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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이 Fighting Bull, Hanmyung
윤현수 사진 / 눈빛 / 2008년 9월
평점 :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찍는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8] 윤현수, 《한명이》
- 책이름 : 한명이
- 사진 : 윤현수
- 펴낸곳 : 눈빛 (2008.9.23.)
- 책값 : 35000원
(1) 내 삶자리를 사랑하면서 사진 한 장
사진쟁이는 사진을 찍고 그림쟁이는 그림을 그리며 글쟁이는 글을 씁니다. 연극쟁이는 연극을 하고 춤쟁이는 춤을 추며 노래쟁이는 노래를 합니다. 노래에는 여러 갈래가 있고 춤에도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글에도 여러 갈래가 있는 한편 그림에도 숱한 갈래가 있어요. 사진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찍기에도 갖가지 갈래가 있어요.
가지가지 다른 길을 걸으면서 하는 사진이며 그림이며 글이며 연극이며 춤이며 노래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길을 걸으면서 할 수는 없는 사진이며 그림이며 글이며 연극이며 춤이며 노래입니다. 노래를 하는 이 가운데에는 레코드판이나 시디를 긁어서 소리를 새로 만드는 사람이 있을 테고, 전자장비를 만져 ‘지구에는 없는 소리’를 남달리 빚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 가운데에도 사진기와 필름과 메모리카드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필름만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있고 갖가지 장치를 하거나 전자장비를 써서 사진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문화를 즐기거나 무슨 예술을 뽐내건 언제나 사진이고 그림이며 글입니다. 연극이며 춤이고 노래입니다. 이들 문화는 늘 내 삶자리에 바탕을 둡니다. 이러한 예술은 한결같이 내 삶자락에 뿌리를 둡니다. 내가 살아가는 대로 일구는 문화인 사진입니다. 내가 살아가고픈 대로 가꾸는 예술인 글입니다. 내 삶이 아닌 네 삶이 훨씬 좋아 보여 네 삶을 좇으며 따라하는 문화나 예술은 될 수 없습니다. 스승을 좇는다든지 동무를 따른다든지 할 수 없어요. 노상 내 모습을 고스란히 담습니다.
느긋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하는 모든 일에 느긋함이 뱁니다. 능금을 팔든 배추를 팔든 물고기를 팔든 이이가 장사하는 가게에는 느긋함이 어려 있어요. 더 많은 돈을 뽑아내고파 하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하는 모든 일에 돈내음이 뱁니다. 회사를 꾸리든 회사원으로 있든 이이 옷자락과 발걸음에는 돈내음이 물씬 납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하는 모든 말에 착한 기운이 서립니다. 기나길게 말을 하든 짤막히 말을 하든, 편지를 쓰든 보고서를 쓰든 착한 기운이 가득 서립니다. 자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펼치는 모든 문학에 자랑하는 어깨춤이 깃듭니다. 사진을 찍든 노래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똑같습니다.
아이 하나를 함께 낳아 함께 기르면서 하루 내내 아이를 들여다봅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 보여주는 모습은 어버이가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이가 내뱉는 말은 어버이가 아이 앞에서 내뱉는 말 그대로입니다. 아이가 먹는 밥은 어버이가 먹는 밥 그대로예요. 어느 하나 아이 스스로 새로 만들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지 않은 모습이 없습니다. 아이한테서 사랑스러움을 느낀다면 어버이로서 사랑스럽게 살아가기 때문이고, 아이한테서 밉살스러움을 느낀다면 어버이부터 밉살스레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이랑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며 사진을 찍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이 아이 오늘 모습에 사랑스러움이 드러나는지 고단함이 드러나는지 착하며 고운 빛이 드러나는지 지루하며 골 부리는 몸가짐이 드러나는지 가만히 살핍니다. 겉보기로는 아빠가 아이를 찍은 사진이지만, 속보기를 한다면 아빠 된 어버이가 아이랑 복닥이는 하루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사진쟁이 작품을 언제 어디에서나 구경하거나 돌아볼 수 있는 오늘날입니다. 바야흐로 사진이 넘치는 이 나라 사진삶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예나 이제나 사진책은 잘 안 팔린다 하고, 예나 이제나 사진책 펴내는 출판사는 작품책 하나 선뜻 내놓지 못한다 하며, 예나 이제나 사진길을 고지식하게 파고드는 사람은 배를 곯는다 합니다. 그런데 잘 안 팔린다는 사진책이 나날이 더 많이 나오고, 펴내기 힘들다는 사진책 또한 꾸준히 많이 나오며, 사진 한길을 걷는 사람은 더 늘어납니다.
고작 열 해쯤 앞서인 2000년을 생각하면, 또 1990년을 돌아보면, 사진책 하나 번듯이 내놓은 한국 사진쟁이는 얼마 안 됩니다. 나라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진잔치 숫자는 썩 많지 않았습니다. 지난 2005년을 곱씹고, 2010년을 살피며, 다가올 2015년을 내다본다면, 사진책 하나 멋들어지게 내놓는 사람 숫자는 부쩍 는다 할 만하고, 사진잔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할 만합니다. 갖가지 갈래 온갖 사진을 아주 많은 사진쟁이들이 다 다른 눈썰미와 손짓으로 이루어 냅니다.
지난날에는 오로지 필름사진이었고, 이제는 필름사진과 디지털사진 두 가지입니다. 여기에 디지털사진이 아닌 만듦사진이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틀은 ‘사진’을 빌지만 ‘예술’을 하는 이들이 퍽 늘었어요. 이름부터 ‘사진찍기’가 아닌 ‘사진빚기’를 하는 분들이 꽤 늘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예술을 뽐낸다고 하는 이들만 사진빚기를 하지 않습니다. 멈추어 있는 물건을 그리는 그림이 있고, 모델을 세워 놓고 그리는 그림이 있듯, 정물만을 찍거나 모델만을 찍는 사진빚기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진은 이름은 사진찍기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진빚기입니다. 정물과 모델을 빌어 당신 생각과 목소리를 담는 예술로 거듭나는 사진빚기입니다.
말 그대로 사진찍기를 하는 사진쟁이는 무척 줄었습니다. 앞으로도 말 그대로 사진찍기로 사진을 즐기는 사진쟁이는 더 줄어들리라 봅니다. 사진기 하나를 믿거나 기대어 나하고 마주하는 사람과 만나면서 삶을 일구는 사진쟁이는 그예 줄어들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나랑 마주보는 목숨과 물건과 터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찍기로 거듭나는 사진쟁이는 자꾸 사라지리라 봅니다. 내 삶자리를 사랑하여 사진을 좋아하는 사진쟁이를 만나기 힘들어지며, 내 삶자리는 아랑곳하지 않는 가운데 사진빚기를 하는 사진쟁이만 수두룩하게 늘어난다 싶어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진은 사진이라 하겠지요. 이렇게 일해서 벌거나 저렇게 일해서 벌거나 돈은 돈이라 하니까요. 이마트 값싼 물건을 장만하여 아이를 먹이든, 동네 구멍가게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들여 아이를 먹이든, 생협에서 올바른 먹을거리를 마련하여 아이를 먹이든, 손수 땅을 일구어 아이를 먹이든, 어찌 되든 똑같이 밥이니까요.
내 어머니를 사진으로 찍어도 내 어머니하고 깊디깊이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 장 두 장 고맙게 ‘얻는’ 사진을 어머니랑 웃음과 울음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그러모아 선보이는 사진 작품은 좀처럼 찾아보지 못합니다. 내 어여쁘거나 잘생긴 짝꿍을 사진으로 담아도 내 짝꿍이랑 서로서로 어떤 길을 걸어오며 어떤 꿈과 보람으로 어떤 삶을 일구었는가를 톺아보는 가운데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사랑을 길어올리는 사진 작품은 도무지 찾아보지 못합니다. 골목길을 찍든, 여자 고등학생을 담든, 대나무숲을 옮기든, 몸매 좋은 연예인을 그리든, 나라밖 인도나 티벳이나 몽골에서 티없는 웃음을 빼앗든, 너무 섣불리 지나치게 빨리 참으로 우악스럽게 ‘만드는’ 사진이 아주 많이 넘실거리는 한국 사진밭이라고 느낍니다.
왜 우리는 이 나라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삶터와 이야기를 올망졸망 아기자기 알뜰살뜰 오순도순 ‘찍지’ 못하는가요. 우리는 내 곁에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님을 사진 한 장으로 ‘담을’ 수 없는지요. 구경하는 사진이나 뽐내는 사진이나 만드는 사진이 아니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진을 얻을 수 없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숨결을 보듬는 사진을 이룰 수 없나요.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며 땀투성이가 된 채 싱긋빙긋 웃고 떠드는 사진을 즐길 수 없나 궁금합니다.
사진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문학(글)도 삶이요, 노래도 삶이고, 춤도 삶입니다. 그림과 만화도 삶입니다. 연극과 영화도 삶입니다. 모두모두 내 삶을 살포시 어루만지어 나타내는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사진은 사랑하는 내 삶입니다. 사진은 사랑하는 내 삶과 함께 있는 고운 벗님과 살붙이랑 어울리는 신나는 삶입니다.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내 아이 얼굴이든 몸이든 모습이든 사진 하나로 찍지 못합니다. 내가 내 터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골목길이든 도심지이든 고샅길이든 바닷가이든 사진 하나로 담지 못합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내 삶을 옮기는 일이지만, 그냥저냥 흐르는 내 삶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둘도 셋도 넷도 없이 아끼며 사랑하는 내 삶을 눈물콧물땀방울 뒤섞어 힘차게 옮기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일이에요. 사랑하는 일이랍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일이고요. 내 삶이고 내 사랑이며 내 사람이거든요.
(2) 소 아닌 싸움을 찍은 ‘한명이’ 이야기
사진책 《한명이》를 읽습니다. 《한명이》는 사진책인 만큼 사진은 ‘본다’고 해야 맞으나, 사진책 《한명이》를 읽습니다. 소 이야기나 소 삶을 다룬 사진이 아닌 소를 빌어 사람살이 싸움과 싸움판을 넌지시 보여주는 사진책 《한명이》를 읽습니다.
사진책 《한명이》는 싸움소 가운데 ‘한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소가 싸움판에서 어떻게 싸우는가, 싸움판 바깥에서는 어떻게 지내는가를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사진쟁이 윤현수 님은 싸움소 한명이를 빌어 당신이 하루하루 살아낸 발자국을 보여줍니다. 윤현수 님 사진감은 싸움소요, 싸움소 가운데 한명이입니다만, 정작 이 사진책 《한명이》에서는 싸움소 한삶이나 한명이 하루를 담지 않습니다. 오직 윤현수 님이 어떤 마음과 눈길과 몸짓으로 살아가는가를 당신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 무릇 산 것들 중 싸우지 않는 것이 있을까. 소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약 2천 년 전 정도로 추정된다. 아마 그때부터 소싸움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싸움의 이유도 다양하였을 것이지만, 사람의 싸움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의 소싸움은 일종의 놀이다. 야생의 자연스런 소들의 싸움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한 규칙과 약속에 의한 싸움놀이이다. 현재와 같은 민속놀이 소싸움은 아마 명절인 추석 때 풍년과 화평을 기리는 뜻으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진주 소싸움의 기원은 백제와 싸워 이긴 신라가 시작했다는 전승기념 잔치 설을 비롯하여 고려 말부터 자생했다는 고유의 민속놀이 설 등 다양하다 .. (172쪽)
사진쟁이 윤현수 님이자 씨이오라 할 만한 윤현수 님한테 사진은 ‘싸움’입니다. 아니 윤현수 님이 사진기를 들기 앞서 윤현수 님 삶은 ‘싸움’입니다. 윤현수 님이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싸움’으로 날을 지새웁니다.
싸움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따질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이야기이든 사진으로 알뜰히 담으면 넉넉합니다. 이런 이야기이든 저런 이야기이든 사진으로 담는 손길과 그릇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우면 즐겁습니다. 예쁜 꽃을 찍어야 예쁜 사진이 되지 않으니까요. 아픈 사람들을 찍는다고 아픈 사진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나저나 윤현수 님 사진에 담기는 소들, 싸움소들은 어떤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윤현수 님은 ‘우리 나라에 소가 처음 들어온 2천 년 앞서부터 소싸움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이 나라에 소싸움이 벌어지기로는 ‘신라 때나 고려 때 즈음’이라고 (윤현수 님 스스로) 말합니다. 고려 때라면 육칠백 해쯤 앞서일 테고, 신라 때라면 즈믄 해쯤 앞서가 될까요. 그런데 참말 소싸움이 그무렵부터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으려나요. 소싸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돈과 힘이 있는 사람’이 즐길 뿐, 여느 농사꾼은 즐기지 않았다면 이를 어떠한 ‘문화’나 ‘삶’으로 보아야 할는지요. 지난날 농사짓던 사람 가운데 소를 부릴 만한 살림을 꾸린 이는 얼마나 되었을는지요.
.. 그래 끝장을 보아야 한다. 두 마리의 싸움소가 내뿜는 모래먼지 속에서 승패를 향한 그치지 않는 뿔 치는 소리는 〈비창〉 3악장의 팀파니 소리에 섞여 나의 이를 시리게 한다 .. (177쪽)
윤현수 님은 더 잘 찍은 사진이 아니고, 더 못 찍은 사진이 아닌, 꼭 윤현수 님이 좋아하는 삶결 그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윤현수 님 소싸움 사진에서 피가 튄다면 윤현수 님 삶에서 피가 튀기 때문입니다. 윤현수 님 소싸움 사진에서 짜릿함을 느낀다면 윤현수 님 삶에서 짜릿함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윤현수 님 소싸움 사진에서 아픔과 괴로움과 고단함이 엿보인다면 윤현수 님 삶에 아픔과 괴로움과 고단함이 늘 어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한명이》를 읽고 거듭 읽고 다시 읽으면서 제 마음이 썩 따스하지 못합니다. 윤현수 님으로서는 한명이라는 싸움소 하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사진을 찍어 책으로 여밀 때에 사람들하고 따스함을 나눌 마음이 아니었구나 싶거든요. 윤현수 님은 당신 삶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데에 알뜰합니다. 들여다보자면 소요 싸움소요 한명이입니다. 이름표는 틀림없이 ‘한·명·이’입니다. 그렇지만 알맹이는 ‘윤·현·수’예요. 윤현수 님은 사진이라는 매체 빛깔을 잘 헤아리면서 당신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합니다. 당신이 곧바로 쏟아낼 이야기보다는 사진이라는 옷을 입힌 문화나 예술로 당신 발자국과 걸음걸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있는 그대로 사람들 앞에 서기보다 한 꺼풀 옷을 입은 채 모습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수많은 싸움소들, 그들은 각자 나름의 이름을 가지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장을 누빈다. 그러다 싸움소로의 수명이 다하는 그날, 싸움소는 일반 비육우보다 훨씬 싼값에 넘겨진다. 억대에 달하는 이름값은 첫새벽 이슬처럼 사라지고, 다만 육질이 질긴 소로서 생을 마감한다 … 나도 그저 한 마리 소가 된다. 한명이가 된다. 덕성농장의 한 마리 싸움소가 된다. 내 피멍든 삶의 상처 속에 강씨 부자의 오줌찜질이 놓인다. 그들의 눈길과 손길이 청·홍·황빛의 묵은 광목이 지친 내 이름을 감싼다. 그곳에서 나는 아버지를 본다. 당뇨, 빨치기, 폐병. 세상의 병고 속을 우리 안의 한 마리 곰처엄 의연히 싸우다 가신 아버지가 보인다 .. (180∼181쪽)
“무릇 산 것들 중 싸우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하고 묻는 윤현수 님입니다. 그래요, 아마 아직은 잘 안 보이실 테지요. 그러나 앞으로는 부디 보거나 느끼거나 알아채 주시면 좋겠어요. 산 목숨 가운데 안 싸우며 사랑하는 예쁜 님이 무척 많답니다. 싸움이라는 낱말을 아예 모르는 사람 또한 몹시 많아요.
팔리 모왓 님이 쓴 《잊혀진 미래》라는 책을 한번 읽어 보셔요. 이시무레 미치코 님이 쓴 《슬픈 미나마타》라는 책을 가만히 읽어 보소서. 그지없이 착하며 고운 사람들 삶자락이 알뜰히 서려 있답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쓴 ‘말괄량이 삐삐’ 이야기이든 ‘떠돌이 라스무스’ 이야기이든 곰곰이 새겨 보셔요. 얼마나 따스하며 넉넉한 가슴으로 내 이웃을 보듬는 사람이 많은가를 놀랍게 깨달을 수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무릇 살아가면서 사랑하지 않는 목숨이 있을까?” 하는 말마디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가요. 우리는 사랑하며 어깨동무해요. 우리는 사랑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려요.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이 가득합니다. 사랑으로 아침밥을 차리고, 사랑으로 살붙이 빨래를 하며, 사랑으로 집식구 잠자리를 깔아 함께 잠을 잡니다. 사랑하는 동무들이랑 일을 하여 살림돈을 마련하고, 사랑하는 이웃들이랑 마을이나 동네를 이루며, 사랑스러운 뭇목숨 어우러진 숲과 들과 바다를 소담스레 돌보면서 이 땅 이 나라에 두 다리로 우뚝 섭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사진 또한 있고, 사랑이 없을 때에 사진 또한 없습니다. (4343.10.21.나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