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빛
강운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사진쟁이 한길을 걸으며 하고 싶던 말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1] 강운구, 《시간의 빛》



- 책이름 : 시간의 빛
- 글ㆍ사진 : 강운구
- 펴낸곳 : 문학동네 (2004.1.5.)
- 책값 : 18000원


 (1) 삶에 따라 하는 말, 삶에 따라 찍는 사진


 내가 좋다고 느끼는 사람하고 함께 있는 동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이 따뜻하고 깊습니다. 그러면서 내 둘레 터전과 이웃을 바라보는 눈길 또한 따뜻하며 깊습니다.

 내가 달갑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하고 어울리는 동안에는 내가 달갑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과 마주하는 눈길이 차갑고 얕습니다. 그러면서 내 언저리 삶자리와 동무를 마주하는 눈길 또한 차갑고 얕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연이나 땅이나 목숨붙이하고 있다면, 내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내가 좋아하는 느낌을 고이 담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나 좋은 길을 걷습니다. 창작이란,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알맞고 걸맞고 들어맞는 길을 걷는 놀이입니다. 느끼는 대로 바라보고, 바라보는 대로 살며, 살아가는 대로 펼쳐 보입니다. 높음이나 낮음이 따로 없는 창작이요, 훌륭함이나 못남 또한 따로 나눌 수 없는 창작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창작이 아닌 생산을 하곤 합니다. 생산이란 내가 먹고살아야 한다는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쓰면서 공장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른바 ‘프로’로서 ‘취업’을 하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주문하는 사람 입맛에 맞추어 척척 찍어내는 기계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내 결에 따라서 내 넋을 담는 창작이 아닌, 다른 사람 눈썰미에 따라서 다른 사람 쓸모에 맞추는 공산품을 일구면서 내 주머니를 채우고 내 이름값을 높이며 내 힘을 키운다고 할까요.

 공산품을 생산하는 프로가 된다 하더라도, 즐겁고 신나게 작품을 일굴 수 없지는 않습니다. 마음가짐을 어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공산품 뽑아내는 직업인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아름답고 싱그럽게 작품을 가꿀 수 없지는 않습니다. 몸가짐을 어떻게 추스르느냐에 따라 바뀌니까요. 그런데, 이 나라에서 프로 작가라는 이름을 내거는 분들 가운데 즐거움과 아름다움이라는 길을 걷는 분을 만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스스로 이름값을 내려놓는 분이라든지, 스스로 주머니를 털털 털어놓는 분이라든지, 스스로 힘을 버리는 분이라든지, 그러니까 낮은자리로 스스럼없이 내려서면서 고개를 숙이는 어른을 찾아보기가 참 힘듭니다.


.. 잠깐 눈이라도 쉬어 갈 수 있는 편한 풍경들을 보여주고 싶다. 그 풍경을 넘어서 뭔가를 느끼게 할 수 있는 것도 어쩌다 끼어 있다면 기쁘겠다 ..  (8쪽)


 저는 날마다 ‘우리 말 이야기’를 쓰면서 언제나 한결같은 이야기를 넌지시 담는다며 발버둥을 칩니다. 말은 삶이요 삶은 말이라는 이야기를 늘 글 한켠에 살포시 적바림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말과 삶과 넋은 늘 한동아리가 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 말과 삶과 넋을 다 함께 가누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 하루하루가 기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노상 글 한구석에 조용히 끄적거리려고 용을 씁니다. 저로서는 말과 넋과 삶이지만, 이를 조금 달리하면 글쓰기와 넋과 삶이 되고, 사진찍기와 넋과 삶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 사진쟁이한테는 사진쟁이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어떤 삶을 꾸리는가에 따라 그이 사진이 달라집니다. 그림쟁이한테는 그림쟁이 스스로 어떤 마음을 품으면서 어떤 삶을 보내는가에 따라 그이 그림이 달라집니다. 만화쟁이도 그렇습니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법을 다루든 공무원으로 있든 고기잡이이든 농사꾼이든 그렇습니다. 누구나 제가 발딛고 있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대로 생각을 가꾸고 말을 합니다. 발딛고 있는 터전에 따라 일하는 매무새가 다릅니다. 발딛고 있는 터전에 따라 창작이든 생산이든 하면서 제 깜냥껏 작품을 내놓습니다. 이리하여, 더 높거나 낮은 작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가슴을 움직일 만한 작품이냐 아니냐로 가를 수 있습니다. 눈물을 샘솟게 하는 작품이냐, 웃음이 피어나도록 하는 작품이냐, 이렇게 두 가지로만 작품을 바라봅니다.


.. 사람들은 불 밝힌 빌딩에서 밤을 새우며 야근하고, 재벌 총수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고층빌딩을 자랑한다 … 기름값이 치솟자 연탄으로 돌아간 집들이 다시 생겼다. 그래서 연탄재가 여기저기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들판이나 골목길에 쌓인 연탄재 무더기들은 꼭 설치미술 같아 보인다 ..  (229, 238쪽)


 어제와 그제 서울마실을 하면서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습니다. 추운 날씨라서 두 손은 겉옷 주머니에 쑤셔넣고, 쑤셔넣은 손으로 사진기를 붙잡고 다닙니다. 동네 구멍가게를 찾아갈 때에도 사진기는 목걸이처럼 걸고 다닙니다. 따로 사진찍을 일이 없어도 제 한쪽 손은 사진기를 움켜쥡니다. 여느 날씨에는 손이 시리지 않으니, 서울길을 거닐 때에 책을 읽습니다. 서울에서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저로서는 눈을 둘 만한 데가 없고 바라볼 만한 곳이 없다고 느끼며 책을 읽습니다. 애써 목걸이처럼 사진기를 달고 다니면서 사진 한 장 찍을 일이 없습니다. 그저, 헌책방에 찾아가 책시렁을 둘러볼 때에만 사진을 찍습니다. 한 장 두 장 아끼면서 찍습니다. 필름사진을 찍을 때에도 한 장씩 아끼면서 찍습니다. 그렇다고 한 자리에 오래도록 서서 빛이며 틀이며 느낌이며 다 맞추면서 찍지 않습니다. 내 몸뚱이가 내 사진감인 헌책방에서 ‘헌책방과 내 몸마음이 하나되도록 살아내’면서 시나브로 사진 한 장을 찍습니다. 숨을 멎고 1/15초나 1/20초로 찍습니다. 예전에는 1/4초나 1/8초로도 곧잘 찍었는데, 이제는 손떨림을 줄이고자 1/15초로 늘렸습니다. 때로는 1/30초로도 찍지만, 제 헌책방 사진은 거의 모두 1/15초나 1/20초입니다. 저로서는 마땅하게도 세발이를 받치지 않고 이렇게 찍습니다.

 골목마실을 할 때에도 으레 1/20초나 1/30초에 머물고 셔터빠르기를 더 넘기지 않습니다. 요사이에는 1/30초나 1/40초쯤으로 맞추곤 합니다. 헌책방마실은 책을 찾아 읽으면서 손이 쉬지만, 골목마실은 여러 시간을 쉴새없이 사진기를 쥔 채로 돌아다니다 보니 손이 쉴 겨를이 없어 손떨림이 꼭 나타나더군요. 1/20초로 찍을 때에는 아깝게 버려야 하는 사진이 반드시 나옵니다.

 골목마실 사진은 모두 디지털사진으로만 찍습니다. 골목마실 사진을 필름사진으로 하고 싶은 꿈이 있지만, 이러다가는 필름값을 짐질 수 없어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골목마실 사진을 필름으로 담을 때에는 여느 35밀리 사진이 아닌 105밀리 중형 가운데 파노라마사진기로 담고 싶습니다. 파노라마 중형사진기 필름사진이 아니라면 골목마실 사진을 따로 필름으로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디지털사진으로 거의 날마다 200장쯤 골목 사진을 빚어 놓으면서 저로서는 ‘사진을 무척 적게 찍는다’고 느낍니다. 숫자로 치면 200장이 많다고 여길 수 있지만, 저는 이 동네 저 동네 이 집 저 집 골골샅샅 누비면서 담으니까 조금도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한 집 한 가지 모습에 꼭 한 장만 딱 한 번 찍습니다. 손떨림을 느끼면 다시 찍지만, 이런 일은 드뭅니다. 필름사진을 할 때에만 ‘한 장 찍으면 돈이 얼마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디지털사진을 할 때에도 ‘군더더기로 더 찍으면 군더더기 사진을 파일로 만지느라 내 아까운 품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품값도 돈입니다. 시간도 돈입니다. 그러나, 돈을 잃는다는 생각 때문에 아껴 찍지 않습니다. 시간을 버린다는 느낌 때문에 잘 가누면서 찍으려 하지 않습니다. 돈과 시간보다 훨씬 마음을 쓸 대목이 있다고 여깁니다. 돈과 시간을 아무것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만, 돈과 시간을 넘어서는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바로 나한테 가장 반갑고 즐겁고 훌륭하고 거룩한 사랑이느냐입니다. 내 사랑을 아름답게 펼치는 사진이냐 아니냐를 헤아려야 한다고 봅니다. 내 사랑을 따뜻하게 담아내는 사진이 되느냐 아니냐를 따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사랑을 넉넉하게 펼칠 줄 아는 사진으로 자리매기느냐 아니냐를 곱씹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입에 붙은 말마따나 말은 삶이고 삶은 말이든, 사진은 삶이고 삶은 사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2) 사진쟁이 한길 걷는 강운구 님이 하고픈 말이란


 강운구 님이 사진과 글로 엮어 놓은 《시간의 빛》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사진밭에서 강운구 님 이름은 무척 드높습니다. 강운구 님 스스로 당신 이름을 드높다고 여기실는지 안 여기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강운구 님은 이름이 드높습니다. 다만, 제아무리 이름 드높은 강운구 님이라 하지만, 이 높은 이름값에 견주어 당신 사진책은 얼마 안 팔립니다. 다른 사진쟁이 사진책과 댄다면 무척 많이 팔리는 셈이지만, 이 나라에서 ‘사진한다’고 하는 숱한 사람들 숫자를 어림해 본다면 너무 안 팔리는 노릇입니다.

 하기는, 이 나라에서 사진책은 참 낮은대접입니다. 사진기 팔리는 모양새를 본다면, 사진책 팔리는 모양새는 참 까마득합니다. 사진기를 장만한다고 사진책을 꼭 사서 보아야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진읽기 없이 사진찍기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글읽기 없이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림읽기 없이 그림그리기를 할 수 있는지 갸우뚱합니다. 노래듣기 없이 노래부르기를 할 수 있을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춤 잘 추는 사람 춤을 구경해야 내 춤을 잘 출 수 있지는 않습니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 노래를 들어야 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사랑이라는 테두리에서 헤아린다면, 나 스스로 내 춤과 노래가 아름답거나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가슴팍이라 할 때에는, 내 둘레에서 춤과 노래를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펼치는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글 하나 아름다이 여미려고 한다면, 내 둘레에서 더없이 아름답게 글을 여민 사람들 열매를 찬찬히 살피면서 글읽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찾아나서려는 몸짓이 없이 나 스스로 아름답다 느낄 사진찍기를 선보일 수 있을까요? 사랑스러운 사진을 알아보려는 매무새 없이 나 스스로 사랑스럽다 느낄 사진찍기를 즐길 수 있을까요?


.. 이 세상에서, 인류사에서, 이 땅에서만큼 빠르게 온갖 것을 뒤죽박죽으로 바꾼, 아니 버리고 새로 시작한 경우가 있었을까? 그러고도 걸핏하면 반만년 역사나 선조들의 지혜를 들먹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제의 길은 오늘은 길이 아니며, 어제의 풍경은 오늘 이미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말하자면, 온 나라가 고속도로와 고층아파트가 되려고 한다. 온 나라가 공사판이다 … 한때는 서울 광화문 지하도 입구에서 풍란이나 춘란을 가마니로 쌓아 놓고 헐값으로 팔기도 했다. 다 저 남쪽의 무인도 같은 곳 절벽에 핀 것들을 쓸어담아다가 여러 사람이 골고루 나눠 가진 뒤에 골고루 죽이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은 험해서 자태 귀하고 향내 좋은 것은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 사람들은 흔히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또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그 자체로서 바라보기보다는 어떤 평판과 그에 깃든 사연을 따르기를 좋아한다. 순박한 메밀밭을, 메밀밭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서보다는 한 소설의 무대로서 바라보기를 더 좋아한다 ..  (9, 27, 129쪽)


 강운구 님이 글과 사진으로 엮은 《시간의 빛》을 곰곰이 삭여 읽으면서, 빛느낌 좋은 사진을 듬뿍 느끼는 한편, 어쩐지 이 책에서는 사진읽기를 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더없이 맑고 고운 사진과 글이라서 더없이 맑고 고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군더더기가 자꾸자꾸 보입니다. 강운구 님은 ‘군더더기 남기지 않으며 사진찍기를 한다’는 소리를 듣는데, 왜 당신이 쓰는 글에서는 ‘군더더기 가득한 모습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찍기를 잘하는 사람이 글쓰기까지 잘할 수 있겠느냐 싶지만, 잘하고 못하고 하는 갈래나눔이 아닙니다. 사진 하나에 아름다움과 사랑을 담는 님이라 한다면 글 한 줄에도 아름다움과 사랑을 담아야 할 텐데, 빈틈과 티끌은 하나 없는 사진이요 글이라 하지만, 보기좋음을 감싸면서 가슴찡함으로 울리는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강운구 님 글이 어수룩하거나 어리석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강운구 님 글에는 우리 삶터를 읽어내어 당신 깜냥껏 삭여내되 보드랍고 너그러이 감싸려는 손길이 어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목소리가 아닙니다. 산울림처럼 외곬로 내보내기만 하고는 돌아오지 못하는 목소리로 머뭅니다.


.. 여수까지 가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니 기후가 수상해서 나라 안의 꽃피는 질서가 없어졌다. 서울 시내야 공해로 감싸인 곳이니 진달래가 일찍 피는 것이 당연하지만, 위도에 상관없이 여러 지역에서 한꺼번에 피어 분홍빛으로 ‘봄봄봄’ 하고 있었다 … 천 년 전 융성했던 폐허에 아직 당당하게 곧추서 있는 탑 그늘의 남루한 폐허에도 환한 봄은 왔다. 16만 원어치 더덕 모종을 심는다고 노인이 말했다. “그러면 그걸 언제 수확하나요?” “삼 년 뒤에나요.” “그땐 그게 얼마어치나 됩니까?” “몰라요. 그걸 지금 알 택이 있겠십니껴.” … 보리가 건강에 좋다면서도 먹는 사람이 없으니 보리값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일손이 달리는 판에 노동력의 대가를 주지 못하는 농사는 포기할 길 말고는 없게 되었다 … 조선 소도 서양 소들처럼 사육되는 목장이 많이 생겼다. 한우 고기를 생산하는 소와 그 주인은 교감 따위가 필요없다. 오로지 팔기 위한 것이므로 많이 먹여 빨리 살만 찌게 하면 된다 ..  (36, 49, 74, 137쪽)


 바라보는 목소리를 넘어 살아내는 이야기로 글과 사진을 아로새길 수 있기를 바라는 일은 아직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남 이야기를 하기 앞서 저부터 스스로 옳고 알차게 해내지 못하면서 바라기만 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을 살아내자고, 이 사람을 부둥켜안자고 하는 땀방울이란 ‘펜굴림’으로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진기쥠’으로도 이루지 못합니다. 펜을 붙잡은 손을 넘어서는, 아니 펜을 붙잡는 손을 아우르는 발걸음과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사진기를 쥔 손을 넘어서는, 아니 사진기를 쥔 손을 어우르는 손품과 몸놀림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을 담는 손에서 지식을 다루는 손이 되었다면, 지식을 녹여내어 지식을 살아내는 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 자연을 바라보거나 쉬러 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건강을 얻기나 하려는 그런 거지들은 꼭 달리기 경주처럼 산을 오르내린다. 산뜻하게 깨어나는 자연, 길섶에 핀 샛노란 제비꽃 양지꽃 들을 무참히 밟으며 씩씩하게 오르내린다 … ‘풍경’이나 좋으라고 다랑이논에서 소로 써레질을 계속할 리는 없다. 우리는 지킨 전통보다 버린 것이 더 많다. 소와 맺어 온 오래된 인연도 끊기게 되었다. 농가 울타리 안에서 소와 개와 닭은 늘 한식구로 살아왔다. 닭은 늘 경계하며 겉돌았고, 개는 아이들과 친했으며, 소는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 … 비록 감상적인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은 자연이 제시하는 조건을 웬만큼은 무시하며 살아간다. 비가 와도 출근해야 하며, 눈이 와도 일은 해야 한다. 계절 때문에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식물보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  (54, 66, 97쪽)


 좋은 생각은 좋은 삶이 되면서 좋은 사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람을 찍건 자연을 찍건 들판을 찍건 노을을 찍건 빛줄기를 찍건 구름을 찍건 나무를 찍건 연날리기를 찍건 꽃송이를 찍건 연탄재를 찍건, 이 사진 하나하나에는 바라보기 하나에서 그치지 않는 이야기를 함께 스며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느 사진쟁이가 아닌 ‘작가주의’ 사진쟁이 강운구 님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새내기 사진쟁이가 아닌 ‘사진길을 어느새 마흔 해 즈음 걷고 있는’ 사진쟁이 강운구 님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풋내기 사진쟁이가 아닌 ‘우리 고유한 풍경을 가장 한국 내음이 묻어나는 모습으로 찍는다는’ 사진쟁이 강운구 님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내음이란 무엇일까요. 한국 내음이란 어떤 느낌일까요. 우리한테 고유한 넋이나 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우리한테 고유한 넋과 얼을 어느 만큼 간수하고 있을까요. 강운구 님 스스로 살아내는 한국 내음이란 어떤 모습이나 빛깔일까요. 강운구 님 스스로 즐기면서 나누는 고유한 넋과 얼이란 무엇일까요.


.. 쓰레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높고 깨끗한 곳에 모셔져 있었다. 그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은 작은 산의 마루께는 고창읍의 쓰레기 매립지였다. 아마도, 어떤 마을과도 마찰이 없는 곳에 은밀하게 자리잡은 것일 터이다. 그럴 거라고 짐작은 하더라도 속은 풍경에 전혀 감동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 보기 좋은 풍경을 찾는다고 꼭 이름난 곳에만 갈 이유는 없다. 풍경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으며, 뜻밖에 만나는 풍경이 더 신선하다. 같은 곳을 다시 가더라도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계절이나 환경이 바뀌기도 하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 또는 사람이 생활하는 풍경과 자연의 풍경은 늘 동떨어져서 따로만 있다 … 제도권 밖에 있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고는 결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벼슬이 낮거나 아예 없는 것들에서 신선한 아름다움을 볼 수도 있다 ..  (117, 119, 216∼217쪽)


 강운구 님은 1994년에 〈우연 또는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첫 사진잔치를 열었고, 1998년에 〈모든 앙금〉이라는 이름으로 사진잔치를 열었습니다. 사진길을 걸은 지 서른 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진잔치를 열었습니다. 니어링 부부 이웃에서 살던 사람들은 당신들과 같은 때 같은 곳에서 살아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했다는데, 저는 1994년과 1998년 강운구 님 사진잔치를 두 눈으로 바라보고 온몸으로 느낄 수 있던 일이 더없이 고맙다고 느낍니다. 같은 때 같은 곳에서 살아가면서 사진을 보고 배울 수 있으니 그지없이 반갑다고 느낍니다. 좋은 모습을 헤아리면서 배우고, 아쉬운 모습 또한 살피면서 배웁니다.

 그러고 보면, 강운구 님이 어느 한 군데 빠지지 않도록 대단하기만 하다면 좀 재미없는 사진이며 글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참 좋은 사진이요 참 애틋한 사진인데 어느 한 구석에서는 ‘어딘가 허전한걸?’ 하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진길을 걷는 뒷사람으로서 제 깜냥껏 새 눈길을 트고 새 손길을 갈고닦으며 새 마음길을 추스를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몹시 적지만, 강운구 님은 1975년에 ‘공간’이라는 출판사에서 《내설악 너와집》이라는 사진책을 한글판과 영어판으로 나란히 낸 적이 있습니다. 이때에 ‘공간’ 출판사는 임응식 님 《비원》과 《종묘》를 비롯해 여러 가지 사진책을 함께 내놓았습니다. 공간 출판사가 이무렵 내놓은 《종묘》에는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대표가 되는 종묘 사진’이 시원스런 판짜임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사람들이 눈여겨보는 책은 임응식 님 《종묘》이지, 강운구 님 《내설악 너와집》이 아닙니다. 오로지 흑백으로만 담은 강원도 내설악 너와집인데, 무지개빛사진이 아닌 흑백사진으로도 이토록 아름답게 담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저로서는 강운구 님 사진책 가운데 이 《내설악 너와집》을 가장 사랑하고 아낍니다. 더없이 아름다우며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이보다 안승일 님 사진책 《굴피집》이 한결 아름다우며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두 분 모두 빼어난 분이요, 두 사진책 모두 훌륭하지만, 《굴피집》에는 굴피집에 깃들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굴피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둘러싼 자연 터전 이야기가 고이 묻어나 있고, 《내설악 너와집》에는 사람들 발자취와 사람들을 둘러싼 자연 터전 모습만 곱게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설악 너와집》이나 《굴피집》이나 100번을 넘게 되읽고 되읽지만, 《내설악 너와집》을 되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습니다. 《굴피집》은 되읽을 때마다 코끝이 시큰하고 눈물방울이 똑똑 떨어지지만.

 아쉽게도 ‘이야기’가 빠졌기 때문에, 《내설악 너와집》을 몹시 아끼고 사랑하면서 간수하고 있지만, 강운구 님 사진밭에서 ‘이야기 찾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1975년에서 서른 해가 지난 2004년이었다면, 무언가 ‘다리품 팔며 이 땅 곳곳을 누빈 당신 땀방울이 깃든 이야기’가 넌지시 사진으로 실리고 조용히 글로 여미어질 수 있어야 하지 않았느냐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에서마저도 이야기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저녁에》에서도 이야기는 스며들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왜 강운구 님은 당신 사진에 이야기를 깃들이는 손길을 여미지 않을까요. 아니, 못할까요. 아니, 스스로 더 다가서지 못할까요.

 좋아하는 분이요, 사랑하는 어른이기 때문에 이 대목을 늘 아쉽게 생각합니다. 아쉽고 안타깝기 때문에 기다리며, 기다리는 동안 저부터 한결 새로워지며 나날이 거듭나자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이 아닌 반가움이나 고마움으로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강운구 님이 걸어온 사진길은 100%를 빛내는 사진이 아닌 98%로 아름다운 길을 걷는 발자국이었는지 모르니까요. 아무리 강운구 님 사진밭이 알차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다 하여도, 너무 높은 이름이 아닌 작고 따사로운 동네 아저씨 바지저고리로서 들려주는 사진 목소리인지 모르니까요. (4343.1.14.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