 김종숙 그림 / 낮은산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네 눈빛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8] 박기범·김종숙, 《미친개》(낮은산,2008)


 쥐를 끈끈이로 잡습니다. 집에 고양이를 키울 수 있으면 쥐잡이는 한결 손쉬울 수 있지만, 시골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는 금세 멧고양이나 들고양이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마을 닭과 병아리를 모조리 잡아 죽이거나 잡아서 먹는 으뜸가는 싸움꾼으로 탈바꿈합니다. 나중에는 먹이를 찾아 산으로 깊이 들어가며 산에 얼마쯤 살아남았던 다람쥐며 작은 새며 온통 잡고야 맙니다. 도시이고 시골이고 사람 아닌 목숨은 살아남지 못하는 마당에, 고양이 같은 짐승하고 맞서 싸울 만한 짐승이란 씨가 말랐습니다. 더욱이, 여느 들짐승이나 멧짐승은 새끼를 많이 까지 못합니다. 너구리나 오소리가 무리를 지어 들고양이들한테 덤비지 못합니다.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도 마을사람들 닭을 생각하거나 조그마한 멧자락 짐승들을 헤아린다면 도무지 기르지 못합니다. 아니, 한 목숨이 다른 목숨을 기른다는 일이 걸맞지 않겠지요.

 올여름에 멧자락에 깃든 시골집으로 옮기고 나서 어제 아침까지 쥐를 열세 마리 잡습니다. 이 쥐들은 집구석 어딘가에 자꾸 구멍을 내며 기어듭니다. 그냥 벽에서만 살거나 천장에서만 살면 좋으련만, 어김없이 구멍을 내어 방을 돌아다니려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읍내 약국에서 끈끈이를 사서는 구멍 앞에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이 끈끈이에 어른 주먹만큼 큰 쥐가 두 마리 함께 붙들린 적이 있고, 한 마리가 잡힌 뒤에 여러 날 조용하다 싶은 적이 있습니다만, 쥐들은 끈끈이에 발 한쪽이든 꼬리 한쪽이든 붙는 날에는 그예 골로 가고야 맙니다. 쥐 아닌 사람으로서 저는 두 번 끈끈이를 밟았는데, 끈끈이를 밟고 나면 참 안 떨어집니다. 끈끈이 풀을 벗기자면 며칠 걸립니다. 사람조차 끈끈이 떼어내기 힘든데 조그마한 쥐들은 어떠할까요.

 어른 주먹만 한 쥐를 열 마리 잡은 다음에는 어른 엄지손가락만 한 쥐를 세 마리 잇달아 잡습니다. 참으로 조그마한 쥐들은 끈끈이 가장자리에 하나 붙었고, 다른 하나는 끈끈이가 몇 조각 방바닥에 떨어진 자리에 붙었으며, 다른 한 마리는 볼볼 기어다니는 녀석을 손으로 덥석 쥐어서 잡습니다.

 큰 쥐이든 작은 쥐이든 잡힌 녀석은 슬프게 웁니다. 그러나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밤에 바깥에 내놓았다가 어스름이 물러나는 새벽녘에 멧자락 구석에 땅을 파서 묻거나, 쓰레기봉투에 담아 읍내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처음에는 땅을 파서 묻자고 생각했는데, 잡히는 숫자가 늘고 또 느니까 땅을 파서 묻기에도 만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쥐도 딱하고 사람도 딱합니다. 쥐가 되든 사람이 되든 흙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나날입니다.


.. 개는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 봉지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어. 코를 가까이 들이대고 무언가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살폈지 ..  (8쪽)


 엄지손가락만 한 쥐들은 끈끈이에서 떼거나 한손으로 살짝 쥔 채 사람집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멧등성이 한켠에 던져 주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이들 작은 쥐가 멧자락에서 살아남을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시골쥐라면 시골쥐답게 멧자락에서 멧쥐로 살아가 주기를 비손합니다. 보드라운 흙을 잽싸게 파헤쳐서 사람집 벽 안쪽이 아니라 구수한 흙내음 물씬한 땅속에서 겨울을 나는 한편, 멧자락에서 먹이를 얻을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이들 잡힌 쥐를 묻거나 멧자락에 던져 놓으려고 들고 갈 때면 어김없이 쥐하고 눈이 마주칩니다. 눈이 안 마주칠 수 없습니다. 미안하구나 말하면서도 집에서 함께 살아가지는 못하겠다고 핑계를 댑니다. 핑계랄지 뭐랄지 모르겠습니다. 땅에 묻은 뒤이든 멧등성이에 던져 준 뒤이든 성호를 그으며 큰숨을 내쉬는데, 애처로운 쥐들 눈망울을 보자면 끈끈이를 놓고 싶지 않으나, 그렇다고 집안이 쥐판이 되도록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식구 깃든 시골집은 맨 처음에는, 아니 우리 집이 들어서기 앞서는 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지내던 곳은 아니었을까요. 이 쥐들이 굴을 파며 오순도순 지내던 자리에 사람들이 ‘여기는 내(사람) 땅이요!’ 하면서 땅을 고르고 시멘트를 붓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짓지는 않았으려나요.

 까치들이 곡식 씨앗을 파먹고 멧돼지가 밭뙈기를 파엎습니다. 이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에 먹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멧짐승이 먹이를 얻을 만한 자리는 온통 사람들이 파헤쳤을 뿐더러, 나무열매이든 무슨 뿌리이든 사람들이 온 산과 들을 쑤석거리며 몽땅 캐 가려 하니까 멧짐승은 시골사람 밭뙈기에 뛰어들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 밭뙈기에 들이닥치며 목숨을 잇는 멧짐승들은 더없이 꿋꿋하거나 씩씩하다 할 만합니다. 이들 멧짐승과 날짐승은 온몸뚱이로 사람들한테 무언가 이야기를 건넨다 할 만합니다.


.. 어느 때부턴가 마을 조무래기들도 개만 보면 아무렇게나 팔매질을 하며 쫓으려 했어. 어른들 작대기질을 아이들도 따라 배웠겠지 … 돌 던지는 아이 하나가 있으면 그 곁으로 재미있어 부추기는 아이들이 떼지어 모이곤 했어.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 않았지. 그 개에게는 다들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여기는 것처럼 ..  (13, 14쪽)


 그림책 《미친개》를 읽습니다.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좋아하는 박기범 님이 글을 쓴 작품입니다. 글하고 어울리는 그림은 ‘개’ 아닌 ‘사람’이 그리니까, 또 여느 개 이야기가 아닌 ‘미친’개 이야기이니까, 어둡고 어수선하며 어지럽습니다. 어찌 보면 이 글에는 이 그림이 걸맞는다 할 만한데, 달리 보면 이 글에는 이 그림이 걸맞지 않습니다.

 눈망울을 들여다보고 털빛을 헤아리며 몸놀림을 살핀다면, 사람들이 개한테 그냥 개라는 이름이 아닌 ‘미친개’라는 이름을 붙이듯, 어떠한 이야기를 드러내거나 펼치는 그림이라 할 때에 ‘꼭 이래야 한다’는 틀에 사로잡힙니다. 좁은 울타리 안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살아숨쉬는 목숨이고 살아서 펄쩍펄쩍 뛰는 목숨이며 살아가고파 몸부림치는 목숨을 살가이 얼싸안지 못하고 맙니다.

 살아내는 목숨은 풀처럼 푸릅니다. 이 나라 아이들은 어린이 때를 지나 푸름이 때를 맞이합니다. 푸른 사람 푸른 목숨 푸른 나무 푸른 개입니다. 푸른 들판과 푸른 마을과 푸른 나라를 꿈꾸는 고운 목숨입니다.

 무기를 든 손으로는 전쟁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쟁기를 든 손이 아니고서는 싸움이 끊일 수 없고, 호미와 낫이랑 붓이나 연필을 든 손이 아니고서는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삼는 어른들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 흉내를 내며 전쟁놀이를 합니다. 계급과 신분을 나누는 어른들인 탓에 아이들은 저희끼리도 대장이니 졸병이니 나누면서 놀이를 합니다. 사랑과 믿음과 평화를 아끼는 어른들이라면 사랑과 믿음과 평화를 돌보는 아이들로 크도록 손길을 내밀겠지요. 돈바라기로 흐르는 어른이라면 아이들 마음에 돈과 돈과 또 돈이 맴돌도록 몰아세우겠지요.


.. 개는 곧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것만큼이나 흙에 코를 대고 킁킁대는 일이 좋다는 걸 알게 되었어 ..  (18쪽)


 개고기를 먹는다든지 개장수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개고기집을 공장처럼 꾸린다든지 개우리를 공장처럼 지어서 꾸릴 때에 나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감옥처럼 꽉 막히고 틀에 박힌 교과서를 달달 외워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모는 제도권 학교가 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을 죽이는 꼴입니다.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워 학교나 학원에 실어내는 일이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들이 두 다리로 동네를 사뿐사뿐 거닐며 사람들을 마주하고 삶터를 함께 느끼도록 돕지 못하는 일은 슬플 뿐더러, 어버이가 아이 손을 맞잡고 씩씩하고 신나게 걷지 않는 일은 더욱 슬픕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돈을 바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더 큰 이름이나 힘을 거머쥐려고 다툼질을 해대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스스로 사람길을 걸을 때에 개들 또한 개들대로 개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조용히, 다소곳하게, 얌전히, 아름답게 살아갈 사람이며 개이고 목숨입니다.


.. 어쩌면 보이는 것 너머의 것까지 보느라 차가운 마음이 그대로 눈동자에 비추어졌는지도 몰라. 누구라도 한 번쯤 그 눈망울을 봤어야 했어 ..  (48쪽)


 오늘날 사람들은, 또 앞으로 죽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은 ‘동네 강아지’ 눈망울조차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집 아이들 눈망울조차 들여다보지 않거든요. 골목길에서 둘이나 셋씩 어울리며 공을 차거나 인라인을 타는 아이들 눈망울이나마 들여다볼는지요. 그냥 자동차를 들이밀며 빵빵하며 쫓아내는 어른들이 아닌지요. 붐비는 전철칸에서 옆사람 눈망울을 들여다보기는 하는지요. 그예 냅다 밀어젖히거나 발을 밟는 우리들이 아니온지요.

 그림책 《미친개》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떠돌이 들개’만큼이라도 맑거나 티없거나 싱그럽거나 예쁜 눈망울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림책 이야기이니까 이렇다 친다면, 그림책 바깥 우리 터전에서는 어떠하려나요. 우리들 살아가는 이 나라 이 터전에서 우리들 눈빛과 눈망울과 눈자위와 눈매와 눈동자와 눈빛은 얼마나 밝거나 곱거나 착하거나 빛나거나 깨끗하거나 그윽한가요. (4343.12.20.달.ㅎㄲㅅㄱ)


― 미친개 (박기범 글,김종숙 그림,낮은산 펴냄,2008.2.15./98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