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균 인물사진
임영균 / 안그라픽스 / 1993년 9월
평점 :
절판



 사진은 ‘기록하는 문화유산’이 아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4] 임영균,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안그라픽스,1993)



 제아무리 연출을 잘하거나 ‘한때’를 잘 담았다 할지라도 ‘느낌이 살게’끔 ‘오늘까지 살아온 사람이 내 앞에 즐겁고 기껍게 서 주었’기에 사람사진을 얻습니다. 한 사람이 나한테 다가와 주기까지 기다릴 뿐 아니라 내 눈과 손과 머리와 가슴과 몸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름난 사람을 찍는다고 해서 좋은 ‘인물사진 작품’이 되지 않고, 내 동무나 식구나 이웃을 찍었다고 해서 ‘보잘것없는 흔한 공산품’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임영균 님 사진책을 돌아보며 생각합니다. 임영균 님은 조금 더 기다리며 당신 삶을 가다듬었다면, 찍힌 사람들 삶자리와 눈물과 웃음을 한결 깊이 나누어 받으며 보여줄 수 있지 않았겠느냐 싶군요.

 찍힌 사람이 그때 그곳에서 그 모습으로 마주해 주었기에 얻는 사진인 한편, 찍는 사람 또한 그때 그곳에서 그 손길로 사진기 단추를 눌러 주었기에 빚는 사진입니다. 옳은 소리이지요. 그러면, 임영균 님이 그때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임영균 님한테서만 느낄 수 있는 삶이야기는 어느 만큼 담았다 할 만한가요. 그때 그곳에 임영균 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이는 어떠한 사진을 어떻게 담았을는지요. 임영균 님이 바로 그곳 바로 그때 그 손길로 사진을 찍으며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임영균 님 삶과 넋과 말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으로 영근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일는지, 다른 어느 사진쟁이라 하더라도 이와 마찬가지로 담을 만한 사진일는지 궁금합니다. 또는, 다른 사진쟁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새삼스레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렸을는지 더욱 궁금합니다.

 이 사진책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을 들여다보는 내내 ‘이 사진책에 담은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하기 힘들었니다. ‘임영균이라는 사람이 찍은 사진이라는구나. 그러면 임영균이라는 사람은 사진을 어떻게 찍는가?’ 하고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저절로 묻어나는 삶이야기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사진에 찍혀 준 ‘미국에서 살며 일하는 예술쟁이’들 매무새와 몸짓과 이야기만 살며시 보이는데, 이 또한 이 사진에 담긴 사람들을 일컬어 예술쟁이라 하니까 예술쟁이로구나 하고 여기지, 이런 말을 붙이지 않는다면 이들이 예술쟁이인지 아닌지조차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학습, 교훈, 느낌, 추상, 이미지, 표현, 기교, 구도, ……도 틀림없이 잘 헤아리며 가누어 사진을 일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목소리도 내고, 내 꿈도 밝히며, 내 세상읽기를 드러내는 사진예술을 즐길 노릇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 문화를 빚는다 할 때에는, 사진 한 장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인 내 삶이 고이 녹아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진찍기로 새로운 삶을 살피거나 헤아린다 할 적에는, 사진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넋을 조곤조곤 곰삭이는 살림꾼 땀방울이 깃들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내 삶을 고이 녹이지 않으며 단추만 누를 때에는 사진이 아니요 작품 또한 아니며 삶이나 이야기조차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사진이란 삶이야기를 담아 보여주는 수많은 갈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진 한 장 얻는 일이란 내 아이이든 이웃집 아이이든 살가이 손 마주잡으며 신나게 놀며 얻는 웃음 한 조각과 같습니다. 사진 한 장 만드는(만들 수 없다고 느낍니다만) 일이란 내 살붙이하고 날마다 먹는 밥을 차리려고 날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쌀을 씻어 불린 뒤 안치는 한편 갖은 밥거리를 마련하려고 바삐 손을 놀리며 늘어나는 주름살이나 날마다 살붙이들이 입는 옷을 빨고 널고 개고 하면서 새삼스레 돋는 굳은살과 같습니다. 사진 한 장 거저로 얻지 않습니다. 사진 하나 그냥 얻을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가 되든 그림그리기가 되든 글쓰기하고 한동아리입니다. 글쓰기를 할 때에 ‘글을 쓴 사람이 잘나’서 좋다는 글 하나 태어나는 일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글이든 ‘글로 쓴 사람 또한 틀림없이 대단하다’ 할 만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 글로 쓸 만한 이야기거리와 삶자락을 나 스스로 살아내며 얻든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마주하며 받아들이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이 대목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에도 이 대목을 안 헤아리는 사람이 꽤 많고요. 혼자 잘나서 얻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없고, 홀로 대단히 많이 배우고 무척 오래 배워서 놀라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태어나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듯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듯 글을 여미고 그림을 다듬으며 사진을 어루만집니다. 어머니가 내리사랑 아이를 다 키워 놓고 씩씩하게 제금나도록 떠나보내듯,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이들 문화나 예술을 키운 사람은 내 손에서 홀가분하게 떠나보냅니다.

 임영균 님은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을 내놓으며 말합니다. “흔히들 사진은 기계 예술이라고 말하지만, 사진이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겠지만, 그 사람의 생각과 시선이 우선 있어야 그 다음에 그것을 매개로 완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후기).”고.

 이 말씀은 아주 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갱이를 ‘바라보’지 못할 뿐더러, 알맹이를 ‘느끼지’ 못하는데다가, 빛과 그림자를 ‘깨달’아 ‘삭여’ 내지 못합니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보지 않는 목숨은 없습니다. 장님이라 해서 무엇인가를 안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어떠한 목숨이든 다른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늘 무엇이든 바라보지만, 이렇게 늘 바라보는 무엇 가운데 ‘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춤이나 노래나 연극으로 담아낼 만한’ 어느 한 가지를 어떻게 추리거나 고르거나 가리려나요. 바라보는 무엇 가운데 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다시 보여주거나 새롭게 곰삭이고자 한다면, ‘바라보는 무언가를 느껴야’ 하고, 바라보는 무언가를 느끼려면, 내가 바라보는 무언가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으며 어떻게 이어져 왔고 어찌어찌 살아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를 안다는 일은 지식이 아닌 ‘삶’입니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살든, 서로 이웃으로 지내든,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면서 살가운 나날을 보내든 하면서 ‘삶 한 올 두 올 풀어내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아로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바라보는 삶을 사진으로 담는 손길’을 마무리합니다.

 임영균 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내가 그들을 사진관 스튜디오가 아닌 그들이 주거하고 있는 집이나 작업장 혹은 그들이 즐겨 거닐던 거리에서 촬영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오늘의 시대적·사회적 배경을 사진에 함께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몇 세기 후에는 오늘날의 기록사진 혹은 풍속도가 문화유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록사진 중에서도 특히 인물사진에 내가 매료된 것은 나 자신이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소박한 심정의 발로였다(후기).”

 사진을 찍는 분이라면 누구나 잘 알아야 합니다. 사진관에서 찍는다고 기록사진이 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돌아보면서 지난날 어느 때에는 사진관이 이렇게 생겼고, 이런 모습을 뒤로 놓고 사진을 찍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예술쟁이 일터에서 찍든 예술쟁이가 거닐던 길거리에서 찍든 똑같이 그때에는 그러했네 하고 헤아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기록이 되리라 생각하며 기록하는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는 처음부터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한자를 조금 다르게 적어 ‘기억사진’은 됩니다. ‘지난날 내가 사귀던 사람을 떠올리는 사진’은 될 테지요. 그렇지만 ‘지난날 사람들 발자취가 이러했구나 하고 적바림하는 사진’은 되지 못합니다.

 사진을 찍는 분이라면 으레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 찍은 사진 한 장은 뒷날 문화유산이 되지 않으며, 될 수 없고,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찍은 사진 한 장은 오늘 하루 사진을 함께 찍어 즐거운 삶입니다. (4343.11.8.달.ㅎㄲㅅㄱ)


―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 (임영균 사진·글,안그라픽스 펴냄,1993.9.1./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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