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낯선 희망들 - 끊이지 않는 분쟁, 그 현장을 가다
이유경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한국이 ‘평화’로울 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8] 이유경,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



 아이 사진을 찍으면서 아이 눈높이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하고 눈을 마주하는 가운데 사진을 찍는 동안 반드시 아이가 제 사진기 눈을 맞대고 바라볼 때에만 찍어야 할 까닭은 없다고 느낍니다.

 옆지기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이틀 마실을 다녀왔습니다. 날이 무척 더워 큰 들통에 물을 담아 아이를 씻겼습니다. 들통 뒤로는 일산 부모님이 돌보는 텃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선 채로 아빠 눈높이에서 아이 씻는 사진을 한 장 찍다가는 쭈그리고 앉아 아이 눈높이에서 아이 씻는 사진을 다시 한 장 찍습니다.

 아이하고 어울리며 놀 때에는 멀거니 선 채로 아이 손을 잡고 놀 수 없습니다. 허리를 구부리든지 쭈그리고 앉든지 땅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야 합니다. 아이하고 키높이를 맞추어야 하고, 아이와 걸음걸이를 맞추어야 하며, 아이하고 힘을 맞추어야 합니다.

 아이랑 놀다 보면 아이는 틈틈이 안아 달라며 두 팔을 활짝 펼치곤 합니다. 그저 칭얼대느라 이러할 수 있으나 다리가 아프고 힘들어 쉬고 싶기 때문이곤 합니다. 어른이라면 혼자 마땅한 자리를 찾아 털썩 앉거나 드러누울 테지만, 아이로서는 어버이 품에 안겨 쉴 때가 가장 느긋하고 좋습니다. 우리 집식구들은 아이한테 아기수레에 태울 뜻이 없이 스물석 달을 살아냈는데, 아이가 쉴 때라든지 아이가 잠들 때에 품에 안거나 등에 업고 다니자면 제법 고단하지만, 이렇게 고단한 만큼 비로소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보람이 무엇인가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기수레를 안 쓰는 까닭이라면, 우리가 아기수레를 써 온 역사란 얼마 안 되고 언제나 업거나 안고 키워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기수레를 태울 만한 판판한 길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한테는 자가용이 없고, 자가용이 없는 우리들은 늘 걸어다니며, 늘 걷고 몸을 쓰면서 살아가는 아빠랑 엄마이기에 아이 또한 걷기를 좋아해 주며 함께 다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스물석 달에 걸쳐 아이를 안고 걸리며 다니노라니 아이는 걷기뿐 아니라 뛰기를 몹시 좋아하고, 계단 타고 오르기를 아주 즐깁니다. 그예 스스로 튼튼하고 싱그럽게 자라 주는구나 싶어요.


.. 대학 시절 한국 사회에서 내가 꿈꾸는 기자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기도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시드니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머니께서는 이것저것 담아 상자 하나를 보내 주셨는데, 그 안에는 이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유경아, 공부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몸 상한다. 세상 보는 것도 다 공부니라.” … 몇 명이 죽었고, 무엇이 파괴되었고, 어디가 공격을 받았고 등의 나열식 ‘분쟁 르포’엔 정치도, 역사도, 그리고 분쟁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  (4, 18, 39쪽)


 평화로운 삶이란 평화로운 넋과 평화로운 몸과 평화로운 말로 이루어 간다고 느낍니다. 정치가 평화롭다든지 경제가 평화롭대서 내 삶이 평화롭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가 평화롭지 않더라도 우리들은 우리 삶을 한결같이 평화롭게 가꾸며 지킬 수 있다고 느껴요. 어수선한 정치일 때라도 봄이 되면 봄꽃이 맑게 피고, 어지러운 경제일 때라도 여름이 되면 여름꽃이 환하게 피며, 어리석은 사회일 때라도 가을이 되면 가을꽃이 곱게 핍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봄꽃을 닮도록 가꾸고 여름꽃을 받아들이도록 일구며 가을꽃을 곰삭이도록 돌볼 때에 참다운 평화이지 않느냐 싶어요.


.. 나는 ‘인생 선배’라는 이름으로 존중을 강요하는 어르신들의 나이 따지기 병을 아주 질색한다. 그 존중이라는 건 나이, 성별, 인종, 국적, 피부색을 불문하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서로 주고받아야 할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작가 R씨의 인도기행문에 자극받아 인도를 찾았다고 했다. 성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품고 온 그들에게 나는 카스트와 폭력, 힌두 극우주의와 점령 따위의 아주 낯선 이야기들을 녹음기처럼 풀어대며 초를 쳤다. 의도한 건 정말 아니었다 ..  (21, 100쪽)


 국제분쟁 전문기자라고 일컫는 이유경 님이 쓴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온누리 구석구석 싸움이 일지 않는 곳이 없다 보니까 이유경 님과 같은 ‘국제분쟁을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가 태어납니다. 국제분쟁만을 다루는 글과 사진이 넘치도록 많으며, 우리들은 수많은 국제분쟁이 얼마나 자주 많이 터지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아파하는가를 알 길이 없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어슷비슷하다고 여길 만’한 국제분쟁이 많아서 웬만큼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 않고서는 이야기거리조차 안 되고 나라안 새소식에 안 실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재벌회사 사장님이 돌아가시든 골목동네 가난한 할머니가 돌아가시든 같은 목숨값입니다. 대통령 한 분이 돌아가시든 농사짓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든 매한가지 목숨결입니다. 국제분쟁이라 할 때에도 우리한테 익숙한 나라에서 벌어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야 널리 알아줄 만한 다툼이나 싸움이 아닙니다. 왜 온누리 나라들마다 싸움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가를 꿰뚫으면서, 온누리 나라들이 저마다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울 삶을 나누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걸림돌을 찾아야 하는 국제분쟁 기자들입니다.


.. 버마는 내가 알고 있던 대로 ‘민주 대 반민주’같은 단순한 모순만 지닌 게 아니었다. 버마의 소수민족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부터 50여 년 동안 타이-버마 국경이 접한 밀림에서 자치와 독립 무장투쟁을 벌여 왔고 이런 ‘민족해방 진영’은 반독재투쟁을 벌이는 다수 버마 족 중심의 ‘민주주의 진영’과 또다른 갈등과 모순 관계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두 진영 모두 군부독재를 반대하며 싸우고는 있지만, 그들 내부에서 ‘다수인종 대 소수인종’이라는 갈등의 골을 겪고 있는 셈이다 … 인도에서는 달리트와 하층 카스트, 무슬림, 여성 등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폭력, 고문, 그리고 심지어 살해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이 모든 폭력이 대국 인도의 천태만상 속에 도드라지지 않을 뿐이다 … 인도 ‘본토’에서도 하층 카스트와 소외 계층이 민주주의와 정의를 만날 겨를은 별로 없는 판에 점령 지역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점령지 카슈미르에서 민주주의는 세월 좋은 양반네들이나 부리는 멋있는 ‘구라’였고, 일반 주민들이 당하는 일상적 모욕과 위협과 폭력은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36∼37, 173, 331쪽)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이라는 책에는 이 나라 신문과 방송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이야기가 새록새록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처음 나온 2007년과 오늘 2010년을 견주어 헤아린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그리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 숫자하고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권력을 쥔 이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내리누르거나 들볶습니다. 더 큰 권력을 바라고 더 힘센 총칼을 거머쥐려 합니다. 커다란 권력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이 큰 힘으로 더 너른 사랑과 믿음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총을 녹여 호미를 만들고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고자 하는 권력자나 군인이란 없습니다. 총을 만들 돈과 품과 땀으로 우리 삶터를 아름다이 일구거나 칼을 만들 돈과 품과 땀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려 하는 권력자나 군인이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우리 나라에서 군인 1만을 줄이거나 군 간부 1천을 줄이기만 하여도 온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한테 ‘무상급식’을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군인 1만을 더 줄이거나 군 간부 1천을 더 줄인다면 온 나라 대학교에서 ‘무상교육’을 할 수 있겠지요. 군인 1만을 더 줄이거나 군 간부 1천을 더 줄인다면 온 나라 가난한 사람들 살림살이를 뒷배할 ‘무상복지’를 이룰 수 있겠지요.


.. 다카도 그랬지만 또다른 일본 여기자 기요코 오구도 내 머리를 쳤다. 《카트만두의 봄 : 1990 저항운동》의 저자인 그녀를 카트만두 기자회견장에서 주의 깊게 바라본 적이 있다. 네팔어로 질문하고 알아듣는 유일한 외신기자였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에서건 보통 영어로 큰 어려움 없이 대부분의 취재가 이루어졌지만, 현지어를 그렇게 구사하는 수준이라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굵고 깊은 취재를 할 수 있는 천상의 조건이다 ..  (273쪽)


 국제분쟁을 전문으로 다루고자 발로 뛰고 눈물과 웃음으로 글을 쓰는 이유경 님은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이라는 책을 빌어 우리들한테 나즈막이 속삭입니다. “나는 또 기대한다. 한국 혹은 한국인이 꼭 연루되지 않은 분쟁이나 재난이라도 그 비명 소리가 절박하다면 귀 기울여 들어 주고 받아 적을 줄 아는 그런 통 큰 언론을. ‘한국인 피해는 없는 것으로……’라고 끝나는 뉴스는 늘  ‘그 다음 뉴스는 없는 것으로……’라고 끝내는 그런 언론 말고(391쪽).” 이러한 속삭임은 내 밥그릇과 얽힌 일에서만 내 이웃과 동무를 생각하는 우리 삶이 아니라, 내 밥그릇하고 얽히지 않은 내 이웃과 동무 일에도 온 사랑을 쏟을 수 있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라면 내 이웃 누구나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애쓰려는 마음이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나 스스로 평화를 누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라면 내 동무 누구나 서로 미워하거나 괴롭히지 않으며 어깨동무하고 손을 맞잡으려는 마음이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나 스스로 내 눈높이에만 머물지 않고 내 이웃과 동무 눈높이가 되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로서는 아이 눈높이로서 아이하고 부둥켜안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는 아이들 눈높이로서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살가운 배움터를 이루고픈 속삭임입니다.


.. 내가 변했는지 서울이 변했는지 아니면 서울이 원래 그런 녀석인 걸 내가 잠시 까먹었던 건지. 아무튼 서울은 ‘물질이 충만’한 도시의 거드름을 과하게 뽐내며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 거드름에 대한 거부감은 2주 만에 서둘러 서울을 떠나는 나의 발걸음을 위로해 주었다. 교보문고 10대 서적 코너에 깔린 ‘서울대와 하버드대로 가는 길’을 뒤로 하고 다시 방콕으로 갔다 ..  (72쪽)


 희망이란 낯선 생각이 아니나, 오늘 이 땅에서는 더없이 낯선 생각이기 일쑤입니다. 희망이란 찾아볼 길이 없이 돈만이 넘치는 오늘날 우리 터전입니다. 이리하여 더더욱 낯선 희망을 바랄밖에 없고, 희망이야말로 낯설지 않은 우리 삶이 되기를 바랄밖에 없습니다. 끊이지 않는 분쟁이란 서로서로 평화를 찾자는 몸부림일까요? 끊이지 않는 분쟁이란 기득권과 권력자가 더 큰 밥그릇을 움켜쥐려고 일부러 평화를 짓밟거나 짓누르는 소용돌이일까요? (4343.6.7.달.ㅎㄲㅅㄱ)


 ┌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인물과사상사,2007)
 ├ 글ㆍ사진 : 이유경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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