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
고은우 외 지음, 따돌림사회연구모임 기획 / 양철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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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을 부추기고, 폭력에 젖어 있는 나라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7]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



 지난주 토요일 낮, 대안교육 이야기책을 펴내는 민들레 출판사에서 강의를 하나 맡아 하기로 해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혼자 갈까 하다가 옆지기하고 아기도 함께 갑니다. 인천 맨 끄트머리 전철역에서 타니, 처음 길을 나설 때만큼은 조금은 수월합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요. 잠깐조차 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서며 앉으며 노는 아기를 달래며 복닥이고 있는데, 조금 늙은 아저씨 한 사람이 옆지기보고 ‘비키’라면서 당신 아주머니를 앉히려 합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멀거니 쳐다보다가 “앉으시려면 이쪽에 앉으셔요.” 하고 제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때 바로 옆에 다른 자리가 납니다. 아주머니는 그리 앉습니다. 그지없이 어처구니없는 노릇인데, 드물게 이런 일을 겪습니다. 옆지기한테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그 자리를 당신한테 달라’는 어르신이 있기도 합니다만, 이날은 ‘머리를 짧게 깎은 옆지기’를 어린 학생쯤으로 보며 얕잡았기 때문입니다. 옆지기는 올해로 나이가 서른이지만 얼굴로는 퍽 어리게 보이는지(제가 보기엔 나이 서른이면 생기는 주름이 퍽 많다고 느끼는데) 애 엄마한테 막 구는 어르신이 때때로 있습니다. 옆지기가 아이하고 경주에 있는 생채식수련원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기차에서 겪었다는데, 어느 할머니가 옆지기를 보며 ‘고등학생이 사고 치고(?) 애 끌어안고 다니는 줄’ 엉뚱하게 생각했다더군요.

 그런데, 옆지기가 서른이 아닌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라 하더라도, 버젓이 앉아 있는 사람한테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장애인노약자영유아보호자 자리’라는 데가 아니었으니까요. 초등학생이건 중학생이건 다리가 아프면 앉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어르신이라 하더라도 자리에 앉고 싶다 할 때에는 ‘고운 말’로 “여보게, 내가 많이 힘드니 자리를 내어줄 수 있나?” 하고 물어야 합니다. 다짜고짜 비키라고 하는 일은 폭력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젊은 애 엄마라 할지라도, 애 엄마한테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자리를 비키라는 일은 어르신으로서 할 노릇이 아닙니다. 아이는 ‘작은 짐가방’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똑같은 목숨입니다. 아이들이 몸피가 작다 하여도 어른하고 마찬가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몸피가 작기에 아이 둘이 어른 한 사람 앉는 자리에 나란히 앉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 자리에 몸피가 큰 어른이 찡겨 들어오면 모두한테 고달픕니다. 아직 무릎이며 뼈며 관절이며 단단히 여물지 않은 아이보고 서라 하고 어른이 앉으려 하는 일 또한 올바르지 않기도 합니다. 힘이 여린 아이한테 힘이 있는 어른이 참으라고 윽박지르는 일이란 더할 나위 없는 폭력입니다.


.. 작년 동균이 담임은 동균이가 친구 사귀는 방법을 모르고 이기적으로 변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나 역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같이 놀려고 하지 않고 말도 걸지 않는데 동균이가 친구 사귀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25쪽)


 어쩌는 수 없이 요사이 한 주에 닷새는 꼬박꼬박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을 탑니다. 이렇게 지옥철을 타면서 숱한 ‘서민’을 부대낍니다. 이들 서민은 지하철에서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결이 퍽 옅습니다.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결이 따스한 분이 틀림없이 있지만, ‘아무리 홍보를 하고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전철 걸상에서 다리 쩍 벌리는 남자 젊은이와 어르신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들 남자 젊은이와 어르신은 당신들 매무새를 고칠 생각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르신들은 어르신들대로 어릴 적부터 남자를 섬기고 높이는 터전에서 살아오면서 익숙합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오늘날에도 남자를 드높이고 모시는 터전에서 지내 왔기에 자연스럽습니다.

 제아무리 값비싸구려 양복을 차려입고 있어도 마음씨가 착하거나 다소곳하지 못한 사람이 퍽 많습니다. 이런 전철, 아니 지옥철을 날마다 타고다니려니 제 마음이 나날이 거칠어지고 메말라 갑니다. 제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가 모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동안 착한 마음을 이어나가기란 꿈 같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리하여, 서로서로 먼저 타고 먼저 내리고 먼저 쑤시고 들어가며 자리를 차지하면 더 널찍하게 즐기려고 어깨를 펴고 다리를 벌리고 신문을 쫙 펼치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 같다고 느낍니다. 따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어도, 따로 집에서 일러 주지 않았어도, 모두들 저절로 시나브로 배우고 깨닫습니다. 알게 모르게 서로한테 또다른 폭력을 휘두르는 ‘얼굴과 이름 없는 깡패’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 준혁이도 어린 아이일 뿐이다. 아무리 거칠고 못되게 굴어도 아이는 아이인 것이다 … 할 일이 차고 넘치는 교사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 따돌림의 뿌리에 조금도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 갑갑하고 불행한 일이다. 갈수록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아니, 점점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내 아픔을 느끼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  (54, 137쪽)


 어제와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일기》라는 그림일기 책을 아침길에 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이란 꾸밈말이 좀 낯간지럽지 않느냐 싶고, 책을 읽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까지는 아니라는 느낌이지만, 꽤 사랑스럽고 살가운 자연일기를 담고 있습니다. 넘겨읽기에는 좋은 판짜임이 아니라 눈과 목이 좀 아픈데, 그래도 아침길을 즐겁게 열어 준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어제와 오늘 아침 이 책을 읽으며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이 도시에서 이런 자연일기를 읽는 뜻이 있을까?’ ‘모시나비이고 네발나비이고 긴꼬리나비이고 호랑나비이고 노랑나비이고 흰나비이고 하나 찾아볼 길이 없는 서울로 일하러 오가는 주제에 이런 책을 읽어서 내 마음이 얼마나 살찔 수 있을까?’ ‘내 오른쪽에 선 아가씨가 읽는 처세책을 읽어야 하지 않나? 내 왼쪽에 선 젊은 사내가 읽는 영어책을 보아야 하지 않나?’ ‘부질없는 지식조각만 잔뜩 집어넣는 꼴사나운 책읽기가 아닌가?’ ‘그예 겉치레 겉발림에 지나지 않으며 겉맛만 부리는 짓이 아닌가?’

 광화문 세종로이든 새문안길이든 볼거리가 하나도 없다고 느끼며 걷습니다. 앞사람들 담배연기를 쐬기 싫어 더 빨리 걷습니다. 잰걸음을 놀리며 담배연기 풀풀 피우는 양복쟁이는 때려잡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놀러온 손님이 어느 비싸구려 밥집으로 줄지어 들어갑니다. 저 일본 손님은 저 밥집에서 먹은 밥으로 ‘한국 밥은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겠지요. 물결치는 자동차가 끊이지 않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펼칩니다. 책을 읽으면서 걷기로 합니다. 저로서는 서울에서 눈둘 데가 없어 아무것도 보지 말고, 땅이며 건물이며 사람이며 차며 보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그저 책에다 눈을 처박자고 생각합니다.

 몇 분 걸어 한글회관에 닿고, 5층까지 계단을 타고 오르며 책을 내처 읽습니다.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셈틀을 켭니다. 오늘치 할 일을 돌아보며 숱한 공공기관 누리집을 드나듭니다. 중앙부처이든 지자체이든 옳고 바르게 말글을 다루며 누리집을 건사하는 곳은 없습니다. 이들 공무원은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고 공공기관 누리집을 마련하고 있을 텐데, 더욱이 이들 공무원은 하나같이 ‘좋다는 대학교’를 제법 높은 성적을 거두며 나왔을 텐데, 스스로 말글을 알맞고 싱그럽게 간수할 줄을 모릅니다.


.. “어떻게요? 저 못할 것 같아요. 휴…….” “아니야. 해야 해. 개새끼라고 해. 다른 욕도 필요없어. 아이들은 쉴 틈 없이 욕을 하면서 더 센 척을 하잖아. 그런데 이 선생이 아무리 큰 소리로 혼낸다고 해서 먹히겠어?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을 거야. 그러면 그럴수록 우습게 보이겠지.” … 개새끼 소동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준혁이가 몰라보게 순한 양이 되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교실에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수업 시간에도 아이들은 조용히 집중했다. 이 년 만에 평범한 일삼을 맛보고 있었다 … 세화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힘과 권위로 아이들을 제압해서 얻은 평화가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 우리 반은 진정으로 폭력으로부터 벗어났던 것일까? ..  (66, 72, 78쪽)


 지지난달에 다 읽은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책이름에도 나오는 ‘이 선생’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서로서로 주먹다짐을 할 뿐 아니라 따돌림을 아주 밥먹듯이 하고 있다면서 골머리를 앓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어느 ‘이 선생’들이든 이 같은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골머리를 앓지 않고 선생들 스스로 주먹다짐과 따돌림을 스스로 나서서 펼쳐 보이고 있는지 모르고요.

 학교에서 수많은 ‘이 선생’들은 교과서에 적힌 대로, 또는 스스로 아는 대로 아이들한테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믿고 돕고 어깨동무하면서 지내라고 가르치리라 봅니다. 몸소 사랑과 믿음을 보여주기도 하리라 봅니다. 집에서는 어버이들이 서로 착하게 놀라고 이야기할 테며, 마을에서 어르신들은 아이들한테 서로서로 잘 지내라고 이야기할 테지요.

 그런데 이 나라 이 삶터 이 학교 이 회사 이곳저곳에서 주먹다짐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따돌림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으로든 저런 모습으로든 끝없이 불거집니다. 온갖 모습 온갖 크기로 주먹다짐과 따돌림이 판을 칩니다. 밥그릇 지키기와 밥그릇 빼앗기가 춤을 추고, 헐뜯기와 비아냥거리기가 넘실거립니다. 하느님을 믿든 부처님을 섬기든 예배당에서만 노래하고 눈물짓는 사랑으로 그치고, 예배당 바깥에서는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은 다스릴 수 있을까요? 학교폭력은 다스려야만 할까요? 학교폭력은 왜 터져나올까요? 학교폭력은 어떻게 털어낼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학교에 들기 앞서도 폭력에 물들어 있지는 않나요? 아이들한테 폭력 기운이 없어도 학교 바깥에서는 언제나 폭력에 둘러싸여 있지 않나요? 아이들이 잘 배워서 학교에서 폭력을 씻어냈다 할지라도 학교 밖으로 나오거나 사회로 나오면 또다시 폭력에 젖어들어야 하지는 않는지요?


.. “짐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중간고사에서 우리 반이 1등을 했다.” “와!” “깜지 덕인 줄이나 알아.” “우…….” 강 선생은 3월부터 깜지를 시키더니 끈질기게 밀고 나갔다. 아이들과 강 선생 중 누가 더 센가 내기하는 것 같다. 고래 심줄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다. 강 선생은 목표를 정하면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강 선생의 채찍질 때문인지 아이들 모두 중간고사는 그럭저럭 봤다 ..  (198쪽)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는 학교에서 몸소 학교폭력을 부대껴야 하는 선생님들 눈길과 눈높이에 맞추어 이런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이 모습을 가다듬으려는 몸짓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참 괜찮구나 하고 느끼며 책장을 처음 넘겼는데, 뒤쪽으로 갈수록 글머리가 어영부영 흐트러집니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쓴 탓이라 하겠으나, 아무래도 학교폭력이란 똑부러지게 말하거나 잡아채어 뜯어고칠 수 없는 탓이겠지요. 학교에서 주먹다짐과 따돌림이 사라지게 한대서 폭력이 사라질 일이란 없을 테고요. 우리 마음에 폭력이 남아 있고 따돌림이 남아 있는데 학교폭력이 자취를 감출까요? 우리 스스로 ‘더 높은 대학교에 우리 아이만큼은 들어가야 해!’ 같은 생각이 깃들어 있는데 학교폭력을 뿌리뽑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는 일은 ‘남들은 몰라도 나 혼자 정규직이면 되고, 내가 비정규직이더라도 이주노동자 아픈 일까지 마음쓸 겨를이 없단 말이야!’ 같은 생각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데 따돌림을 없앨 수 있을까요?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못한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국가보안법 폐해를 고스란히 물려줍니다. 원자력발전소와 핵폐기장 문제를 풀지 않을 뿐더러 더 많은 전기를 더 펑펑 쓰고 있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망가진 이 나라 삶터와 자연을 남김없이 물려줍니다. 아이들한테 아파트와 자가용만 물려주려는 어버이는 아이들끼리 서로 치고박고 괴롭히고 들볶는 배움터 골칫거리를 언제까지나 이어가게 합니다.

 세상은 평화가 아닌데 학교만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세상은 온통 폭력과 따돌림이 판치는데 학교만 조용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돈타령이요 무시무시한 싸움터인데 학교만 얌전하고 다소곳하며 사이좋은 어깨동무가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보내는 하루하루가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늘 되풀이됩니다. (4342.10.29.나무.ㅎㄲㅅㄱ)


 ┌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양철북 펴냄,2009)
 ├ 고은우, 김경욱, 윤수연, 이소운 씀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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