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 -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여자 이야기
안미선 지음, 장차현실 그림 / 철수와영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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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31 ― 처녀 총각일 때에 ‘애 엄마 삶’을 읽어야
 : 안미선, 《내 날개옷은 어디 갔지?》



- 책이름 : 내 날개옷은 어디 갔지?
- 글 : 안미선
- 그림 : 장차현실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09.3.14.)
- 책값 : 12000원



 (1) 여자와 남자 모두 살림꾼이 되어야


 방과 마루를 뻔질나게 오가면서 온 서랍을 다 뒤지고 갖은 물건을 모조리 뒤집어엎으며 쏟아놓는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덥석 안습니다. 아기는 까르르 웃고 눈을 빛냅니다. 왜 이제까지 나 혼자 놀도록 내버려 두었느냐는 눈빛입니다. 아기를 왼팔과 오른팔로 번갈아 안으며 이리 어르고 저리 어르니 또다시 까르르 웃습니다. 엄마가 뒷간에 가도 울고불고 하는 아기는 엄마이든 아빠이든 저하고 하루 내내 붙어 있어야 한다고 보챕니다. 아니, 아기로서 살아남자면 마땅한 몸부림이라 할 테고, 아기로서는 이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혼자놀기’를 잘한다는 어른이라 할지라도 동무나 이웃이 없으면 입에 거미줄을 칩니다. 입에 거미줄을 치면 입에서 차츰 구린 냄새가 납니다. 가끔이나마 입을 열어 이야기를 나누어야 거미줄이 걷히고 냄새가 사라집니다. 사람이기에 사람 사이에서 살면서 사람 내음을 가꾸고 사람다움을 일굽니다. 그러니까, 어른들도 혼자서는 심심하고 힘든 삶입니다. 아이들이라면 혼자서 훨씬 심심할 테며 더욱 힘들 테지요. 그러니까, 어버이 된 몸으로서 아이들을 홀로 집에 둘 수 없으며, 아기라 한다면 더더욱 함께 지내야 합니다.

 노자키 후미코 님이 그린 만화 《신이 주신 선물》(서울문화사) 7권(2001)을 보면, “걔네한테 친아빠에 대한 기억은 없겠지? 걔네들한텐 아빠가 꼭 필요해. 피가 섞이고 안 섞이곤 중요하지 않아. 부부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 애들은 문제 없어. 부자 간에 사소한 싸움이 있더라도 말야(17∼18쪽).”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 나옵니다. 엄마 홀로 키우던 아이들을 보고 하는 말인데, 이 아이들한테 아빠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거꾸로 놓고 보아도 매한가지입니다. 아빠 홀로 키우는 아이들한테도 엄마가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엄마 혼자서 낳거나 아빠 홀로 낳을 수 없으니까요. 아이는 엄마 혼자서 돌보거나 아빠 홀로 돌볼 수 없으니까요. 함께 돌보는 아이입니다. 서로 힘을 모아 키우는 아이입니다. 엄마가 도맡는다든지, 엄마가 더 오래 돌봐야 한다든지 한다면 서로서로 고단합니다. 아이한테도 좋을 수 없습니다. 아이는 엄마 사랑과 아빠 사랑을 골고루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터전을 돌아볼 때에, 오늘날 우리 아이들 가운데 엄마 사랑과 아빠 사랑을 골고루 받는 아이들을 만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으레 아빠 된 쪽이 회사로 일하러 나가면서 돈을 벌어들입니다. 흔히 엄마 된 쪽이 아침부터 밤까지 집에서 아이하고 씨름하면서 갖은 집안일을 합니다. 아빠는 아빠대로 집안일과 집살림과 아이키우기하고 동떨어집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이웃과 사회와 마을 이야기를 비롯한 바깥일하고 동떨어집니다. 아빠는 아빠대로 한편만 바라보는 바보가 되고, 엄마는 엄마대로 한쪽만 들여다보는 바보가 됩니다. 엄마와 아빠가 다 함께 집안일과 집밖일을 하면서 아이키우기를 손잡고 하지 않는다면, 두 어버이는 모두 외곬 눈길로 치닫는 바보로 머물고야 맙니다.

 제 둘레 남자 동무들은 하나같이 집밖에서 돈벌이를 하면서 아이는 저녁이나 밤, 또는 주말에나 얼굴을 겨우 본다고 할 만합니다. 제 둘레 여자 동무들은 한결같이 집안에서 아이하고 복닦이면서 세상일은 거의 젬병으로 지낸다 할 만합니다. 때때로 보육원에 아기를 맡기거나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겨 놓으며 바깥일을 한다지만, 남자들이 바깥일을 하는 모습과 견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경자 님이 쓴 소설을 모은 《오늘도 나는 이혼을 꿈꾼다》(작가정신,1992)를 읽으면 첫 작품부터 사람들 뒷통수를 퍽 하고 후려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날 남편은 밖에서 무슨 얘길 들었는지 느닷없이, 남성은 인류의 절반이다, 그러니까 하늘의 절반도 남성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너무도 뚱딴지 같은 소리더라구요. 그래서 용건이 뭐냐고 했더니, 우리 아이에 대한 친권행사를 동등하게 하자는 겁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씨를 받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합작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순간, 저는 불같이 화가 뻗쳤습니다. 아니 그래, 그까짓 정자 한 개와 난자, 자궁, 진통, 수유 등등을 어떻게 견줄 수 있다는 겁니까(17쪽)!” 〈옛날 옛날 한옛날에〉라는 이름이 붙은 짧은소설 한 토막입니다. 오늘 우리 삶터와 견주면 아주 거꾸로라 할 이야기인데, 참말로 오늘 우리 삶터에서 남자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놓고 읽힐 글이라 하겠습니다. 1990년대 첫무렵에만 이런 이야기를 할 만한 우리 터전이 아니라, 2010년이 되고 2020년을 바라보고 있어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우리 터전이라 하겠습니다.

 옆지기 부모님 댁에 찾아가 텔레비전 앞에 나란히 앉아서 장모님이 즐기는 연속극을 함께 보고 있자면, ‘잘나고 똑똑하고 많이 배운 돈까지 많은 여성’들이 부잣집(이건 가난한 집이건) 며느리로 들어가 한다는 일이란 앞치마를 두르고 밥하기입니다. 아이 낳아 하루 내내 애보기입니다. 부잣집 며느리라면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집을 도맡기면 되련만, 부잣집 며느리 가운데 집일을 도맡기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속극에 나오는 모든 남자들은 하나같이 바깥일만 하지 집일은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집일을 하나도 모릅니다. 아니, 젊은 남자나 여자는 한결같이 집일을 모르며 알려 하지 않고 배우지 않을 뿐더러 누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집일을 하는 사람은 나이든 여자뿐입니다. 나이든 남자는 ‘아주 마땅하다는 듯이’ ‘나이를 먹었으니 집일을 굳이 더 안 배우’고, ‘나이를 먹었기에 아내가 집일을 도맡을 뿐 아니라 남편을 섬겨야 한다’는 듯한 모양새입니다. 1990년대 연속극이든 2000년대 연속극이든 2010년대 연속극이든 배우와 소재만 살짝 다르지 줄거리와 짜임새와 이야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랴 싶습니다.

 우오토 오사무 님이 그린 만화 《현미 선생의 도시락》(대원씨아이) 2권(2010)을 보면, “요즘 학생들은 양상추와 양배추도 구분 못하고, 토막난 상태가 아니면 무슨 생선인지도 몰라요. 무서워서 두부를 손바닥 위에 놓고 썰지도 못하죠! 거의 다 그래요! 애들은 학원 가느라 시간 없고, 부모는 부모대로 야근이니 뭐니 해서 늘 바쁘죠. 그러다 보니 애들한테 요리를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가 많아요. 애들도 자연히 요리에 대해서 배우지 못하고요. 어른이 된다고 해서 자연히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대학생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대학생들은 피해자니까요(179쪽).”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굳이 만화책 이야기를 빌지 않더라도, 오늘날 어린이나 푸름이나 젊은이 누구 하나를 붙잡고 물어 보아도 ‘밥하기’와 ‘반찬하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칼질하기를 옳게 할 줄 안다든지 설거지를 바르게 할 줄 안다든지 빨래를 알맞게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어른을 놓고 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집안일을 기계가 도맡아 주지 않느냐고 할는지 모르는데, 따지고 보면 집밖일도 매한가지입니다. 갖가지 셈틀과 기계가 바깥일을 도맡아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셈틀이 있고 기계가 있어도 이러한 셈틀과 기계를 다루는 ‘사람을 써야’ 합니다. 집에서도 그래요. 온갖 집안 살림기계가 있다 하더라도 이 기계를 다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집안살림이든 집밖살림이든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 터전에서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매무새를 익히는 사람 일을 제대로 안 가르칠 뿐 아니라 못 가르칩니다. 제대로 안 배울 뿐 아니라 못 배웁니다. 지식인은 많아도 살림꾼은 없습니다. 아니, 지식인은 세상에 떵떵거리면서 펜데를 굴려 일을 하여도 살림꾼 목소리는 어디에도 실릴 자리가 없습니다. 신문과 잡지와 책과 인터넷에서는 오로지 ‘살림을 안 하거나 살림을 모르는 사람이 살림하고 동떨어진 이야기’만 다룹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사랑놀이를 즐기며 아이를 배고 낳을 때에, 아이키우기가 어떠한 일인가를 옳게 가르쳐 주는 적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에 아이키우기를 일러 주지 않습니다. 여자한테든 남자한테든 똑같이 가르칠 아이키우기이지만, 이를 살갗으로 올바로 깨달으면서 아이들한테 가르칠 어른이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습니다. 학교에서도 알뜰히 못하지만 집에서도 알뜰살뜰 못합니다.


 (2) 《내 날개옷은 어디 있지?》라는 책 하나


 “회사 일이라는 게 돈으로 환산될 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67쪽).”고 말하는 《내 날개옷은 어디 있지?》를 쓴 안미선 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억압하지 않고 자기가 정말 겪은 일과 느낌을 솔직히 쓴다면 엄청나게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질 것이다. 텔레비전에도 신문에도 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 말이다. 서로 사는 모습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의 모른다(6쪽).”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합니다. 대학교를 마친 뒤 책마을에서 일을 했고,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며 학교와 쉼터에서 성교육을 하기도 했던 안미선 님인데, 안미선 님 스스로 ‘직장여성’일 때하고 ‘애 엄마’일 때하고는 사뭇 달랐겠지요. 직장여성일 때에는 생각하지 못한 애 엄마 삶이었겠지요.

 저는 직장남성이라는 길을 걷기는 했지만,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몸이 된 뒤부터는 거의 집에서 식구들 돌보는 길을 걷습니다. 밥벌이와 옆지기 돌보기와 아이키우기를 한꺼번에 해야 하면서 지칠 뿐 아니라 고되기까지 하지만, 밥벌이 때문에 집밖으로 나가서 바깥바람을 쐬거나 바깥사람을 만나거나 홀로 책방마실을 하거나 사진찍기를 할 때에는 ‘혼자 모든 일을 다 하는 삶이란 이렇게 홀가분하구나’ 하고 느끼면서 ‘혼자 이 좋은 삶을 다 누리니 참 미안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옆지기 혼자서 아기하고 씨름하며 복닥일 모습을 그리면서 ‘더없이 힘들겠지’ 하고 느낍니다.

 예전에는 몇 가지 책을 넘기면서 ‘애 엄마 삶’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책에 담긴 지식으로 읽을 뿐, 애 엄마 삶이란 어디 머나먼 곳에 있는 엄마들 삶이 아닌 바로 ‘나를 낳아 키운 어머니 삶’이기도 함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 스스로 애 아빠 삶을, 아니 어버이 삶을 걸으면서 ‘애 엄마 삶’이란 무엇인지 조용히 헤아립니다. ‘아이키우기를 하는 삶’이란 어떠한가를 곰곰이 곱씹습니다. ‘아이와 함께 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어머니 삶을 돌아보고 옆지기 어머님 삶을 함께 톺아봅니다.

 안미선 님은 《내 날개옷은 어디 있지?》 끄트머리에서 당신과 마찬가지로 ‘한국땅에서 직장여성으로 살거나 애 엄마로 살거나 직장여성이면서 애 엄마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짤막짤막 옮겨적습니다. 대학교에서 청소용역을 한다는 아주머니는 “이 학교가 부자라고 하더라구요. 건물도 계속 짓고. 그런데 직영으로 하지도 않고 어떻게든 싸게 부릴 생각만 해요. 우리도 사람인데. 선생들은 고생을 안 해 봐서 청소를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250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안미선 님은 청소 아줌마 목소리를 빌어 이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만, 안미선 님이 강단에 서서 강사가 되고 조교수가 되고 부교수가 되고 정교수가 되고 했다면, 이 청소 아줌마 말마따나 ‘고생을 안 해 봐서 청소를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는 또 한 사람이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제 안미선 님은 ‘고생을 해 보’고 ‘청소를 어떻게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또한, 더없이 마땅하게도 ‘고생을 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담아내는 한편, ‘청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들 목소리’를 펼쳐 보입니다. 이 목소리를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들어 줄는지 모르지만. 이 나라 남자와 여자가 스스로 사람다운 길을 걸어가는 자리에서 얼마나 이 목소리를 귀담아들을는지 모르지만.


 (3) 한 줄 한 줄 되씹기


 책을 덮습니다. 옆지기가 이 책을 넌지시 들추면서 한 마디를 합니다. 이 책을 쓴 분은 스스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생각을 달리 하고 있지만, 이분 스스로 이제까지 이 책에 쓴 아쉬움과 한숨과 눈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배운 적이 없었다고.

 틀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숱한 사람들은 저처럼, 또 안미선 님처럼, 아니 모두들 다르게 혼인도 하고 아이도 낳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삶을 슬기롭게 배운 적이 없을 뿐더러, 나중에 잔뜩 짊어져야 하는 굴레를 깊이 돌아볼 겨를을 내지 못합니다. 몸과 마음 모두 느껴도 스스로 달라지면서 내 둘레 터전이 달라지도록 힘을 쓰지 못합니다. 너무 힘든 나머지 고꾸라지거나 쓰러지기도 하고, 울타리가 너무 높고 단단하기 때문에 주저앉기도 합니다. 여자들은 애써 이런 책을 써내고 돌려읽기도 하지만, 정작 남자들은 이런 책을 찾아 읽지 않고 다루지 않으며 가슴으로 새기지 못합니다. 하다 못해 책으로라도 이 같은 지식을 받아먹으려 하지 못합니다.

 책은 못 읽어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책조차 못 읽는 우리들 삶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바쁠까요.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바쁘도록 하나요. 무엇이 쫓겨 이다지도 바쁜 채 허덕이나요.

 누구보다 저부터 바빠맞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한 줄 두 줄 되씹어 봅니다. 나부터 우리 아이와 옆지기한테 좀더 마음을 쓰고 따숩게 얼싸안는 삶이 되도록 하면서 방긋방긋 웃자고 다짐하면서 석 줄 넉 줄 되읽어 봅니다. 세상 남자들이, 아니 한국 남자들이 ‘남자 날개옷’만 멋스럽게 붙잡지 말고 ‘여자 날개옷’을 나란히 챙기면서 ‘사람 날개옷’을 곱게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하면서 다섯 줄 여섯 줄 천천히 거듭 읽습니다. (4343.1.18.달.ㅎㄲㅅㄱ)


[17, 58쪽] 외국에서 아기를 낳은 친구들 얘기를 들어 보면, 임신해서 한 번만 초음파를 찍고 그 이상은 불필요하다고 의사가 말린다던데, 아기 낳는 모양새도 그 나라 습성을 따르는 게다. 조산소에서 가족과 함께 낳으면 가장 좋다는 말도 들었지만 수혈 문제 때문에 종합병원에서 낳게 되었다. 임신 내내 지금까지 줄곧 ‘위험할 수 있어요, 위험해요’ 하고 협박만 들은 것 같다 … 애가 아플 거라는 소리가 협박처럼 들렸다. 우는 애를 안고 일어서자 의사가 “문제는, 돈이야!” 하고 외친다. 뒤돌아서는데 속에서 뜨거운 게 치민다. 개새끼. 지가 의사면 의사지, 뭘 안다고 능글능글 반말로 씨부렁거리냐. 지가 젖 먹여 애 길러 봤어? 지가 애 땜에 뜬눈으로 간호해 봤어?

[27, 32, 37∼38쪽] 나도 할 말이 있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뛰어가고 엎어지고 엎지르고 박아대는 아기와 씨름하느라고 정신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 먹고논다니,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 정말 내가 안 움직이면 우리 집은 금세 엉망이 되어 버린다. ‘집은 쉼이다’면서 남자가 느긋하게 깍지를 끼고 누워 있는 광고도 있지만, 주부에게 그것은 그림의 개떡 같은 소리다. 집은 일터다. 집 밖에 나가야 한숨 돌릴까. 집은 곳곳을 치워 달라고 손봐 달라고 소리 없이 외쳐댄다 … “회사에서 아프면 사장한테 요구하지. 아니, 사장한테 도장 맞고 공단에 요구하지. 그런데 아기 보고 살림하다 아프면 누구한테 말해야 하지?” … 집에 있는 여자들과, 집안일을 더해 밖에서도 일해야 하는 많은 여자들이 아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플 거라고 여기지 않고 일한다고 여기지 않고 그것이 사회에서 보장해 주어야 할 몫이라고는 더더군다나 생각하지 않는다.

[34, 158쪽] 나도 애를 봐주는 할머니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가, 종일 업고 복도를 왔다갔다 하는 할머니를 보니 힘든 건 다 똑같은데 같은 여자한테 떠넘기지 말아야겠다 싶기도 하다 … 남편이 주말에 쉰다는 것이 어떤 아내들에게는 부러울 뿐이다.

[42, 83∼84, 198∼198쪽] 결혼한 친구들은 각각 자기 집에 틀어박혀 혼자서 가족감당을 하느라 여념이 없고, 결혼 안 한 친구들은 여행이며 연애를 꿈꾸는데 이건 나와 딴판의 이야기였다 … 어른들이 도시의 갇힌 공간에서 쇼핑으로 술자리로 기분전환하듯, 아이들은 한 시간에 얼마 하는 인위적인 실내 놀이 공간에서 좋다고 뛰논다 … 사고 쓰고 버리는 것이 어른들의 생활이듯, 아이들의 시간도 놀이도 그렇다 … ‘살림이며 육아를 알아서 할 사람이 있겠지’ 하며 나 몰라라 하는 그이의 직장, 남편이 잠잘 시간만 빼고 그의 노동력을 오롯이 써먹는 직장에 대해서 화가 난다. 아이를 같이 낳고 기르는 것은 남편과 나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직장에 다니니 평등가족이 될 수 없다고 남편은 먼저 푸념했다.

[48, 101, 108, 121, 136쪽] 남자에게 콘돔을 쓰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 그때 나는 우리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면접자리에서 희롱을 당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책이 나온 날짜를 물끄러미 본다. 이 책이 나올 무렵 나는 깁스를 하고 빈방에 종일 앉아 있었다. 판권에는 사장 이름만 나와 있어, 만든 이들을 잊어버린 책이다 … 우리 시대의 고통바든 남편은 요컨대 자신도 집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본 바도 배운 바도 없거니와, 돈을 벌러 회사에서 갖은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는 피해의식과 ‘가장’이라는 한줌 자부심으로 모든 집안일에서 면제받길 바란다 … (쉼터에 있는) 이 아이들은 특별히 문제 있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피임을 배우지 못하고, 남자 애들이 사랑해 주면 좋긴 한데 제 몸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모르는 이 나라 여자 아이들은 누구나 이 자리에 올 수 있다.

[90, 92, 96쪽] 나는 애가 공부 잘한다고 싱글벙글인 부모에게 아이의 지치고 고단한 얼굴을 보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공부하는 건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를 두려워해서가 아닐까 혼자 생각도 해 보았다 … 뒤늦게 안 것이다. 십대의 행복은 십대에만 있을 뿐이다. 그때 읽고 싶은 책은 그때에 읽어야 즐겁고, 그때 하고 싶은 일은 그때에만 깔깔거리며 할 수 있다. 어른들은 정말 나의 행복을 바란 것이었을까 … 우리가 배우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일과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을 통해서 얻는 것이지, 학교나 입시교육 안에서가 아닌 것이다.

[91, 94쪽] 모두들 서울에 오고 싶어했다. 서울에 가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돈도 잘 벌고, 행복해질 거라고 여겼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 또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따랐다 … 공부 못하면 여기에서 못 떠난다고 협박당하던 그 친구들이 고향에 남아 든든한 이웃이 되어 거기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또 농사를 짓고 일을 찾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스스럼없이 사투리를 쓰며 덩굴 뻗어 살아간다.

[141∼142, 187쪽] 남자 아이들에게 성은 자위를 몇 번 하니, 포르노에서 여자가 어떻게 나오니 정보를 공유하며 과시하는 놀이가 되지만, 여자 아이들은 월경과 함께 임신할 수 있는 몸, 성폭력을 당할지 모르는 몸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때부터 세상에 대한 공포를 잠재화하게 된다 … 문제는, 이렇게 딴판으로 성에 대해 생각하는 이성들이, 상대가 바라는 걸 알지도 배워 보지도 혹은 믿지도 못하는 이성들이 만날 때 일어나는 문제다 … 여성에게 위험한 것은 밤길뿐만이 아니다. 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낯선 사람, 낯선 장소에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여성이 조신하지 않아서 섹시해서 무례해서 폭력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3, 209, 214쪽] 행복하고 깔끔한 가정과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종일 노동하는 사람은 여성이다. 특히 결혼과 동시에 여성은 가족 안에 고립되어 재산권이나 노동권, 재교육이나 사회적 지지 소통망 같은 자원에서 배제된 채 가족의 재생산과 보살핌을 위해 아무 대가 없이 일해야 한다. 이러한 낮은 지위와 처우는 가족주의와 성별분업을 기반으로 한 사회 속에서 구조화되어 있다. 교육을 받건 받지 않건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 성노동이 노동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이 너무 제한적이고 보잘것없기 때문에, 일 자체가 성별화되고 불안하기 때문에 자주 노동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매매의 시장으로 간다 … 문학이나 대중문화가 근대의 산물인 것처럼, 작가도 초연한 존재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특정한 성으로 태어나 그에 따르는 시선을 학습한 사람이다. 그래서 여자에게 불평등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회에서 성장한 작가는 성찰하지 않는 한 그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현실에서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없거나 폭력에 가까운 묘사도 향수나 그리움, 애틋한 사랑의 이름으로 그려 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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