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빛길
서울 지하철 강변역에 자리한 버스 타는 곳에서 충북 음성군 생극면으로 오는 시외버스는 저녁 7시 40분에 막차입니다. 버스 타는 곳에 저녁 8시 38분에 가까스로 닿아 표를 끊으려고 하니 일찌감치 끊겼다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저녁 9시에 무극(금왕읍)으로 오는 버스표를 끊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자전거 바퀴를 떼어놓고 서 있습니다. 짧은치마 차림인 아이들 다섯이 버스 앞에 서서 수다를 떱니다. 무극에 살며 도시로 나들이를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인 듯합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가 조용히 잠들어 있는 버스에서 내내 쉬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몹시 차갑게 나오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팔과 다리를 문지른 끝에 무극에 닿습니다. 무극에 닿을 때 갑작스레 아파트숲이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펼쳐집니다. 참 생뚱맞다 싶을 모습이지만, 이 깊은 시골마을에 퍽 높다란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버스 짐칸에서 자전거를 내립니다. 바퀴를 붙입니다. 불을 켜고 달립니다. 바구니와 가방에는 짐이 잔뜩이라 꽤 무거워 자전거는 천천히 나아갑니다. 밤길에는 오가는 차가 퍽 적어, 내 자전거에서 불을 끄고 달리면 참 어둡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보름달이 훤하게 떠 있어 찻길이 하나도 안 어둡습니다. 보름달 빛살에 기대어 느긋하게 달리며 가뿐 숨을 내뱉습니다. 가뿐 숨을 내뱉다가도 가만가만 숨을 멈추며 자전거 바퀴 구르는 소리 아닌 산마을에서 들려올 소리가 있는가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시골 버스역에서 내려 국도를 달리는 동안에는 별을 보지 못합니다. 드문드문 지난다고 하지만, 드문드문 지나는 자동차 등불 때문에 별을 볼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국도가 끝나고 우리 살림집으로 들어서는 시골길에 접어들어 참말 아무런 등불 없이 자전거 불조차 켜지 않고 싱싱 달릴 때에라야 별이 보입니다.
별을 봅니다. 까만 밤하늘을 촘촘히 채우고 있는 별을 올려다봅니다.
별을 올려다보며 느긋하게 땀 뻘뻘 흘리며 달립니다. 달리는 발은 느긋하지만 아무튼 땀은 뻘뻘 흘립니다. 이제 우리 집에 다 왔습니다. 아이 엄마는 부엌 쪽에 불을 켜 놓고 아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 있던 아이 엄마가 일어납니다. 오늘 하루에다가 어제 낮과 저녁을 아이랑 둘이 보내느라 고달팠을 아이 엄마 모습을 훤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며칠 앞서부터 쥐 한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와 벽을 파먹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오늘은 자고 이듬날 아침에 바지런히 읍내에 나가서 쥐끈끈이 몇 사들고 와야지요.
땀으로 범벅이 된 자전거 손잡이를 물로 헹구고 헛간에 놓습니다. 자전거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다음, 밤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집으로 들어와 옷을 모두 벗어 담가 놓고 찬물로 멱을 감습니다. 아, 우리 집에서 몸을 씻을 때가 가장 즐겁고 홀가분합니다. 이 찬물 맛이란. 이 조용한 시골집이란. 쥐야, 너도 밤에는 잘 자렴. 그리고 이듬날에는 부디 네 보금자리인 산으로 돌아가렴. 끈끈이에 붙들려 목숨을 잃지 말고 조용히 네 숲으로 돌아가렴. (4343.7.28.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