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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생활하기
최광호 지음 / 소동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당신은 사진을 왜 찍습니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 최광호, 《사진으로 생활하기》
- 책이름 : 사진으로 생활하기
- 글ㆍ사진 : 최광호
- 펴낸곳 : 소동 (2008.5.15.)
- 책값 : 16000원
(1) 사진기를 든 손과 사진기를 쥔 마음
그동안 잘 쓰고 있던 렌즈가 지난 8월 15일에 망가졌습니다. 어디 떨어뜨리거나 부딪히지 않았으나 망가졌습니다. 이 렌즈는 지난해 6월 25일에 열 번째로 제 품을 떠난 사진기(도둑맞거나 잃거나)를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로 떠나보낸 다음 새로 장만한 녀석입니다. 꼭 한 해하고 한 달하고 열흘 만에 망가진 셈입니다. 그동안 이 렌즈로 이만 장 남짓 찍었는데, 값싼 렌즈치고 잘 버티어 준 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비바람이 몰아치건 춥건 덥건 언제나 제 땀을 먹으면서 지내던 사진기요 렌즈입니다. 어떤 이는 제 사진기와 렌즈를 보면서 ‘너무 막 다루고 있지 않으시나요?’ 하고 묻는데, 저는 사진기와 렌즈를 막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나 한쪽 어깨에 걸쳐 놓거나 한손으로 쥐고 있습니다. 비오는 날 자전거를 몰 때에도 목에 사진기를 걸고 언제나 찍을 수 있게끔 비옷 안쪽에 두고 있습니다. 몹시 추운 날 손가락이 얼어붙어도 맨손으로 사진기를 쥡니다. 장갑 낀 손으로 쥐는 느낌하고 장갑 낀 손으로 단추를 누르는 느낌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겨울철에 사진을 찍을 때에는 으레 사진기를 겉옷으로 감싸며 걷지만, 겨울에는 온몸과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는 채 사진을 찍으며 사진기도 함께 벌벌 떱니다. 손가락은 얼어붙더라도 사진기는 얼지 않기를 비손하며 돌아다닙니다. 여름에는 웃옷 안쪽에 사진기를 모셔 놓으며 몸으로는 비를 흠뻑 맞으면서 사진기만은 젖지 말아 달라며 비손하며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마구 눌러대는 사진은 싫어합니다. 꼭 찍어야 할 만큼만 찍고, 한 번 찍은 사진은 되도록 지우지 않으려 합니다. 고단하도록 돌아다닌다 해서 더 많이 찍어야 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고단하게 돌아다니면서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디지털사진기를 쓰는 매무새는 필름사진기를 쓰는 매무새하고 같습니다. 사진 한 장 찍을 때마다 돈이 몇 백 원씩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허투루 사진을 날릴 수 없습니다. 또한, 허투루 찍었다가 날린다면, 이 사진을 지우느라 시간을 몇 초씩 버려야 하며, 이렇게 시간을 버리다 보면, 나중에는 잘못 찍은 사진을 지우느라 더 눈여겨보거나 들여다볼 ‘내 사진감’을 몇 초 동안 못 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한 장을 찍건 열 장을 찍건 백 장을 찍건, 모두 ‘내 사진’이라 말할 수 있도록 빛과 셔터빠르기와 조리개값을 알맞고 올바르게 맞추어 찍어내려 합니다. 사진을 찍기 앞서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하며,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까지 내 사진감이 내 눈길로 들어와 내 마음길을 거쳐 내 몸길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다스려 내려고 합니다.
.. 아침에 일어나면 예쁜 햇살이 나를 반기기에 사진을 찍는다. 아내가 밥상을 차리면 그 밥이 예쁘고 맛있어 또 찍는다 …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늘 함께 사는 것이다. 사진하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사진으로 이 세상을 이야기하고 서로 나누는 방법이 무엇일까 나는 꾸준히 고민했다. 그래서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사진 찍고 땀냄새와 생활이 배어 있는 사진을 찍자고 항상 주장해 왔다 … 나다운 방식으로 열심히 한다는 것은 작업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다운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산다, 사진으로 사는 삶, 살다 보니 내 것이 되어 있는 나다운 삶, 내가 나다운 바른 생각을 해야 바르게 살고, 바르게 살아야 올바른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알게 되었다 .. (4∼5, 148쪽)
지난해에 사진기를 열 번째로 도둑맞고는 힘이 쪼옥 빠졌습니다. 그동안 쓰던 사진기는 영영 다시 쓸 수 없을 뿐더러, 내 꿈은 파노라마사진기 장만할 돈은 다시는 못 모으겠다고 생각하니 무엇하러 사진을 찍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시 허리띠 졸라매고 몇 해 동안 돈을 모으면 사진기며 렌즈며 알뜰히 되살 수 있겠지만, 그 몇 해 동안은 사진하고 헤어져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죽기’를 떠올리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돈 좀 있거나 힘깨나 씀직한 곳에 이래저래 편지를 띄워 ‘사진기를 빌릴 수 있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적금을 붓듯 다달이 조금씩 갚아 나갈 테니, 사진기를 ‘스물넉 달 갚기’로 팔 수 있는지, 렌즈를 ‘서른여섯 달 갚기’로 내어줄 수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름 안 난 사진쟁이라 그럴 수 있고, 저와 비슷한 까닭으로 사진기와 렌즈를 빌려 주십사 하는 분들이 많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때 옆지기는 ‘우리가 다른 일을 못해도 괜찮으니, 밥을 굶더라도 사진기부터 어떻게든 먼저 사자’고 하며 기운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수로 백팔십만 원짜리 캐논 엘렌즈에, 사십팔만 원짜리 니콘 에프엠 이번에, 또 디지털사진기까지 장만하랴 싶었습니다. 말은 고맙지만 주머니가 후줄근하면 어찌할 길 없는 노릇입니다. 시무룩하니 며칠을 지내다가 목포에 사는 형한테 도와 달라는 아쉬운 이야기 담은 편지를 띄웁니다. 어려울 때마다 늘 도움을 받아 미안하지만, 또 도와 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형은 스스럼없이 또 도와줍니다. 외려 그만큼만 보태 주면 되느냐고 걱정해 줍니다. 우리 식구가 힘들 때마다 보태 주는 손길이 고맙고 미안해, 새 디지털사진기 하나(캐논 450디) 장만할 만큼 빌리고, 렌즈는 번들이 아닌 녀석 가운데 가장 값싼 녀석으로 장만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진을 다시 찍으니 ‘사진을 아예 못 찍던 때를 생각하면 숨통이 트이고 살맛이 납’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신나고 즐겁게 찍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이 렌즈로는 이만큼밖에 안 보이는구나. 예전 렌즈로는 훨씬 넓게 보였는데’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예전 렌즈로 찍었다면 한결 잘 나왔겠지’ 하는 생각마저 자주 품었습니다.
.. 그 인상을 기록하다가 보면, 그 기념사진을 모아 작품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 꼭 이런 사진을 찍어야지 생각하며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도록 내 생활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12, 47, 55∼56쪽)
이렇게 한 달쯤 보내고 두 달째 접어들 무렵, 값싼 렌즈로 찍은 사진을 종이로 뽑아 보면서 ‘그럭저럭 잘 나왔네. 생각보다 꽤 잘 나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그동안 헌책방마실을 하며 찍은 숱한 사진을 하나씩 돌아보았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사람들이 퍽 좋아하는 제 작품들(헌책방이나 골목길을 찍은 사진)은 다름아닌 바로 오늘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값싼 렌즈와 값싼 사진기로 찍었던 녀석이 아니었는가 하고 곱씹습니다. 몇 천만 원짜리 사진기와 렌즈가 없더라도 내가 바로 이곳에 늘 있는 가운데 찍은 사진이기에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반가이 여기는 작품이 아니었느냐고 되씹습니다. 비록 파노라마로 담지 못했다 할지라도, 내 사진에는 내 눈물과 땀방울과 웃음과 손길을 골고루 담아냈다 한다면,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껴안아 주고 사랑해 주지 않았느냐고 되돌아봅니다.
1998년 1999년 2000년 무렵에 찍은 사진들을 다시 들춰내며 들여다봅니다. 나한테는 돈도 없었지만 사진기조차 없어서 후배한테 빌려서 찍었습니다. 신문사 지국에서 나와 출판사에 들어간 뒤에는, 두 번째로 일한 출판사에서 사장님이 사진기를 한 대 선물해 주어 그 장비를 몹시 고맙게 여기며 다루었습니다. 그때에도 제 사진기에 달린 렌즈는 퍽 값싼 녀석이었고, 그 뒤 이태 동안 푼푼이 모아 다른 사진쟁이들 발가락만큼 따라가는 장비를 헌 것으로 겨우 하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값싼 장비를 남한테 빌려서 사진을 찍었든, 여러 해에 걸쳐 푼돈을 조금씩 모아 마련한 조금 괜찮은 장비로 사진을 찍었든, 제 사진은 늘 한결같았구나 싶습니다. 어떠한 장비를 쓴다고 해서 달라지는 사진이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또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 봅니다. 저한테 사진을 처음 가르쳐 준 분은 저나 다른 사람들한테 ‘어떤 장비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꽤 비싼 장비를 자랑하듯 만지작거리면서 수업을 들으면 당신이 미국에서 사진을 찍고 배우고 가르치던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라밖 사람들은 1회용 사진기로도 퓰리처상을 받을 만한 사진을 찍는데, 한국 사진기자들은 수천만 원짜리 사진기로도 기념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는다’고 말하며 나무랐습니다.
우리들한테 저마다 제 사진감을 하나씩 붙잡고 이 사진감을 우리가 눈을 감는 날까지 놓지 말라는 말만 끝없이 되풀이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붙잡는 사진감에 따라 어떠한 사진기가 알맞거나 걸맞는지는 잠깐조차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화각’이라든지 ‘광각-망원’ 렌즈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필름 인화와 현상이라든지, 잘라내기(트리밍)라든지 숱한 사진솜씨 이야기는 한 가지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저는 여태까지도 이런저런 사진 잔솜씨는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 배울 때부터 갖출 까닭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사진솜씨 이야기는 ‘너희들이 집에 가서 시간 내어 책을 읽어 봐’ 하면서 끝냈습니다. 집에서 암실을 마련해 손수 만들어 보아도 좋지만, 그냥 사진관에 다 맡기고 길에서 사진기 부둥켜안고 너희들 사진감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까지 하곤 했습니다.
.. 기록이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으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찍는 사람도 대상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 한창기 사장은 그제야 껄껄 웃으며, ‘야, 최광호, 사진을 못 찍는 것이 아니라 도자기를 볼 줄 모르는군’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도자기에도 앞뒤가 있으니, 그것부터 공부하라며 집으로 데려가 도자기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건 이렇게 찍어라, 또 이런 건 저기서 이렇게 보아야 한다, 하는 식으로 사진을 찍는 방법 이전의 더 근본적인 관점과 생각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전통 한옥을 좋아했던 한창기 사장은 그 후에도,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시골마을에서 예쁜 한옥이나 초가를 지나치면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 집 대문을 두드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집을 둘러보면서 건축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했다 .. (64, 75쪽)
사진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스스로 사진감을 제대로 찾아내고 알아내면서 지치지 않고 사진길을 걷도록 이끌’ 구실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사진기 몸통이나 렌즈는 우리 스스로 하나씩 알아 가면서 마련하면 될 뿐이라는 생각이었을까요.
열한 해 앞서 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봅니다. 그무렵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총장님께서 뒤에서 저지른 비리가 말썽이 되어 날이면 날마다 대자보가 춤을 추고 집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달에 걸친 집회와 싸움은 가끔 일간신문에 실리기도 했고, 끝내 말썽 많은 총장을 물러나게 하고, 당신이 저지른 잘못과 앞으로 이 대학교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들을 동판에 새겨 도서관 앞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몇 해쯤 지나고 나니 모두들 이때 일을 잊어버렸고, 이때 학교에서 쫓겨난 분은 교육부장관 자리를 한동안 맡기도 했습니다. 도서관 앞에 세웠던 동판은 소리 소문 없이 어느 날 깨끗이 사라졌고, 후배들 어느 누구도 사라진 동판을 알지 못할 뿐더러, 열한 해 앞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한창 집회를 하고 수업거부까지 하며 강의실 걸상을 모조리 건물 밖이나 운동장에 쌓아 두고 있던 그때, 그 사진학과 강사(이제는 정교수가 됨)는 우리들한테 큰소리를 쳤습니다. ‘너희 대학교 총장 비리 문제는 잘 알고 있다. 나도 너희들 뜻하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집회는 너희가 밖에서 알아서 하고, 내 수업은 내 수업이니까 내 수업을 안 듣겠다고 거부할 권리가 없다. 나는 너희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두 시간짜리 수업이었는데 두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외치면서 수업을 하겠다고 버티었고, 그날 하루는 끝내 ‘해야 할 수업을 못했’습니다.
이때 저는 강의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창문에 붙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아쉽게도 이때 찍은 필름은 잃어버렸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실랑이를 사진으로 담으며 조금 우쭐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실랑이나 이런 사진찍기는 오래도록 앙금으로 남아 뒷맛이 하나도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일까. 왜 그날 그 수업을 굳이 꼭 하겠다던 그 시간강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는 그때처럼은 안 하겠지요. 그무렵 우리한테 조금 더 넉넉하고 느긋한 마음이 있었다면, “선생님,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학교 총장 비리 말썽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모든 학과 모든 수업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마지막 길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수업을 안 듣기란 참 힘들고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의실 수업이 아닌 길거리 수업이나 운동장 수업, 또는 다른 데에 가서 사람들이 안 보는 자리에서 우리 수업을 조용히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건네면서 타협을 볼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사진가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것은 사진에 자신의 인생과 사진을 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 사진 찍기 때문이다. 사진에 자기 이야기를 담고 사진으로 세상 이야기를 나누려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내가 있기에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내가 보기에 한국 사진의 가장 큰 문제는 사진이 사람들의 삶과 생활과 한데 어우러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따로, 작품 따로, 이런 식으로 겉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 (184, 186쪽)
사진을 찍으며 늘 느끼고 배웁니다만,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델을 써서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한다 해서 우리 생각과 느낌을 환히 담아낼 사진을 얻지는 못합니다. 살아가는 흐름을 거슬러서는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없습니다. 찍히는 사람이나 건물이나 풍경 앞에서 우악스럽게 군다 해서 이들이 제 모습을 오롯이 우리한테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든 사람은 늘 기다려야 하고, 뛰어들어야 하며, 어깨동무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흐름을 우리 스스로 고이 헤아리면서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좋은 사진을 찍는 바탕을 마련합니다. 이런 바탕을 마련한 다음 더 오랫동안 곰삭이고 껴안으면서 시나브로 좋은 사진 한 장을 찍습니다.
그때나 이때나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잘 찍는 솜씨를 굳이 대학교를 다니면서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교실을 다닌다든지 사진강좌를 들을 때에도 사진 잘 찍는 이야기를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다루는 우리 매무새를 배워야 합니다. 사진을 다루는 매무새는 우리가 살아가는 매무새하고 같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진기를 쥔 우리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학교나 강좌에서 듣고 배워야 합니다. 사진기를 쥔 마음은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마음하고 같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마음은 내 사랑하는 사람 손을 어루만지는 마음하고 같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2) 사진이야기 《사진으로 생활하기》라는 책
사진을 좋아하던 최광호 님은 어느새 사진을 배우려고 나라밖을 떠도는 사람으로 지냈고, 나라밖을 떠돌다 돌아온 한국땅에서 제 사진길을 꿋꿋이 가다가 젊은이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섰습니다. 사진책 몇 권을 펴내기도 한 최광호 님은 ‘사진이 아닌 말’로 당신이 걸어온 사진길이 무엇이고 당신이 찍은 사진작품이란 무엇이며 당신이 붙잡은 사진기하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조곤조곤 풀어 놓습니다.
.. 그 당시 여의도에서는 반공궐기대회가 자주 열렸다. 기독교인들은 교인들대로 모여 하느님과 예수를 찬양한다고 하면서 반공을 앞세우는가 하면, 군인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여의도에서 마포 지나 종로로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다.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나는 거기에 물들지 않을 나다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고민했고, 내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자 전국을 방황하기도 했다. 사진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 나를 갈구했던 것이다 … 나는 일본에서의 생활이 사진가로서 최상의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멋있는 사람, 멋있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가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우리 나라에는 훌륭한 작품은 있는데 인생이 담긴 훌륭한 작가는 없다고. 그런데 일본에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사진가다운 삶의 방식이 드러나는 개성 있는 작가들이 많다고 .. (23, 93∼94쪽)
사진쟁이 최광호, 또는 사진학과 교수 최광호 님이 쓴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읽어 보면, 맨 마음으로 쓴 글과 함께 술 한잔 걸치며 쓴 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최광호 님은 맨 마음인 채로 사진을 찍는 날이 있을 테며 술을 걸친 채 사진을 찍는 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맨 마음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날이 있었을 테며, 술기운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던 날이 있었겠지요.
어느 때 어떻게 찍었든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잘 찍었건 못 찍었건, 찍힌 모습 그대로 이야기를 남깁니다. 찍은 모양새 그대로 이야기를 건넵니다. 배부른 사람은 배부른 이야기를 남기고, 배고픈 사람은 배고픈 이야기를 남깁니다. 사랑이 철철 넘치는 사람은 사랑이 철철 넘치는 사랑을 사진에 담고, 사랑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가슴으로 지내는 사람은 사랑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가슴 그대로 사진에 제 느낌을 담습니다.
감추려 한다면 얼핏설핏 감출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감추면서 내보이는 작품이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농사꾼 밀레가 추운 겨울날 손이 덜덜 떨리고 얼어붙는 가운데 주린 배를 붙잡고 그린 그림에 밀레가 겪은 가난함이 안 배어 있을 수 없습니다. 외로움과 괴로움을 죽는 날까지 붙잡는 가운데 빛줄기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고흐 형제가 두 사람 힘으로 이루어 낸 그림에 둘이 겪은 외로움과 괴로움에다가 빛줄기가 안 담겨 있을 수 없습니다. 목숨을 바쳐 일구어 내어 목숨이 다해 세상을 떠난 최명희 님 작품 《혼불》에 최명희 님을 비롯한 둘레 사람들 넋과 삶결이 안 스며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생활하기》에는 사진하고 서른 해 남짓 살아가고 있는 최광호 님 온몸과 온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랑도 담기고 믿음도 담기며 미움과 아픔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그리움이 깃들고 아련함이 깃들며 애틋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 그러나 돈 많은 사람들이 돈벌 욕심에 돈, 돈, 돈, 하지 가난은 오히려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든다 …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자신있게 살 때만이 이 모든 것은 가능하고, 부족하기에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돈이 부족하면 생활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돈 없는 불편함을 극복하는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이 필요할 뿐이다 … 가끔 아마추어들이 촬영하는 장소에 가 보면 사진기를 보물 다루듯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사진기 망가질 것이 겁나서 저렇게 소중하게 다루면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 사진기에 사람이 눌려 있음을 느낄 때,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 .. (35, 245쪽)
지난달에,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공씨책방〉에서 《환희와 우정》(조선일보사,1988)이라는 사진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틀림없이 예전에도 곧잘 만났을 사진책이 아닌가 싶은데 여태까지는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 눈에 살며시 들어왔더라도 제 손은 가 닿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이런 겉치레 사진책이 무슨 사진책이라고?’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꾀한 움직임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 그늘진 자리를 감추는 이 같은 사진책은 더없이 씁쓸하고 안타깝다고 느끼면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같은 사진책을 즐겁게 만지작거립니다. 무슨 꿍꿍이셈이 있든 없든, 사진은 사진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사진에 새겨 놓은 꿍꿍이셈은 이러한 셈속대로 읽어내면서, 나 스스로는 꿍꿍이셈이 아닌 참사랑과 참믿음을 보여주거나 나눌 수 있도록 참삶을 가꾸며 참사진을 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올봄, 서울 봉천동(올해부터인가 ‘낙성대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봉천동’이라는 이름은 가난하다는 느낌이 사람들한테 콱 박혀 있다고 하면서)에 있는 헌책방 〈흙서점〉에서 《박상원-a monologue》(에디션 뿔,2009)라고 하는 사진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연기를 하는 박상원 님이 사진책을 펴냈다고 하니 뜻밖이면서 놀랐습니다. 펴낸 곳은 ‘웅진출판사 임프린트’라고 하는 곳입니다.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 보면서, ‘이분은 이런 사진을 좋아하며 찍는구나’ 하고 느끼는 가운데, ‘이와 같은 사진이 이렇게 좋은 꾸밈새로 세상에 또 하나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 하는 틀로 따져서 이 책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이만한 사진이 아니고서는 사진책으로 내 주기 어려운 우리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받아들이는 ‘다 다름(다양성)’이란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졌고, 우리 세상에서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왜 사진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은 사진을 왜 나누고 싶어서 사진을 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 구경꾼의 눈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남을 통해 자기 삶을 느낄 수 있기는 하나, 자신의 외로움과 자신의 이야기는 표현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의 삶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자신의 외로움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 (236쪽)
올 1월에는 서울 동묘앞에 있는 헌책방 〈영광서점〉에서 1960년대 첫머리 국민학교 졸업사진책을 세 권 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두 권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국민학교 것인데, 파주에 있던 국민학교는 1960년대에 ‘수학여행을 인천으로 왔’습니다. 이 자취가 졸업사진책 뒤쪽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950년대 끝무렵에 ‘각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공원으로 나들이를 하면서 멕아더동상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몇 해 뒤에는 수봉공원으로 옮겨갔지만 이맘때까지는 자유공원에 놀이기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유공원에서 멕아더동상 앞에 서면서 묵념을 하고 놀이기구를 타면서 신나게 놀았다고 할까요. 그 다음에는 연안부두나 만석부두나 월미도 쪽으로 가서 배를 탑니다. 경기도 파주라면 뭍만 있는 땅이요 산과 들밖에 없을 테니, 인천 앞바다처럼 놀이기구에 ‘반공교육 하기 좋은 멕아더동상’에다가, 여기에 갯벌에 바다에 배까지 고루 있는 곳은 수학여행을 보내기에 딱 어울릴 만한 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이 졸업사진책을 뒤적이면서 제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젊은 나날을 보내던 인천 한구석을 조용히 돌아보았습니다. 벌써 예닐곱 달이 된 이야기이지만, 이 졸업사진책을 만나던 그날은 헌책방 골마루 한쪽에 선 채로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이 졸업사진책은 그날 장만한 뒤로 여태껏 제 책상맡에 놓고는 가끔 들추어 봅니다. 들추어 보고 다시 덮을 때마다 ‘사진은 뭘까? 내 사진은 뭘까?’ 하고 거듭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을 사진으로는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말로 설명하는 사진이 아닌 신선한 느낌이 살아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일상 생활에 대한 감동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변 현실을 보며 감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감동할 줄 알아야 한다. 매일 보던 사물을 새롭게 볼 줄 아는 시선을 갖추어야 한다 … 좋은 앵글이란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가장 잘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 시각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 (270쪽)
《사진으로 생활하기》는 지난해 여름에 장만했습니다.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에서 장만하던 그날부터 즐겁게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조금조금 뜯어먹으며 읽던 지난 겨울날, 살림집 물이 얼어붙었다가 녹았는데, 물이 녹으면서 그만 수도꼭지가 터져 부엌이며 마루며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 책은 물바다에서 옴팡 젖어 버렸습니다. 물바다가 된 날 꽤 많은 책이 젖거나 퉁퉁 불어 못 쓰게 되었는데, 《사진으로 생활하기》는 그나마 아주 버리지는 않았고, 책장을 하나하나 닦아내고 며칠에 걸쳐 말리니 그럭저럭 넘길 만큼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바다를 치르며 적잖은 책을 버리게 되니, 젖었다가 살아난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넘기기 싫어졌습니다. 다른 다친 책들과 망가진 책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더군요.
그렇게 반 해쯤 한쪽 구석에 팽개치듯 꽂아 놓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지난달쯤, 도서관에 나들이를 온 어느 분이 이 ‘물 먹고 퉁퉁 불어터진 책’을 애틋하게 여기면서 두어 시간 동안 이 책 하나만 읽고 돌아가더군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말끔하고 깨끗하고 번듯한 책이 가득가득 있는데 어쩜 저 책 하나만 그리 알뜰하게 여기면서 들여다본담?’
손님이 돌아가고 난 뒤 퍽 오랜만에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끄집어 냅니다. 끄집어 내는 바로 이때, 지난겨울 물바다가 떠오르고, 그날 버리게 된 아까운 책들이 떠오릅니다.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렵다고 할 책들을 눈물과 함께 떠나보낸 일이 새록새록 가슴을 쑤십니다. 그러나, 떠나간 책을 놓고 아파할 수만은 없습니다. 살아남은 이 책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등돌린 채 지낼 수 없습니다.
지난해에 읽다가 만 대목을 찬찬히 훑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은 두 번씩 읽고, 밑줄을 안 그었던 몸글은 천천히 읽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전철길에 금세 다 읽어냅니다. 이제 책을 덮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을 차례입니다. 며칠쯤 더 책상맡에 올려놓고 있은 다음 책꽂이에 꽂아 놓을 생각인데, 아무래도 저한테는 이 책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그날 그렇게 물바다에서 반쯤 죽다가 살아나 주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곰곰이 되읽으면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난해에 다 읽었다면 더 좋았을는지 모르나, 이제 와서 다 끝마치니 한결 낫지 않느냐 싶습니다. 마침, 사진기며 렌즈며 여러모로 말썽을 부리는 요즈음, 값싼 장비를 붙잡고 사진길을 어떻게 이어가면 좋을까를 놓고 걱정인 요즈음, 다른 어느 책보다 이 책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저한테 좋은 길잡이나 이슬떨이, 아니 길동무나 사진동무가 되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최광호 님은 “사진으로 생활하기”이고, 저는 “사진으로 살아가기”입니다. 사진쟁이자 사진학과 교수님으로서는 한자말 ‘생활’을 넣고, 우리 말 지킴이로 살아가는 저로서는 토박이말 ‘살아가기’를 넣습니다. 아마 어느 분은 ‘life’나 ‘living’이라는 말마디를 넣어서 “사진 삶”을 가꿀 수 있겠지요. 어느 이름이든 우리가 걷는 길은 사진길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우리가 이루려는 삶은 사진삶입니다. 어느 갈래 사진길을 걸으며 어떤 모습 사진삶을 일구든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사진밭입니다. (4342.8.23.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