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 분단된 나라의 슬픔, 비무장지대 이야기 평화그림책 2
이억배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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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훈련 군대 나라에 평화란 없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9] 이억배,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우리 나라는 식량자급율과 쌀자급율이 무척 낮습니다. 한 해에 한 번쯤 통계가 나오기는 하지만 언론에는 거의 실리지 않는 자급율입니다. 언론에는 언제나 쌀이 남아돌아 걱정이라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쌀값이 한 푼이라도 오르면 물건값이 치솟는다며 근심이라는 이야기가 덧붙습니다.

 도시사람은 벼논이 어떻게 생기거나 이루어져 있는지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아니, 날마다 밥을 먹으면서도 논이든 밭이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시사람들한테는 생각할 일이 많고 마음쓸 곳이 수두룩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땅과 농약과 자연과 유전자 비틀기 이야기에는 눈길조차 둘 겨를이 없습니다.

 때때로 ‘벼농사나 밭농사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이 나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날마다 먹는 밥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느끼도록 도우려고 펴내는 책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네 어른들이 읽을 ‘벼농사나 밭농사 이야기’ 책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예 없다 하여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쌀 이야기 그림책을 사 주어 읽히면서, 정작 어른이 먼저 쌀 이야기를 살피는 일은 없습니다.

 큰 비바람이 지나갔습니다. 도시에서도 건물이 흔들린다든지 간판이 날아갔다든지 유리창이 깨졌다든지 전봇대가 넘어졌다든지 하면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골에서는 논이 물에 흠뻑 잠긴다거나 벼가 모조리 넘어진다거나 논둑이 무너진다거나 하면서 슬픈 일이 생겼습니다.

 쓰러진 건물은 다시 세우면 되고, 깨진 유리창은 새로 갈면 됩니다. 그러나 무너진 논둑을 다시 세우거나 넘치는 논물을 흘려보내거나 쓰러진 벼를 일으켜세운다 하여도 벼농사는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집 텃밭에 심은 배추는 거의 녹아 버렸고, 무 또한 몇 뿌리 건사하기 힘듭니다. 크게 농사짓는 분들은 한숨이 아주 클 테지요. 때를 놓친다거나 날씨가 흔들릴 때마다 두 손을 들밖에 없는 농사짓기입니다.


..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들판에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으니까요 ..


 사람들 누구나 몸소 겪어야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몸소 겪었으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으나, 몸소 겪지 않고서는 제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거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거나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많이 보았다 할지라도 알아차릴 수 없을 뿐더러, 안다 할 수조차 없습니다. 전쟁이든 평화이든 우리가 몸소 겪지 않고서야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거나 무시무시한 줄을 깨닫기 힘듭니다. 평화 또한 우리가 몸소 누리지 못하고서야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줄 느끼기 어렵습니다.

 남녘과 북녘 사이에 비무장지대가 있습니다. 말이야 비무장지대이지, 이곳 비무장지대처럼 ‘무장이 잘 된 곳’은 없습니다. 이름이야 비무장지대이지, 정작 이 땅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무기가 넘치디넘치는 곳입니다. 허울이야 비무장지대이지, 바로 이 터에는 남북녘 모두 젊디젊은 사내들한테 군인옷을 입히고 총칼을 들리워 수십만을 몰아넣습니다.

 비무장지대에서 군대살이를 해 본 사람이라 해서 비무장지대를 잘 알지는 않습니다. 이곳에서 군대살이를 했달지라도 간부로 있던 이들, 더욱이 맨 밑바닥 중대나 독립소초가 아닌 대대나 연대 같은 곳, 또는 사단이나 군단 즈음에서 군대살이를 한 사람으로서는 비무장지대 속살을 알 노릇이 없습니다. 주특기 100(소총수, 1111)부터 106(무반동총, 1114)까지 받은 땅개(육군 보병)들이 비무장지대라는 곳에서 하루를 어찌 보내는지를 몸소 겪지 않고서야 비무장지대가 남북녘에서 어떠한 터전인가를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 비무장지대에 여름이 오면 군인들은 줄지어 행군을 하고 고단한 훈련을 받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늘도 전망대에 올라가 북녘 땅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


 가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비무장지대 모습이 나옵니다. 아는 이는 알겠으나,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비치는 비무장지대는 ‘속모습을 감춘 껍데기’입니다. 취재를 하러 비무장지대에 가 본다든지, 학술조사나 연구 때문에 비무장지대에 들어간다든지 할 때에도 겉을 살짝 훑을 뿐입니다. 특전사나 수색대라는 군인은 비무장지대 곳곳을 누비지 않습니다. 늘 다니는 길로만 순찰을 돕니다. 그야말로 땅개인 맨 밑바닥 군바리들만 비무장지대 곳곳을 누빕니다. 왜냐하면 길을 닦든 짐을 나르든 훈련을 하든 지뢰를 묻거나 캐든, 지뢰밭 둘레에 쇠가시그물을 치든, 방공호를 새로 파거나 시멘트로 집을 짓든 …… 모든 ‘사람이 움직여서 해야 하는 일’은 땅개들이 두 다리로 비무장지대를 밟으면서 합니다.

 제가 비무장지대 깊숙한 곳에서 군대살이를 하던 1995∼1997년에도 고엽제를 철책 둘레에 뿌리며 ‘사계청소(또는 시계청소)’를 했습니다. 해마다 고엽제를 뿌리고 거듭 뿌려도 풀이 어찌나 잘 나는지, 경계근무를 서는 초소에서 철책 너머가 가리기 때문에 고엽제를 뿌리고 풀과 나무를 베고 하느라 한 세월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계청소를 한다며 고엽제를 뿌리고 풀과 나무를 베어낸 탓에 봄부터 가을까지 큰비가 거센 바람과 함께 몰아치면 철책 둘레 흙이 무너집니다. 여느 때에 워낙 나무이고 풀이고 베어 없애니 비만 오면 흙벼락이 치지요. 그러면 땅개 군바리들은 다른 흙땅에서 흙 마대에 퍼 담고 날라서 무너진 자리를 메꾸는 일(사역)을 합니다. 비만 왔다 하면 물골작업을 한다며 삽을 들고 나섭니다. 계급장 별을 단 사람들이 전방 순시를 온다 하면 한두 달에 걸쳐 ‘도로 평탄 작업(높은 간부가 탄 짚차가 흙길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반반하게 길닦기)’을 합니다. ‘도로 평탄 작업’을 할 때에는 사단에서 ‘덤프 지원’이 나오는데, 사단 운전수가 덤프를 몰며 울퉁불퉁 길바닥에 찔끔찔끔 흙을 뿌리면, 우리들 땅개 군바리는 삽 한 자루씩 들고 있다가 신나게 바닥을 다집니다. 이러기를 한두 달 하고 나서야 별을 하나나 둘쯤 단 사단 간부나 군단 간부가 짚차를 타고 비무장지대 순시를 나옵니다. 뭐, 더 높은 분들은 아예 헬기를 타고 오니까 차라리 낫지요. 비무장지대 맨 안쪽 우리 중대 옆 가칠봉 꼭대기에는 헤엄터까지 있어(이 헤엄터는 바로 우리들 땅개가 연대 주둔지부터 모래와 자갈과 물과 시멘트를 등짐으로 이고 지고 날라서 만들었습니다), 별 단 높은 간부들은 여름마다 이곳으로 헬기 타고 나들이를 왔으며, 별 안 단 높은 간부들은 짚차를 타고 마실을 왔습니다.

 사단이나 군단 간부가 들이닥치기 앞서 마지막 주에는 밤을 새우며 길닦기를 합니다. 깊은 밤에 별을 보며 삽질을 하고 있자니 고참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농담 한 마디를 합니다. “야, 북한 애들은 (삽을) 천 번 뜨고 허리 한 번 편다는데, 우리는 만 번 뜨고 허리 한 번 펴자.”


.. 비무장지대에 가을이 오면 군인들은 탱크로 출동을 하고 전투기로 폭격하는 훈련을 합니다. 할아버지는 또 다시 전망대에 올라가 텅 빈 북녘 하늘을 바라봅니다 ..


 군대 얘기만큼 재미없는 얘기가 없고, 군대에서 공차기를 한 얘기만큼 더 재미없는 얘기가 없다 했습니다. 군대라는 곳이 몹시 끔찍하며 지겨운 한편 두렵고 슬프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배울 뿐 아니라 가르치고 물려주는 곳입니다. 게다가 우리 나라 군대는 두서너 해씩 의무복무를 하도록 하면서 가장 젊고 푸르며 싱그러운 나이에 ‘죽이는 재주’와 ‘밟는 솜씨’와 ‘때리고 맞는 버릇’을 길들여 놓습니다. 군대를 마친 다음에는 언제라도 예비군이나 민방위로 불러들여 ‘사람 죽이고 밟다가는 주먹다짐을 하는 삶’을 잊었는가 잊지 않았는가 살핍니다.

 군대라는 곳에 끌려가던 날부터 군대라는 곳에서 풀려난 오늘까지 곰곰이 돌아보노라면, 이 나라 한국땅에서 따스한 봄볕 같은 평화가 자리한 적은 한 번도 없구나 싶습니다. 진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예전 미국 부시 대통령 같은 사람을 놓고 ‘전쟁 미치광이’라 손가락질했습니다만, 미국 부시 대통령 같은 사람은 전쟁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전쟁 미치광이는 부시 대통령 뒤에 숨어, 우리한테 안 보이는 자리에서 웃음짓고, 부시 대통령은 한낱 허수아비입니다. 더군다나 한국땅에서 ‘서울 불바다’를 외치는 북녘 정치꾼을 비롯해 ‘때려잡자 빨갱이’를 외치는 남녘 정치꾼과 어르신들이야말로 전쟁 미치광이입니다.

 그런데 이들만 전쟁 미치광이이지 않습니다. 평화와 함께 이 땅에 뿌리내릴 평등을 멀리하는 모두가 전쟁 미치광이입니다. 어머니 성과 아버지 성을 함께 쓴다고 남녀평등이지 않습니다. 남녀평등이란 삶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집안살림과 집밖살림을 남녀가 알맞고 아름답게 나누어 즐기는 데에 남녀평등이 있습니다. 입시지옥에 푸름이를 내모는 어른들 모두 전쟁 미치광이이지만, 입시지옥에 푸줏간 돼지처럼 끌려가면서 스스로 뛰쳐나오지 않는 푸름이 또한 전쟁 미치광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전쟁 미치광이 굴레에서 놀아나는 셈입니다. 우리는 전쟁 미치광이 놀음놀이에서 허덕일 바보가 아니라, 평화와 평등을 누리며 나눌 벗입니다. 사랑과 믿음을 얼싸안으며 웃음과 울음으로 우리 삶을 곱게 여밀 동무입니다.

 그림책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을 몇 번 들여다보다가 덮습니다. 한국전쟁을 기리면서 나온 이 그림책은 이 땅에 참다운 평화와 사랑이 깃들기를 꿈꾸는 넋을 고이 스며 놓습니다. 이 땅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평화와 사랑을 아끼기를 바라는 얼을 살포시 담아 놓습니다.

 뜻은 좋습니다. 값은 훌륭합니다. 다만, 비무장지대가 어떤 곳인지 옳게 돌아보지 못한 그림이 곳곳에 보입니다. 비무장지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올바로 다루지 못합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비무장지대 모습이 아닙니다. ‘민간인’으로서는 볼 수 없는 곳이 많으며 ‘민간인 어린이’로서는 알 턱조차 없으니 제대로 비무장지대를 그린다면 외려 비무장지대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그림책을 못 알아볼 수 있어요.

 그러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비무장지대에도 봄이 찾아들지만 비무장지대에서 수달과 고라니가 홀가분하게 뛰어놀 수 없습니다. 비무장지대에 들어간 군인은 ‘훈련을 받지 않’습니다. 비무장지대 군인은 ‘행군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후방 주둔지에서 비무장지대로 근무지를 바꿀 때(여섯 달에 한 번씩 근무지를 바꿉니다)에 비로소 군장을 짊어지고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고 나오고 합니다. 비무장지대에 들어간 군인은 여섯 달 내내 3교대 경계근무만 서고, 사계청소와 지뢰작업과 물골작업과 도로 평탄 작업과 곰취 작업(연대와 사단과 군단 간부들한테 산나물과 곰취 따위를 뜯어다 바쳐야 하는 작업)과 갖가지 끝없는 작업과 또 작업을 합니다. 비무장지대에서 내려온 군인이 ‘지오피 휴가’를 받은 다음 비로소 갖은 훈련과 행군에 시달립니다.

 연어가 비무장지대까지 들어오기는 합니다. 저 또한 길이 1미터 넘는 연어를 두타연에서 맨눈으로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이 연어들이 제대로 알을 낳을 만한 터전이 못 되는 비무장지대입니다. 산양이 뛰어다닐 만한 넉넉한 바위나 땅이 없는 비무장지대입니다. 탱크가 출동하고 전투기로 폭격하는 훈련을 받는 곳은 비무장지대가 아닌 ‘비무장지대 뒤쪽 군부대 많은 여느 마을’입니다. 비무장지대에서 탱크가 움직인다면, 북녘에서 곧바로 미사일을 쏘며 전쟁이 터집니다. 비무장지대 북쪽 땅에서 북녘 군인이 탱크를 몰고 움직일 때에도 남녘 군대에서는 미사일을 쏘며 전쟁이 터지도록 작계(작전훈련계획)가 짜여졌어요.

 비무장지대에서는 군인조차 ‘늘 다니는 길’ 아닌 데로는 못 다니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어디에 지뢰가 묻혔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면 경계근무를 서려고 오갈 때에도 발바닥 디디는 땅을 천천히 살피며 나무막대기로 쑤시며 다녀야 합니다. ‘사라졌거나 사라질까 걱정스러운’ 짐승들이 비무장지대에서 살기도 하겠지만, 아름답거나 홀가분하게 노닐 수 없습니다. 멧돼지와 독수리와 까마귀는 군인들이 밥쓰레기를 버리는 짬통을 뒤지고, 때로는 멧돼지가 짬통에 빠져서 죽으며, 큰비가 퍼부은 뒤에 노루나 고라니가 지뢰를 밟고 죽기도 합니다(군인도 많이 죽습니다).

 생각해 보면, ‘현실과 다른 아름다운 꿈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곳 비무장지대에 ‘아직 없는 봄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림책을 엮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생각하며 이 그림책을 읽어야 할 테지요. 참말 아무런 평화도 사랑도 꿈도 즐거움도 없는 군대에, 비무장지대에, 이 나라에 거짓스러운 이야기들뿐이지만 이러한 봄이 오기를 비손하는 마음을 담은 그림책으로 삼아야 할 테지요. 다만, ‘사실 관계’는 옳고 바르게 적어야 하고, 제아무리 꿈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더라도 ‘없는 이야기를 있는 이야기인 듯’ 그리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비무장지대라 하는 현실세계가 어떤 현실인가’를 보여주면서 평화를 이야기하려는 그림책이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이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좋은 뜻으로 엮은 그림책이요, 어김없이 고운 넋을 살리자는 그림책인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입니다. 그러나 비무장지대는 사람들이 잘못 알듯 ‘그리 아름다운 자연 누리’가 아닙니다. 늘 다니는 길에도 비만 왔다 하면 지뢰가 흘러내려왔을까 걱정되는 곳이요, 끔찍한 살인훈련과 폭력이 판치는 ‘죽음 누리’가 비무장지대입니다. 달콤하며 빛깔 예쁜 그림결로 비무장지대를 그려 놓는다고 해서 평화를 앞당길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 땅 이 누리가 얼마나 무섭고 슬픈 전쟁 누리요 죽음 누리인가를 똑똑히 바라보며 꾸밈없이 드러내어 밝히고 나누면서, 비로소 평화와 평등과 사랑과 믿음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를 깨닫는 길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무장지대에는 봄이 온 적이 없고, 봄이 올 수조차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4343.9.17.쇠.ㅎㄲㅅㄱ)


―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이억배 글·그림,사계절,2010.6.25./10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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