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단오제 - 김수남 사진집
김수남 지음, 황루시 글 / 눈빛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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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 앞서 사람을 사랑하는 넋으로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9] 김수남, 《강릉단오제》



- 책이름 : 강릉단오제
- 사진 : 김수남
- 글 : 황루시
- 펴낸곳 : 눈빛 (2007.9.20.)
- 책값 : 5만 원



 (1) 사람을 사랑하는 사진찍기


 저는 제 사진을 찍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삶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삶을 스스로 알뜰살뜰 꾸리자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가운데 사진을 찍습니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아이 사진을 찍고, 집 둘레 멧기슭과 논과 밭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날마다 새 마음으로 일어나 새롭게 놀고 복닥이며 어르고 달래는 아이 삶자락을 차근차근 사진 한 장 두 장으로 그려 봅니다.

 아빠가 늘 사진기를 붙잡으니까 아이는 사진기를 갖고 놉니다. 이제 망가져서 더는 못 쓰는 헌 사진기 하나를 아이가 용케 찾아내어 “어, 사진기네.” 하고 말하며 목걸이처럼 목에 겁니다. 이 망가진 사진기에는 망가지는 바람에 미처 꺼내지 못한 ‘찍다 만 필름’이 들어 있습니다. 필름을 꺼내야 하는데 섣불리 꺼내지 못합니다. 건전지로 가는 사진기인데, 건전지는 살았으나 기계가 멈추어 되감기를 할 수 없습니다. 기계를 통째로 수리집에 들고 가서 꺼내야 합니다. 벌써 한 해 가까이 사진기를 필름과 함께 그대로 두고 맙니다. 아이는 이 ‘아빠가 내버려 둔 사진기’를 끄집어 내어 갖고 놉니다. 아빠가 사진을 찍듯 저도 사진기를 쥐고 “사진 찍어.” 하는 말을 들려주면서 사진을 찍는다며 놉니다.

 엊그제까지는 아빠 사진기로 사진을 찍던 아이입니다. 아빠나 엄마 손전화를 손에 들고 수도 없이 갖가지 사진을 찍은 아이입니다. 손전화 기계하고 셈틀을 잇는 줄이 없어 손전화에 담긴 사진 수백 장을 못 꺼냅니다.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이 줄 하나 장만해야겠습니다. 아이가 그동안 무슨 사진을 어떤 눈길과 눈높이로 찍어 왔는지를 구경하고 싶어요.

 어제, 아빠는 아이를 집에 두고 볼일을 본다며 도시로 마실을 나옵니다. 아이는 아빠가 혼자 나간다며 서운해서 웁니다. “아빠! 자전거!” 하고 외칩니다. 자전거수레에 저를 태워 주고 같이 나가잡니다. “아빠! 자전거 아냐? 이야야? 이야?” 하고 외치며 아빠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아빠 혼자 다녀올게. 돌아올 때에 까까 사 올게. 나중에 이야 같이 가자. 미안해.” 하며 손을 흔듭니다. 다른 때에는 으레 손을 흔들며 “다녀오셔요.” 하는 말을 따라하더니, 어제만큼은 서운하고 풀죽은 얼굴로 바라보기만 합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뒤를 쳐다보며 논둑길을 걸어 시골버스역으로 갑니다. 아이가 울멍울멍하는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선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며 ‘이렇게 아이한테 미안한 일이 있나’ 하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갑니다. 시외버스를 타기 무섭게 속이 울렁거립니다. 메스껍습니다. 시골집에서만 지내다가 시외버스를 탔기 때문인가 봅니다. 몸이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윽윽 하며 게우고 싶지만 꾹 참습니다. 아이랑 함께 버스를 탔다면 아이는 훨씬 괴로웁겠다고 느낍니다. 아이하고 서울이나 인천 같은 도시로 마실을 나온다며 버스를 타야 할 때에는 무척 힘들겠구나 싶습니다. 기차는 괜찮으려나.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기차를 타야겠습니다. 한손으로 머리를 짚습니다. 아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발걸음을 겨우겨우 한 걸음씩 떼다가 아이 사진을 담았는데, 이렇게 담은 아이 사진에는 아이가 아빠한테 서운해 하며 슬퍼 하는 빛깔을 고스란히 옮겼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아니, 나로서는 아이가 서운해 하거나 슬퍼 하도록 살아가고 싶지 않은데, 아이를 서운해 하거나 슬퍼 하도록 하면서 사진을 남긴 일이 옳은지 궁금합니다. 언제나 아이가 웃는 모습만 사진으로 찍을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떼를 쓰며 우는 모습도 찍곤 합니다. 아이가 새근새근 잠든 모습도 찍고, 아이가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도 찍습니다. 밥을 먹는 모습도 찍는데, 밥을 먹다가 안 먹는다며 실눈을 뜨고 살짝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아직 안 찍었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투정을 부릴 때에는 몹시 힘들어 사진기를 쥘 기운이 나지 않아요. “제발, 밥도 한 술 먹어 주라.” 하고 빌기에 바쁩니다. 아이가 제풀에 지쳐 배가 고프기를 기다리면서, 아빠도 배가 고프니 밥술을 허둥지둥 뜹니다.

 아이 엄마가 뜨개질을 할 때에 옆에 앉습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기에 방바닥에는 늘 이불을 깔아 놓습니다. 책 몇 권을 챙겨 이불에 다리를 넣습니다. 아이도 아빠를 따라 엄마 옆 이불에 발을 넣습니다. 아이 그림책을 챙겨 왔으니 아이 옆에 이 책들을 펼치고, 아빠는 아빠 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아빠 곁에서 아빠를 따라 책을 넘기며 읽습니다. 그림을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그림책을 넘기다가 언니가 넘어진 모습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언니, 넘어졌어.” 하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짚습니다. “언니, 아야 했어.” 하고 말할 때에 “응, 언니 아야 해. 이제는 일어났네. 괜찮네.” 하고 대꾸합니다. 예전에는 이 그림책을 펼치며 아이한테 구석구석에 나오는 모든 모습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는데, 이제 아이는 떠오르는 대로 하나씩 되새기며 말을 합니다. 차츰 말문이 트이는 듯합니다.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며 말문이 트는 딸아이라. 그렇구나. 이맘때에 우리 아이는 말문을 트는구나.

 책을 읽는 딸아이랑 뜨개질을 하는 엄마랑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한 장 조용히 찍습니다. 아이는 사진 찍히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책에 빠져듭니다. 뜨개질하는 아이 엄마 손을 조금 크게 찍습니다. 아이 엄마 손을 찍다가, 몸이 퍽 안 좋은 아이 엄마 다리며 팔이며 허리며 주물러 준 지 퍽 오래되지 않았는가 하고 깨닫습니다. 하기는, 아이 아빠인 저부터 갖은 집일을 다하며 살아가자니 늘 고단하고 지쳐서 내 몸 건사하기에도 빠듯하다 보니, 아이 엄마 몸 돌보기를 자꾸 못하고 맙니다. 이렇게 사진 한 장 더 찍기에 용쓰지 말고, 사진 한 장 찍을 겨를에 아이 엄마 다리를 주물러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아이는 아직 다리 주무르기를 잘 모릅니다. 가끔 따라하긴 하지만 아이로서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틈틈이 아이한테 쭉쭉이를 시키며 온몸을 주물러 주는데, 아이한테 이렇게 해 주어도 엄마나 아빠를 주무르는 법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빠가 힘에 부쳐 서너 시쯤 “이제 아빠도 쓰러진다!” 하고 벌렁 드러누우면, 아이도 아빠 곁으로 쪼르르 달려와 “이불!” 하면서 저도 이불을 덮고 눕겠다 하면서, 아빠 옆에서 아빠 얼굴을 살살 쓰다듬습니다. 눈을 감으며 아이 여린 손길이 내 얼굴에 닿는 느낌을 즐깁니다. “응응, 고마워.” 하고 말하며 아이가 낮잠 한 숨 자 주면 아빠도 숨을 살짝 돌리겠다고 얘기를 합니다.

 어느새 포로롱 잠듭니다. 잠에서 깨어나 보면 아이가 곁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히유 하고 한숨을 쉬며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낮잠에 빠져들면서 꿈으로 ‘내 사진감인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헌책방으로 마실을 가서 신나게 책을 고르며 사진을 찍는 일’이라든지 ‘또다른 내 사진감인 인천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다며 인천으로 찾아가서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골집에서 세 식구 올망졸망 살아가는 동안 내 사진감을 옳게 찍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내가 찍을 사진이라면 내가 가장 잘 찍을 수 있는 자리에서 가장 즐겁게 가장 사랑하면서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요즈음 내 삶으로는 헌책방이든 인천 골목길이든 자주 찾아갈 수 없으니, 어쩌다 한 번 찾아갈 수 있다면 눈물 콧물 웃음 실컷 길어올리도록 사진을 찍어야 하고, 여느 때에는 내 여느 삶자리에서 우리 세 식구 삶을 홀가분하게 사랑하며 찍으면 넉넉하지 않겠느냐고.

 먼저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나와 살아가는 옆지기를 사랑하며, 엄마 아빠랑 오붓하게 살아가는 딸아이를 사랑하면서 찍을 사진입니다. 이렇게 사진 하나 찍는 매무새를 내 수수한 보금자리에서 즐길 수 있을 때에, 헌책방에 가든 골목길을 가든 다른 어디를 가든 나로서는 내 눈길과 손길로 내 마음길 사뿐히 담아내는 사진 이야기를 일군다고 느낍니다.


 (2) 굿을 사랑하는 사진찍기


 김수남 님 사진책 《강릉단오제》(눈빛,2007)를 읽습니다. 사진을 읽고 사진마다 붙은 글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사진쟁이 김수남 님이 저승사람이 된 뒤에 나왔기에, 사진마다 붙은 글은 김수남 님이 손수 달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에 김수남 님 사진으로 태어났던 “한국의 굿”에 달려 있던 이야기 결이나 느낌하고 사뭇 다른 글이 붙은 《강릉단오제》입니다. 사진을 읽다가 글을 읽을 때에는 어쩐지 둘이 제대로 어우러지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사진은 빛깔 곱지만, 글은 빛깔 고운 결에 녹아들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한국의 굿”이라는 이름이 붙어 스무 권 나온 사진책에는 책날개마다 사진쟁이 김수남 님 짤막한 덧글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스무 권을 빠짐없이 챙기지 못했는데, 집에 있는 “한국의 굿” 가운데 두 권을 뽑아 듭니다. 먼저 《수용포 수망굿》(1985)에 적힌 글을 읽습니다.


.. 바닷속에 잠든 넋을 건져 총각귀신 처녀귀신 면하라고 결혼시켜 주는 수망굿. 대반에 의지해서 들어오고 있는 예쁜 인형 신랑 신부의 결혼식이다. 넋을 건지는 동안 슬피 울던 가족들도 결혼식이 시작되면 웃기 시작한다. “새색시 웃지 마라 딸 난다.” “술을 제대로 먹여야지.” 짓궂은 농담과 우스갯소리가 계속된다. 결혼식이 끝나면 인형 신랑 신부끼리 신방을 차려 준다. 물론 창호지를 뚫고 신방을 훔쳐보기도 한다. 조그만 어촌에서 벌어지는 굿판은 구경꾼들로 가득 차서 슬픔과 즐거움이 엇갈린다. 수십 리 안팎에서 모여든 할머니 아주머니 장사꾼들로 해서, 여름 바닷가 모래사장은 장터로 변한다. 가족들은 슬퍼하고 기뻐하고 구경꾼들은 굿을 즐기고 무당들은 박수 받기를 기대하고 ……. 굿을 좋아하는 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1985년/4권 《수용포 수망굿》)


 굿을 좋아하는 겨레한테서 볼 수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곱다시 담아 온 김수남 님입니다. 딱히 사진을 안다 모른다 말할 수 없던 고등학생 때부터 “한국의 굿”을 기쁘게 장만하며 읽어 왔습니다. 스무 권을 통째로 장만하지 않고, 한 권 한 권 다 읽고 나서 다음 책을 장만하면서 읽었습니다. 굿을 구경하지 못했고, 굿을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내 삶인데, 고등학교 수험생에서 인천부터 서울까지 오가는 대학생이 되다가, 대학교는 집어치우고 신문배달 일꾼으로 일하면서 “한국의 굿”을 틈틈이 한 권씩 사 모았습니다. 굿판에 갈 겨를이 없는 바쁘고 빠듯한 삶을 되삭이면서 김수남 님 사진책에 실린 사람들 놀음과 웃음과 어우러짐과 눈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참말, 김수남 님은 다른 사진을 못 찍으시겠구나.’ 하고 느껴 왔습니다. 아니, 다른 사진도 제법 잘 찍으실는지 모르지만, 김수남 님으로서는 이 나라 이 겨레 삶자락을 ‘굿 사진 사랑’으로 풀어냈다고 느낍니다. 굿을 하는 사람들 주름살과 옷고름과 손짓에 이 겨레 삶이 묻어 있습니다. 굿을 치르려는 사람들 쪼그라든 살결 입술과 고랑진 이맛살 아래쪽에 옴폭 패인 눈자위에 이 땅 농사꾼과 고기잡이 삶이 배어 있습니다. 굿을 구경하는 사람들 애틋하거나 안타깝거나 즐겁거나 설레는 몸짓에 이 나라 수수한 사람들 웃음과 눈물이 한 올 두 올 어려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책을 좋아하는 동무한테 김수남 님 사진책을 보여주며 이야기했습니다. 이 책 하나야말로 우리 겨레 문화를 고스란히 밝힌다고. 대학생이 된 다음 동무나 선배나 후배한테 김수남 님 사진책을 한 권씩 선물로 사 주면서 이야기했습니다. 대학생이라면, 이 나라 대학생이라면, 김수남 님 사진책을 한 권쯤이라도 읽고 헤아리며 알아야 한다고.


.. 신굿은 심방들 자신들의 성무의례로 초신질, 중신질, 상신질을 발룬다(바르게 한다) 하여 일생에 세 번 행하는 큰 굿이다. 초신질 발루는 것은 심방을 하겠다고 신에게 고하는 일종의 내림굿이며, 중신질과 상신질은 중신층, 상신층으로서의 자격과 길을 인정받기 위한 굿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은 1981년 당시 스물한 살인 입무자 문순실의 초신질 발루는 굿을 찍은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신타파라는 이름으로 굿하는 것이 급격히 소멸하던 시절이었다. 심방들의 이야기로는 몇 십 년 만에 하는 굿이라고 했다. 또한 신굿 과정 중의 몇몇 부분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던 심방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신굿에는 평소 작은 굿을 할 때는 볼 수 없는 제주의 많은 제차들이 등장한다. 신굿은 보통 열흘 이상 보름 정도 계속되는 큰 굿이다. 워낙 긴 기간 진행되고 많은 굿이 포함되어 있기에 대표적인 제차들을 중심으로 내보낸다. 여든이어멍으로 불리는 문순실의 어머니 역시 동김녕마을 당매인 심방이다. 그녀의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대를 이어가며 모녀가 지금도 굿판에서 살고 있다. 이 굿이 진행된 문순실의 집은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와 접해 있다. 그래서 매일 새벽 다섯 시 경에 진행된 관세우를 보고, 아침식사할 때까지 한 시간 정도 파도치는 바위 위에 앉아 전국의 굿과 무당들에 대해 십 여 일 동안 황루시 씨와 토론했던 기억이 새롭다 ..  (1989년/12권 《제주도 신굿》)


 김수남 님이 아니었어도 굿 사진을 찍은 사람이 꽤 있습니다. 김수남 님이 굿 사진을 찍던 무렵에도 적잖은 이들이 굿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굿 사진하고 김수남 님 굿 사진을 나란히 놓고 살피면, 다른 사람들 굿 사진은 영 못마땅합니다. 뭐하러 애먼 필름을 쓰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로 돈이 되기에 찍는 굿 사진이 아니고, 굳이 ‘한국 문화를 적바림한다’는 거룩한 뜻에서 찍는 굿 사진이 아닙니다. 굿이건 뭐건, 굿이건 춤이건, 굿이건 헌책방이건, 굿이건 풍물패이건, 굿이건 대통령 행차이건, 굿이건 4대강 사업이건, 굿이건 재가발이건, 굿이건 연예인 알몸 모델이건, 다 사진은 사진입니다. 저마다 스스로 좋아할 때에 찍는 사진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삶터와 삶자락을 찍을 사진입니다. 김수남 님은 스스로 굿이 되었고, 스스로 굿하고 살짝 떨어진 자리로 나와서 굿판에 고요히 녹아드는 흐드러진 몸사위로 사진찍기를 하지 않았나 하고 느낍니다. 고요히 녹아드는 흐드러진 몸사위일 때에 이렇게 애틋하다 느낄 사진 한 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강릉단오제》를 읽으며 이 사진책에 붙인 글이 더없이 거추장스럽다고 느낍니다. 글을 붙일 자리에 사진을 더 넣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이제는 김수남 님 사진에 섣부르거나 어설프거나 서툰 글을 보탬말로 달지 않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강릉단오제》 뒤쪽에는 빛깔 넣은 사진이 꽤 실리는데, 사진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장면을 담았다’는 말만 아주 짤막히 붙이기만 하면서, 굿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보여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풀나풀 옷자락이 춤추는 결에 생긋 웃는 굿쟁이 얼굴이 아름다이 담긴 빛깔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아, 이 사진이야말로 《강릉단오제》 겉장으로 보여줄 사진이 아닌가 하고 깨닫습니다. 《강릉단오제》 겉에 실린 흑백 사진도 나쁘지 않으며, 이 모습 또한 썩 훌륭하다 할 만하지만, 김수남 님이 굿판에서 여러 날 함께 지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추는 굿쟁이 웃는 얼굴’마냥 신나게 웃으면서 온 사랑을 바쳤을 테니까요.

 사랑하면서 찍은 굿 사진이거든요. 사랑을 쏟아 일군 굿 사진이거든요. 사랑을 소담스레 펼쳐 보이며 굿판에서 또다른 굿판을 선사하던 사진찍기이거든요. 굿판에서 굿을 벌인 굿쟁이이든, 굿을 치르려던 분들이든, 굿을 구경하던 사람들이든, 사진기 두 대로 새삼스럽고 남다른 살풀이굿을 선보이는 김수남 님을 서로서로 웃거나 울며 나란히 바라보았겠구나 싶거든요. (4343.10.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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