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리뷰'에 안 걸치는 까닭은, '리뷰'에는 정식으로 다시 쓸 생각이기 때문이다) 

 





 전철길에서 눈물 흘리며 책읽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 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엄마가 사랑해》(숲속여우비) 



 열석 달을 넘기는 아기한테는 엄마가 나누어 주는 사랑에다가 아빠가 나누어 주는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이 두 가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누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훨씬 좋겠지요. 우리 삶터는 어느 결에 조각조각 쪼개지면서 어버이 따로 아이들 따로가 되어 버리고 있는데,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당신들 하고픈 일과 놀이를 즐기고 싶습니다. 아이들 또한 아이들이 좋아하거나 바라는 일과 놀이를 붙잡고 싶습니다. 함께 모이기 어렵고, 같이 손 잡기 힘듭니다. 외려 낯과 이름 선 사람들하고 모여서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깁니다.

 어젯밤 자정이 다 되어 가까스로 집에 돌아온 애 아빠는 아이가 깨어 있는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기저귀 빨래만 해 놓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부랴부랴 일어나 씻고 가방을 꾸리는데, 어젯밤 미처 해 놓지 못한 빨래는 건드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둡니다. 이 빨래는 오늘 늦게 집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고단한 몸으로 해야겠지요. 마땅한 노릇일 텐데, 애 아빠는 아침에도 ‘깨어 있는 아이 얼굴’은 보지 못하는 채 길을 나섭니다. 그나마 일터에 아홉 시까지 나가도록 맞추어 가장 늦게 집에서 나오려고 하니 일곱 시 이십사 분에 걸음을 재촉합니다.

 애 엄마는 홀로 하루 내내 아이하고 씨름을 하다가 느즈막하게 아빠를 마주하는데, 서로서로 다른 까닭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눈만 겨우 마주친 다음, 아빠가 먼저 쓰러지듯 잠들고,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합니다. 애 아빠가 서울로 일을 나온 지 한 달이 되는데, 이에 앞서는 엄마 아빠가 아이하고 언제나 하루 내내 있었지만, 언제 그렇게 지냈느냐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아빠는 바깥으로만 맴돌게 되고 엄마는 집에서만 머물게 되면서, 아이는 아이대로 동네 마실을 즐기지 못해, 한참 신나게 걸어다니며 세상을 느끼고 싶은데 제대로 세상을 느낄 길이 없습니다.

 밀리고 눌리고 밟히는 전철길입니다. 자리를 얻지 못하고 서서 갑니다. 자리에 앉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전철칸 하나에 쉰 사람쯤만 앉습니다. 여기에 백을 곱한 오백 사람 남짓은 서로 오징어떡이 되면서 낑기고 찡긴 채 서울로 가야 합니다. 맨 끄트머리 전철역에서 타더라도 자리에 못 앉는 사람이 많습니다. 밀리고 차이고 얻어맞는 사람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골을 내고 짜증을 부리며 눈살을 찌푸립니다. 자리에 앉은 이 가운데에는 한둘쯤 책이나 신문을 들고, 거의 모두 모자란 잠을 이루려 눈을 붙입니다. 새벽에 길 나서고 밤에야 돌아오는데, 일터에서 낮잠이라도 삼십 분 달게 자기 어려운 이들 ‘인천 떨거지(또는 수원 떨거지)’는 아침저녁(또는 새벽밤)으로 스스로 사람 아닌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저마다 똑같은 노릇이요 똑같은 괴로움과 고달픔이라지만 ‘날마다 이런 골부림과 짜증내기를 저 혼자만 해야 하는’ 듯 느끼기 일쑤입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한테 치이고 밀리다 보니, 서로를 나와 똑같이 아름답고 고운 목숨임을 잊기 일쑤입니다. 서로서로 똑같이 힘들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 우리는 밖에 나가면 늘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구멍가게에서 잡지를 사려고 했을 때, 가게 주인 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하느님께서 당신들에게 이 일에 보답을 해 주실 거예요.” 우리가 소원하던 아이가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이 아이는 참 운이 좋군요. 나중에 아이가 당신들에게 꼭 고맙다고 할 거예요.” 우리는 언제나 이런 유의 위로를 들어야 했다 ..  (83쪽)


 왼쪽오른쪽 앞뒤에서 밀어대는 사람들한테 밀리고 휩쓸리며 전철칸 창문 옆 벽에 몸이 쿵 하고 찧습니다. 저를 민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한테 밀렸을 테고, 그 사람은 또 그 옆에 있는 사람한테 밀렸겠지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당신이 밀친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두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이 썅!’ 한 마디뿐(그러면 제 몸이 쿵 박은 전철 벽은 저한테 ‘아이 썅!’ 할는지?).

 밀리고 밟히고 팔꿈치로 얻어맞으면서 《엄마가 사랑해》(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씀,유혜자 옮김/숲속여우비,2009)라는 책을 붙잡습니다. 1988년에 처음 우리 말로 나온 책이 2009년에 스물한 해 만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엄마 아빠가 내다 버려서 외톨이가 된 아이를 스위스에 사는 글쓴이(도리스 클링엔베르그)가 열여덟 달을 기다린 끝에 맞아들인 이야기(1975년에)가 낱낱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예전에 한 번 읽었으나, 새로운 판으로 읽으면서도 가슴이 뻑적지근합니다. 책을 읽다 읽다 또 읽다가 눈물이 핑 도는데, 제 옆에서 저를 팔꿈치 뾰족한 데로 쑤시듯 밀치는 아가씨 때문에 아파서 핑 도는 눈물이 아닙니다. 이렇게 오징어떡이 되는 가운데에서도 가슴을 적시는 책을 읽을 수 있다니 놀랍고, 이렇게 책을 붙잡는 동안 허리가 아프고 옆구리가 결려도 고단하다고 느끼지 않으니 기쁩니다.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말없이 그냥 서 있었다. 결국 아이의 손짓 발짓으로 우리는 아이가 그것들이 모두 자기 것이냐고 묻는 것을 알아챘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이가 옷장에서 옷을 신나게 끌어내는 모습을 보는 일은 즐거웠다.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웅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꺼내어 걸쳐입었다 ..  (38쪽)


 덜컹거리고 흔들리고 미어터지는 가운데 책을 읽자고 선뜻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고단한 전철길에서 겨우 자리 하나 얻었다면 몇 분이라도 눈을 붙이며 몸을 쉬고 싶다는 사람들 마음을 잡아끌기 어렵습니다. 저 또한 몹시 고단하면 책을 덮고 잠을 자니까요.

 언제나 고단함이 가득가득 쌓인 사람들한테 무슨 책을 쥐어 줄 수 있겠느냐 싶습니다. 스포츠와 연예 기사 가득한 공짜신문이 아니고는, 또 주식시세와 돈벌이 소식 담긴 경제신문이 아니고는, 어떤 읽을거리를 전철길 이웃사람한테 건넬 수 있겠느냐 싶습니다.

 서대문역에서 내립니다. 밖으로 나오니 길에서 담배 피우며 걷는 양복쟁이가 둘 보입니다. 선 채로 담배를 피우든지, 걸을 때에는 담배를 끄든지, 저 혼자만 좋다고 담배를 피워서 쓰겠느냐 싶으나, 저이한테는 이렇게라도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머리와 마음에 가득한 골남과 짜증남을 털어내지 못할 테지요. 걸음을 재게 놀려 담배쟁이를 앞지르고 책을 펼칩니다. 일터에 닿기 앞서 몇 줄을 더 읽습니다. “내가 웅에게 ‘귀여운 오리’라는 노래를 열 번쯤 되풀이해서 불러 주었다. 웅은 환하게 웃으면서 내 노래를 열심히 들었다. 기름진 땅에 수많은 씨앗이 떨어지고 있다.(96쪽)” (4342.9.10.나무.ㅎㄲㅅㄱ)


 ┌ 《엄마가 사랑해》(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씀,유혜자 옮김/숲속여우비,2009)
 └ 책값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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