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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ㅣ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나그네가 즐긴 아침
[책읽기 삶읽기 8] 요네하라 마리, 《미식견문록》
2010년 10월, 《팬티 인문학》이라는 책이 나왔다. 2006년에 숨을 거둔 일본사람 요네하라 마리 님이 쓴 책이고, 이분 책으로는 열 권째 한국말로 옮겨진다. 참 바지런히 옮겨내 주는구나. 그런데 《팬티 인문학》으로 옮긴 요네하라 마리 님 일본책 이름은 “パンツの面目ふんどしの沽券”이다. 우리 말로 고스란히 적바림하자면 “속옷(팬티) 참모습과 훈도시 값어치”가 될 텐데, 한국에서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 앞에 ‘팬티’라는 이름을 붙여야 제법 눈에 뜨이며 잘 읽히는가 보다. 그렇다면 내가 읽은 《미식견문록》은 일본에서 어떤 이름으로 나왔을까? 간기를 보면 알파벳으로 일본책 이름을 적어 놓는데, “RYOKOSHA NO CHOSHOKU”이다. 뭔 소리일까. 다시 더 알아보니, 이 일본말은 “旅行者の朝食”을 뜻한단다. 아하, 그러니까 “길손이 먹는 아침”이다. “나그네 아침밥”이든지.
문득 궁금하다. 이렇게 ‘딱딱’하고 ‘똑똑’해 보이도록 책이름을 붙여야 요네하라 마리라고 하는 일본사람 글을 빛낼 수 있는가. 이처럼 ‘뭔가 그럴듯하게’ 붙여놓는 책이름이어야 “유쾌한 지식여행자” 이야기가 되는가.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붙은 책을 읽으면, ‘일본사람이지만 일본 바깥으로 오래도록 떠돌아다녀야 하던 요네하라 마리 님이 반갑게 먹거나 즐겁게 먹은 밥’ 이야기가 수수하게 나온다. ‘견문(見聞)’, 그러니까 “보거나 들어서 얻은 지식”으로 쓴 이야기가 아니라, 요네하라 마리 님이 몸소 겪고 살아낸 이야기가 조곤조곤 나온다. 책 첫머리인 15쪽을 보면, “고전어 소양은 교육받을 수 있는 카스트에 속한다는 증거요, 신분의 상징이었으니 그 전통은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 발언 중에 틈만 나면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섞어서 교양을 과시하는 것이 웅변술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별것 아닌 것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효과도 있으니 그만둘 수 없는 것이리라. 일본인이 고사성어를 즐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같은 대목이 있다. 일본사람이 ‘고사성어(또는 사자성어)’를 즐기는 일이란 거드름을 피우는 볼썽사나운 모습이란 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글월을 우리 말로 옮기며 ‘일맥상통’이라는 한자말을 집어넣는다. 딱한 번역이라고 할까. 17쪽에 곧바로 ‘뉘앙스’라는 낱말이 튀어나오는데, ‘느낌-말맛-말느낌-맛-마음’ 같은 우리 말로 옮겨적어야 알맞다. 175쪽 “이거야말로 내가 지으려는 집의 콘셉트가 아닌가”는 뭔 번역이랄 수 있으려나. “집 모양”이나 “집 얼개”나 “집 생김새”나 “집 모습”쯤으로 적어 놓아야 알맞다. 번역이 얄궂은 대목을 하나만 더 든다면, 158쪽 “의학자 디오스코리데스도 양배추의 약재로서의 효능을 칭찬하며”가 있다. “양배추가 약재로 좋다고 칭찬하며”쯤으로 적어 주어야지. 토씨 ‘-의’를 잇달아 쓰는 일본 말투를 그대로 옮기면 어떡하나. 이런 번역은 번역이 아니다.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달린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출판사에서 처음부터 요네하라 마리 님 삶과 마찬가지로 애써 치레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좋아하는 흐름에 몸을 맡기어 즐겁게 살아가는 느낌을 북돋는 마음결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면. 번역자는 책이름부터 살포시 붙이는 가운데 한결 따뜻하게 옮겼다면.
이 책을 읽을 한국사람은 무엇을 느껴야 좋을까. 이 책을 읽는 한국사람은 무엇을 생각해야 좋은가. 지식을 다루는 《미식견문록》인가? 삶을 말하는 《미식견문록》인가?
꽤 거추장스러운 이름이요 속이 빈 이름이며 지나치게 부풀려 놓은 이름 때문에 자꾸 곁길로 샌다. 요네하라 마리 님한테는 ‘미식(美食)’, 곧 “좋은 밥”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펼치며 자랑하려고 이런 책을 썼겠는가. “나는 ‘버려진 아이들이 모험 끝에 성장하여 돌아온다’는 구조에 더 눈길이 간다. 아마도 아이들을 버리는 일이 그만큼 빈번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부모들이 많았다는 뜻이 아닐까. 옛날이야기는 그런 마음의 갈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142∼143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따사로운 손길을 느낀다. 책이름은 어줍잖게 《미식견문록》이지만, 정작 이 책에 깃든 이야기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따숩게 마주하는 ‘밥 한 그릇에 얽힌 웃음과 눈물’이지 싶다.
요네하라 마리 님으로서는 이 책에서 내내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가 사라질 듯한 요즘이지만, 자신을 조국에 묶어 두는 가장 튼튼한 동아줄은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음식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좀 걱정스럽다. 요즘 와서 편의점 음식으로 크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217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신이 어린 날부터 가까이 놓고 즐기던 먹을거리란 바로 ‘배고픔만 채우는 밥’이 아니라 ‘내 어버이가 지내온 나날을 헤아리고 내 어버이와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여는 실마리가 되어 주는 밥, 한 마디로 ‘이야기 밥’임을 밝히고 싶었구나 하고 느낀다. 미국사람들이 자꾸 전쟁을 일으킬 뿐 아니라 전쟁에 빠져드는 까닭이란 바로 ‘미국사람 스스로 먹는 밥’ 때문이요, 일본사람 또한 미국사람과 비슷하게 밥을 먹으며 살고 있기에 일본사람들조차 미국사람처럼 전쟁에 무디어지거나 전쟁에 미쳐 버리는 바보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느낀다.
스스로 즐겁게 살고플 뿐 아니라 따뜻하게 살고프며, 스스로 재미나게 살고플 뿐 아니라 아름다이 살고픈 넋을 글줄에 예쁘장하게 엮어 놓은 글쟁이 요네하라 마리 님이겠다고 느낀다. 창작이 아름답다면 번역 또한 아름다울 노릇이다. 다시 번역 얘기를 하고프지 않으나 두 가지를 더 들어 본다. “마음의 갈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도”는 “마음앓이를 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는 노릇을 하는지도”로 다듬어 주고,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음식임이 틀림없다”는 “틀림없이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밥이다”로 다듬어 주고 싶다. 낱말은 그대로 둔다 하더라도 말투는 고쳐야 한다. 낱말을 그대로 두고 싶다만 ‘역할’ 같은 낱말은 그대로 둘 수 없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써야 하니까. 요네하라 마리 님은 늘 생각을 하면서 살아낸 한 사람일 테니까.
책을 덮으려다가 끝자락에 붙은 글쓴이 말을 거듭 읽는다. “맛있는 것이라면 정신 못 차리지만 미식가를 자처할 정도로 전문가도 아니요, 미각에도 자신이 없다(245쪽).” 그런데 책이름은 《미식견문록》이다. 그지없이 슬프다.
나는 집 바깥보다 집 안에서 더 오래 지내며 아이를 함께 돌본다. 웬만한 집일은 거의 다 한다. 이렇게 할밖에 없는 집 형편이지만, 집일을 하는 애 아빠라 말할 수 있어도 ‘집살림 잘하는 애 아빠’라 말할 수 없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대단하다 말할는지 모르나 나로서는 하나도 대단할 구석이 없을 뿐더러 제대로 못하는 대목이 많다. 이런 나한테 ‘육아의 달인’이라거나 ‘살림 전문가’란 이름을 붙이면 얼마나 가시방석일까. 그나저나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새겨진 책에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이란 말까지 덧달린다.
끔찍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책을 팔아야 하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요네하라 마리 님 글을 읽혀야 하나. 사람들 누구나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좋은 밥을 즐기는 삶을 꾸리는 이야기를 수수하게 나누는 길을 여는 좋은 책으로 만들어서 내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울까. 아무래도 무엇이든 한국으로 들어오면 좋았던 책도 좋게 여기기 힘들고, 고왔던 이야기도 고운 이야기로 아로새기기 어렵구나. (4343.10.12.불.ㅎㄲㅅㄱ)
― 미식견문록 (요네하라 마리 글,이현진 옮김,마음산책 펴냄,2009.7.1./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