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39 : 내 삶만큼 읽는 책


 어린이책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던 지난날, 제가 몸담은 일터가 아주 휼륭한 책을 몹시 훌륭한 매무새로 일군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무렵 해마다 장만하여 읽는 책이 천 권이 넘고, 따로 장만하지 않으며 읽는 책 또한 꽤 많았습니다만, 한 해 동안 읽는 책이 제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스물다섯 살 젊은이가 알 수 있는 책은 온누리에 쏟아져나온 책 숫자에 대면 매우 보잘것없습니다.

 2000년 6월 10일 낮, 서울 홍대 앞에 자리한 헌책방 〈온고당〉에서 《北邊の原野を驅ける キタキツネ》(平凡社,1974)라는 사진책 하나를 만납니다. 일본 사진쟁이 ‘竹田津 實’ 님이 내놓은 책으로, 이분 책은 이맘때까지 아직 나라안에 한 권도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2005년에 비로소 이분이 글을 쓴 그림책 하나가 옮겨지고, 2007년부터 이분 사진책이 하나둘 옮겨집니다. 바로 ‘다케타쓰 미노루’ 님입니다. 제가 일하던 출판사 자료실에도 《北邊の原野を驅ける キタキツネ》라는 사진책 하나 꽂혀 있었습니다. 이곳은 자연 그림책을 많이 냈는데, ‘한국에는 없는 여우’를 그리자니 어쩔 수 없이 일본사람이 일본땅에서 일본 들짐승 여우를 담은 사진책을 들여다볼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한국땅에 없는 들짐승은 여우만이 아닙니다. 늑대도 없고 범도 없습니다. 곰도 없다 할 만합니다. 이러한 들짐승들 자취와 모습과 삶을 그림책으로 그려내자면 동물원에 가거나 일본사람이 찍은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새책방과 헌책방을 꾸준히 돌아다니며 나라 안팎 온갖 책을 바지런히 살피면서 하나둘 깨닫습니다. 나라안 적잖은 창작그림책에 실린 들짐승 모습은 나라밖 적잖은 사진책에 실린 모습을 들여다보며 베꼈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제아무리 돈 많다는 출판사에서 큰돈을 들여 그림쟁이 한 분한테 힘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들짐승 모습 하나’를 잡아채어 그리도록 아프리카로 보내 주어 몇 달쯤 묵도록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범이나 사자가 아니더라도 다람쥐나 토끼를 그릴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 가두어 놓고 지켜보는 짐승이 아니라, 들판과 산자락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들풀과 산열매를 먹고 자라는 짐승을 오래도록 가까이하는 가운데 ‘한국 자연 터전 들짐승 모습’을 살가이 담아내도록 이끄는 출판사가 한 군데나마 있을까 궁금합니다. 출판사에서 돈을 대지 못한다면 그림쟁이 스스로 돈과 품과 긴 나날을 땀흘리고 바칠 분이 몇이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이나 만화를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나 스스로 살아가는 만큼 쓰고 그리며 찍습니다. 내 삶만큼 글을 씁니다. 내 삶을 넘어서는 만큼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내 삶 테두리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책 만드는 일꾼 매무새도 매한가지입니다. 책 하나 마주하여 읽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만큼 쓰고 내 삶만큼 엮으며 내 삶만큼 읽습니다. 한결 아름다운 넋을 돌보며 사랑하고자 할 때에는 나날이 조금씩 거듭나는 빛깔과 내음과 소리가 글월 한 자락에 담깁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아름다이 거듭나는 만큼 알맹이와 속살을 한껏 깊고 넓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글 쓰기’나 ‘좋은 책 읽기’를 하지 못합니다. 오직 ‘좋은 삶 일구기’에 마음과 몸을 쏟습니다. (4343.10.7.나무.ㅎㄲㅅㄱ)
 

(일본 사진책을 베껴서 내놓은 그림책 이야기는 좀 나중에 다시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