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 식량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본질
월든 벨로 지음, 김기근 옮김 / 더숲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이 많은 사람은 왜 서울로 몰려드는가
 [책읽기 삶읽기 27] 월든 벨로,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어두운 승리》(삼인,1998)와 《탈세계화》(잉걸,2004) 같은 책이 한국말로 옮겨진 월든 벨로 님 새책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를 읽다. 지구 사회와 경제와 정치를 읽는 눈썰미가 남다르면서 깊다 할 만한 월든 벨로 님이기 때문에, 이분이 쓴 책을 찬찬히 헤아리며 받아들인다면, 올 2010년 12월 5일에 흙으로 돌아간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어리숙하거나 모자란 생각밭을 일구는 데에 도움이 된다.


.. 자본가들은 식량이냐 사료냐 연료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것은 수익성에 따라 언제든 바꿔치기할 수 있는 투자 대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한 세계 대다수 인구의 궁핍한 상황을 해소시키는 일 따위는 자본가들에게 있어 이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 갈수록 줄어드는 농토에서 보다 많은 것을 짜내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 플랜테이션 임시 노동자들의 기본적 생계 문제를 자본가들이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 ..  (30∼31, 43쪽)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라는 책은 참 잘 짰고 잘 엮었으며 잘 쓴 글이라고 느낀다.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이런 책 하나쯤은 곁에 놓고서 찬찬히 읽으며 생각해야 한다고 느낀다.

 사랑하는 짝꿍이랑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은 젊은이들이 거의 아무런 생각을 않고 예방접종을 맞히는데, 스스로 예방접종과 병의학과 병원 얼거리를 살피거나 익힌다면, 삶과 넋이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스스로 예방접종 흐름과 성분을 헤아리는 일이란 거의 없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4대강사업이든 어슷비슷하다. 숱한 사람들이 비판을 하거나 편들기를 하거나 하면서 쏟아내는 말마디를 읽는 일도 나쁘지 않다만, 이런저런 ‘딴 사람 생각들’만 읽어서는 고갱이를 캐내지 못한다. 나 스스로 몸으로 부딪히면서 살피거나 배우거나 알아보아야 비로소 고갱이를 짚는다. 나부터 고갱이를 제대로 알아내고 나서야 숱한 사람들이 떠드는 목소리를 듣고 새겨야지, 고갱이를 제대로 모르는 채 숱하게 떠도는 소리만 듣는다면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린다. 방송꾼 손석희 님이 이끄는 토론 풀그림이 퍽 사랑받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런 토론 풀그림을 볼 까닭이나 값어치가 없는 줄 옳게 깨닫지 못하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마무리(결론)’는 처음부터 다 나왔으니까. 어떤 말썽거리 하나를 놓고 이야기(토론)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가는 진작에 뻔하니까. 이리 해야 옳거나 저리 해야 맞다는 말을 얼마나 슬기롭거나 또박또박 밝히느냐는 부질없는 놀음놀이이다. 옳거나 맞는 길을 조용히 깨닫고 받아들이면서 내 삶자리에서 옳거나 맞는 일을 하면 된다.

 이리하여,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라는 무척 괜찮은 책은 오늘날 사람들한테 널리 제대로 읽혀야 하는 책인 가운데, 책이름으로 모든 이야기를 다 읽어낼 수 있다. 자,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우리 코앞에 있다. 우리 밥상에 있다. 그러면 뭐가 말썽거리이느냐고? 바로 우리 코앞에 그 많던 쌀과 옥수수가 놓였기 때문에 말썽거리이다.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우리 코앞이나 밥상에 놓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한테는 우리가 그날그날 비울 밥그릇 부피에 걸맞는 만큼만 쌀과 옥수수가 있으면 넉넉하다. 우리 스스로 다 먹지 못할 만큼 지나치게 많은 쌀과 옥수수가 우리한테 있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뒤틀린다. 나 때문에 굶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나 때문에 지구 사회는 전쟁과 푸대접과 따돌림으로 춤을 춘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수치와 지식’에 따라 ‘남녘나라 사람들이 버리는 밥쓰레기 부피만으로도 남녘땅과 북녘땅에서 굶거나 가난한 사람을 모두 먹여살리고도 남는다’는 이야기를 알면 뭐 하는가. 삶을 스스로 안 바꾸는데. 삶을 스스로 안 고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지만 ‘무엇’이라는 일을 안 하는데.


.. 최초로 옥수수를 재배했던 멕시코인이 어찌하여 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옥수수에 기대어 살게 되었는가? … NAFTA 협약 당시 옥수수에 대한 보호관세를 향후 1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없애 나간다는 합의가 있었지만 미국산 옥수수가 밀려들면서 가격이 반으로 폭락함에 따라 이후 멕시코의 옥수수 농업은 계속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  (69∼70, 77∼78쪽)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바로 우리 코앞에 있지만, 이 쌀과 옥수수는 미국 재벌이나 한국 재벌이 갖다 놓지 않았다. 우리 코앞에 있는 너무 많은 쌀과 옥수수는 바로 우리 스스로 갖다 놓았다. 미국과 한국 재벌은 이런 일을 우리들 스스로 하도록 내몰면서 뒤에 앉아 조용히 큰돈을 벌어들인다. 돈 놓고 돈 버는 사람은 손이나 몸을 쓰지 않는다. 입으로 말 한 마디 벙긋 하면서 모든 일과 갈무리를 우리들이 하도록 시킨다. 일도 우리가 하고, 돈도 우리가 잃으며, 삶도 우리가 망가뜨리는 얼개이다.

 주식으로 정작 돈을 버는 재벌들은 주식시장에 다리품을 팔며 나온다든지 주식시세표를 보지 않는다. 아니, 주식시세표 따위는 볼 까닭이 없으며, 볼 일이 없다. 주식시장이 흔들리거나 움직일 일만 조용히 하면 그만이니까. 이러는 가운데 문어발 회사 얼거리에 걸맞게 온갖 곳에서 곁다리로 돈을 번다. 곁다리로 돈을 벌 때에는 이런저런 ‘일자리를 만들’어서, ‘자잘한 일’을 바로 우리 같은 여느 사람이 하도록 시키면서 적잖은 연봉을 품에 안긴다. ‘스스로 흐뭇하게 여겨 깊은 골이나 속살을 굳이 들여다보거나 캐내거나 알아채지 않도록’ 사로잡는다. 이른바 ‘사랑놀이·운동경기·영화(sex·sports·screen)’ 같은 놀이거리를 ‘곁다리 장사판’으로 마련해서 여느 사람인 우리들한테 선물보따리처럼 내놓는다. 돈을 주고 이름값을 베풀며 힘부리기를 봐주면서 다람쥐 쳇바퀴 놀이에 빠져들도록 붙잡는다.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를 차근차근 새겨서 읽는다면 이와 같은 흐름과 이야기를 잘 짚을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세계 경제와 자본과 사회와 정치가 어떤 본질인가’ 하는 ‘지식읽기’로 이 책을 들여다본다면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고작 지식조각을 얻고 그친다. ‘세계화 본질 알기’라든지 ‘신자유주의 본질 파헤치기’는 부질없는 지식놀음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밑삶(본질이 되는 삶)이란, 나 스스로 내 삶터에서 내 삶을 얼마나 바보스레 망가뜨리는가를 얼마나 빨리 깨우쳐서 나부터 내 삶을 아름다우며 즐거운 길로 접어들도록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어떤 매무새와 몸가짐과 땀방울로 열어젖힐까 하는 한 가지이다.


.. 농촌을 떠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간 사람들은 일단 그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면 농촌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대기업가들이 너도 나도 농업연료 산업에 몰려드는 이유는 1980년대에 생명공학이 그랬던 것처럼 이 분야가 미래에 커다란 수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  (88, 189쪽)


 우리 식구들 살아가는 곳은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충주시이지만, 충북 음성군에 9/10가 둘러싸인 멧자락이다. 모든 볼일은 음성읍에서 본다. 충주시 면사무소로 가는 길은 음성읍 어느 면사무소로 가는 길보다 두 곱은 멀다. 충주 시내로 가는 길이나 서울 시내로 가는 길이나 얼추 비슷하다. 언제나 음성읍으로 가서 볼일을 보고, 음성 장마당에 찾아가서 먹을거리를 장만하곤 한다. 지난달께였나 우리 식구들은 처음 알아보았는데, 음성 읍내에 가면 곳곳에 “음성읍 인구 9만 돌파 축하”라 적힌 걸개천이 나풀거린다. 참 사람이 적기는 적구나 싶은데, 9만에서 10만이 될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알 길은 없다. 음성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면 으레 음성에 머물지 않고 서울로 흘러나가리라 본다. ‘좁은’ 시골‘구석’에서 무슨 일자리를 찾겠는가. 그렇다고 오늘날 아이들이 시골자락에서 농사짓기를 하면서 농사꾼 삶을 아기자기하게 꾸리겠다고 꿈을 꾸겠는가. 이제 한국땅에는 홍성 풀무농업고등학교를 빼고는 ‘농사짓기 가르치는 고등학교’는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시골 고등학교 가운데 시골학교다운 매무새를 건사하는 데는 없다. 시골사람이면서 시골살이를 즐기려는 매무새를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이어주는 어른은 너무 적다. 서울 시내를 닮으려 하는 시골 읍내인데, 이런 작은 시골 읍내에서 무슨 재미로 놀겠는가. 땅 넓고 물 좋으며 사람 많은 서울로 몰려들어야지.

 멧골집에서 아이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걸어 하루 여섯 대 오가는 시골버스를 한참 기다려서 타노라면, 이 시골버스를 타는 젊은 사람은 우리 식구뿐이요, 이 시골버스를 타는 아이 또한 우리 아이뿐이다. 시골버스를 타는 사람은 모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인데, 가끔 이주노동자가 탄다. 시골 젊은 사람이나 시골에서 아이 키우는 사람은 한결같이 자가용을 몬다. 자가용을 몰고 더 큰 마트로 가서 더 값싼 물건이나 먹을거리를 산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사람 삶을 사랑하기에 만만하지 않고 만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와 똑같이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똑같은 연속극이랑 연예인 이야기에 젖어든다. 똑같은 운동경기를 ‘똑같은 결과(우리 편만 이기기)’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들여다보고, 똑같은 회사일에 똑같은 돈벌이에만 사로잡히면서 살아간다. 삶을 꾸리는 나날이 아니라, 돈만 버는 나날이기에, 사람들은 시골에서 살아갈 까닭을 느끼지 못한다. 삶을 꾸리는 나날이 아닌, 돈만 벌면 좋은 나날인 나머지, 서울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드글드글 몰려들밖에 없으며, 드글드글 몰려드는 이 많은 사람들이 ㅅㄱㅇ(서울대·고려대·연세대) 같은 대학교를 마쳤든 다른 대학교를 다녔든 책읽기를 거의 하지 않을 뿐더러, 책읽기를 삶읽기로 여미지 못한다.

 알맞게 먹어야 알맞게 배가 부르며 알맞게 일을 할 수 있는데, 지나치게 배불리 먹으면 지나치게 배가 불러 일이고 뭐고 흐트러진다. 지나치게 벌고 쓰며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다 보니, 서울이나 부산처럼 큰도시는, 또 인천이나 대전이나 광주처럼 꽤 커다란 도시는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터전으로 뿌리내리는 길을 잊거나 잃는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며 사랑해야 비로소 보금자리이면서 마을인데, 보금자리이면서 마을로 발돋움하거나 한결 튼튼하게 서려는 곳은 한국땅에서 어디가 있다 할까. 시장이든 군수이든 구청장이든 면장이든 모조리 ‘경제발전 숫자’에 목매달지 않는가. 시골학교이든 도시학교이든 교장과 교감은 몽땅 ‘더 손꼽히는 대학교에 더 많은 숫자를 넣는’ 데에 얽매이지 않는가.

 일다운 일을 잃고, 배움다운 배움이 없으며, 사랑다운 사랑이 자리하기 힘들지만, 돈이 넘치고 이름값이 높으며 힘부리기 좋은 도시요 큰도시요 서울이다. 도시내기 삶이 바보스러울밖에 없다고 깨닫고 싶다면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같은 책을 읽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삶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깨닫기만 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삶으로 고치고 싶으면 나중에는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같은 책을 애써 읽지 말아야 한다. 척 보아도 무슨 이야기를 담았는가 알아채야 하고, 숫자와 통계와 지식과 정보와는 다른 자리에 있는 삶과 사람과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4343.12.11.흙.ㅎㄲㅅㄱ)


―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월든 벨로 글,김기근 옮김,더숲 펴냄,2010.3.8./149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