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감독 김기덕 -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마르타 쿠를랏 지음, 조영학 옮김 / 가쎄(GASSE)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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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감독’ 김기덕 이야기를 아르헨티나 작가가 썼네
 [잠깐 읽기 52] 마르타 쿠를랏, 《나쁜 감독》



- 책이름 :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 글 : 마르타 쿠를랏
- 옮긴이 : 조영학
- 펴낸곳 : 가쎄 (2009.6.29.)
- 책값 : 9000원



 (1) ‘거북하게’ 이끄는 영화들


 〈어느 날 그 길에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길에서 죽는 짐승 이야기를 하나하나 좇아다니면서 담아낸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앞서도 길에서 죽는 짐승을 숱하게 보고 느끼고 알고 있었으며,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길에서 죽는 짐승을 바라보는 이웃사람 눈길을 새삼스레 느끼거나 깨닫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당신 삶을 바꾸었는지 모르나, 도심지이든 시골길이든 고속도로이든 자동차 빠르기를 5킬로미터나마 줄이려고 애쓴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예 자동차를 버리겠다고 외치는 사람을 찾아보지는 못합니다.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우리한테 ‘자동차를 멀리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길에서 짐승을 치여 죽이는 사람들이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길에서 차에 치여 죽는 짐승을 놓고 마냥 ‘불쌍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죽음을 보여주고 죽임을 보여줍니다. 그예 앞으로도 죽음과 죽임이 끝없이 이어지도록 하려는 이 나라 공무원들 매무새를 보여줍니다. 이 나라 공무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여느 사람들 모습’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 하나의 이미지가 수천 개의 단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 글에서 〈악어〉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소개하기 위해 우선 그와 관련된 피상적인 플롯만 소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윗글에서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폭력은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이고, 그로 인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여성들은 실제로 그 저변에 깔린 개인적, 사회적 메타포들을 읽지 못했다. 그저 스크린 밖의 그들을 노려보는 야만성과 타락상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다 … 다른 한편, 침묵도 언어라는 개념은 보수적인 언어학자들을 펄쩍 뛰게 만들지는 몰라도 어쨌든 진실 중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침묵은 빈칸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화자에게 허용된 의미 모두를 함축한 백과사전에 가깝다. 의미를 선택하는 건 온전히 대화를 하고 있는 상대방의 몫이 되며, 두 사람이 동일한 주파수를 공유할 경우에만 소통이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 소통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 언어는 오해 또는 소통의 부재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시간〉의 일부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에서 침대에 누운 두 연인의 대화는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들이 마침내 (언어의 한계 밖에서) 소통을 이루게 된 건 바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침묵이 이어지고 난 후였다 ..  (39, 47쪽)


 여러 해 앞서 〈고추 말리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았거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이 영화를 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곧 문을 닫고 사라진다는 ‘아트큐브’인가요? 이곳에 조용히 걸리고 그야말로 조용히 보여진 영화 〈고추 말리기〉는 아파트 옥상에서 고추를 말리려는 어머니 심부름을 따르는 ‘시집 안 가고 영화 찍는다며 깝죽댄다는 딸내미(감독 스스로)’ 이야기를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영화이름 그대로 고추를 말리는 모습이 나오고, 주인공 딸내미가 식구들하고 복닥이면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목소리는 없습니다. 다른 어떤 주제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한국땅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삶을 꾸리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가를 수수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길에서〉나 〈고추 말리기〉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을 ‘번거롭게’ 하거나 ‘거북하게’ 한다고 합니다. 자꾸자꾸 무엇인가 생각하도록 하고 돌아보도록 하며 곱씹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달갑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계몽’이니 ‘교훈’이니 또 무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 여성 비평가들은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자 평론가들은 아예 무시해 버린다 … 이런 식의 잔혹함은 관객들을 괴롭히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결국 디즈니월드와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단의 거짓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크린의 장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라면 아무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고문하거나 살해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화면에 대해 얼마든지 관용을 베풀 수 있다. 다른 한편, 구타와 강간 등 일상적인 형식의 폭력과 가슴을 찢어내는 미묘한 심리적 고문은 관용의 수준을 현저하게 끌어내리게 된다. 직접 이런 식의 폭력을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약간의 상황변화만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이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관객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자신의 자아가 행사하거나 당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대한 잠재의식적 공포는 리얼리티에 가까운 폭력형태에 대해 절대적인 반감을 유발하게 된다 … 물론 일반적으로 영화팬들은 여가를 즐기고 고민을 달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때문에 쓰라린 심장과 잔뜩 꼬인 머리로 영화관을 떠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다. 관객들은 수저로 떠먹여 주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김기덕은 깊은 사고를 자극하는 노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  (42, 68, 69쪽)


 저한테는 비디오가 없고 텔레비전 또한 없어 다시 보기 쉽지 않지만, 제가 퍽 여러 차례 본 영화로 〈안드레아스 라인〉이라는 네덜란드 영화가 있습니다. 네 번쯤 보았다고 떠올리는데, 볼 때마다 늘 사람들이 북적북적했습니다. 언제나 무슨 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드레아스 라인〉을 ‘안 잘린 판’으로도 보았고 ‘잘린 판’으로도 보았습니다만, 여러 차례 보아도 질리지 않고 나중에 다시 보고프다고 생각했습니다. 좀더 나이가 들고 내 삶이 다른 자리에 들어섰을 때 새롭게 보고프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 아이를 키우는 애 아빠 자리에 있는 만큼 요즈음 다시 〈안드레아스 라인〉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를 같이 보던 적잖은 사람들은 졸거나 자거나 딴청을 피우거나 나가 버리거나 하기 일쑤였는데, 저는 한결같이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한 대목 두 대목 찬찬히 곱씹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숱하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학자 같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고 싶어 계집아이가 일부러 그네에서 손을 놓고 바닥에 쿵 떨어지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찔끔 나왔고, 차츰 크기가 커지는 공동체 식구들 밥차림과 왁자지껄 수다 떠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그러나, 좋은 ‘씨’를 받으려고 남자를 꼬드기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싱긋 나오고, 화면을 넷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사랑을 불태우는 대목에서도 웃음이 히죽 나왔습니다.


.. 어쩌면 그도 시나리오, 촬영, 편집이 모두 끝난 후에야 겨우 해답을 얻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그건 그의 개인적 해답이고, 그걸 관중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 관객들도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해 내거나 아니면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으면 그만이다 … 더 좋은 선택은 영화를 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화면과 스크린에 펼쳐진 계절의 변화는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주변 환경에 대한 김기덕의 관심은 빈틈없는 관찰력과 더불어, 감수성보다 지성이 발달한 사람들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해 주었다 … 그는 다른 감독들이 모교의 배지를 가슴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영화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때문에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  (49, 64, 88, 91쪽)


 영화 〈집으로〉를 볼 때처럼, 영화 〈선생 김봉두〉를 볼 때에도 ‘영화에 그려지는 마을 모습’에 오래도록 눈이 멎었습니다. 〈선생 김봉두〉가 그리 잘 찍은 영화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저로서는 강원도 동강 둘레에 문닫은 작은 학교를 바탕으로 찍어 놓아 ‘작은 학교 삶터와 삶매무새’가 고스란히 사라지거나 잊혀지기 앞서 이렇게 하나 남겨 놓은 대목이 참 반가웠습니다. 2010년이나 2020년에도 〈선생 김봉두〉 같은 영화야 얼마든지 찍을 수 있지만, ‘강원도 동강 둘레 맑고 파란 하늘빛과 물빛’은 이 영화를 찍던 지난날만큼 싱그러이 되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책상서랍 속의 동화〉라든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드넓은 산마을과 자연을 보면서 속울음을 삼켰고, 우리 집 아이한테는 이제 더 보여줄 수 없는 깨끔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자꾸만 삭여야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 나라 자연 터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끔찍한 물질소비문명이 언제쯤 끝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나마 이 모습이 살아남아 준다면, 우리 아이가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 이 영화에 나오는 저 하늘빛은 뻥 아냐? 거짓말 아냐? 꾸민 그림 아냐? 뽀샵질로 만들지 않았어?’ 하고 물을는지 모르겠지만, …….


.. 서구 사회에서라면 계급이동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다. 인도의 카스트에 버금갈 정도로 엄격한 계급체계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결국 감옥이나 시체실에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식의 악순환의 저주에 시달리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  (50쪽)


 홀로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옆지기와 나란히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그리고 이제는 아기를 안거나 이끌고 골목마실을 하면서 사진을 찍을 때, 마음속으로 숱하게 되뇝니다. 저는 제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동네를 이 모습 그대로 담아낼 뿐이라고. 더 잘난 모습도 아니요 더 못난 모습도 아닌, 그저 이 모습 그대로를 담아낼 뿐이라고.

 꽃그릇을 마련해 꽃씨를 심었으니, 이제 막 움이 틀 때부터 줄기가 오르고 잎이 돋으며 꽃이 피고 열매 맺고 씨가 떨어질 때까지 한 해 내내 끊임없이 담아냅니다. 볕 좋은 날 빨래가 나부끼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따로 동네 할매 할배를 불러 앉히고 얼굴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골목마다 놓인 걸상과 평상을 담으면서 할매 할배 손길과 손끝을 느끼도록 합니다. 나무문패를 쓰다듬으면서, 나무전봇대를 어루만지면서, 나무로 짠 대문을 쓸어 보면서, 한 동네에서 오래도록 뿌리내린 사람들 발자취를 더듬습니다.

 뒷날 우리 아이가 이 동네에서 살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또 뒷날 우리 아이가 제가 태어나 자란 동네 모습을 떠올리고 싶어할는지 모르지만, 아비 된 사람으로서 할 몫이라면 이 동네가 더는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힘쓰면서 오늘 모습을 차근차근 담는 데에 있다고 느낍니다.


 (2) 김기덕 감독 영화를 생각한다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라는 긴 이름으로, 줄여서 《나쁜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김기독 감독 한삶을 다룬 책 하나가 조그맣게 나왔습니다. 책은 그야말로 조그맣습니다. 2/3쯤이 몸글이고 1/3쯤은 글쓴이 ‘마르타 쿠를랏’ 님이 김기덕 감독과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김기덕은 인간의 조건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82쪽)”는 이야기를 적바림한 마르타 쿠를랏 님은 아르헨티나사람입니다. 아르헨티나에 김기덕 감독 영화가 걸리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데, 이이는 김기덕 감독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서 보고 생각하고 곱씹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주 많은 한국 ‘영화관 손님’은 못마땅해 하거나 거북해 하거나 몸둘 바를 몰라 하거나 손가락질을 하거나 등을 돌리지만, 한국 아닌 나라에서는 여러모로 섬기고 이야기하며 차근차근 파헤치기까지 하는 김기덕 감독 영화가 참말 무엇을 보여주거나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있는 그대로 나누려고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교수인 마르타 쿠를랏 님은 조곤조곤 생각주머니를 펼칩니다.


.. (김기덕) “프랑스에만 있었던 게 아니고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을 다 다녔고, 많은 그림과 조각 사진을 보았고, 그 모든 게 저의 영화 작업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미술관의 작품보다는 거리의 동상이나 과거의 흔적들이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 “저는 영화로 철학자나 권력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며 이해하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결국 초월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만드는 시간 동안 너무나 고통스럽고 슬프며 행복합니다.” ..  (30, 44쪽)


 책을 읽으며 헤아려 보니, 제가 본 김기덕 감독 영화는 몇 가지 없습니다. 〈수취인불명〉하고 〈파란 대문〉쯤? 둘 모두 누구 작품인지 모르면서 보았고, 〈파란 대문〉을 보고 난 다음에는 ‘이 잘 찍은 영화를 잘 읽어낼 사람은 거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영화관 손님’뿐 아니라 ‘책읽는 사람’들도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꺼립니다.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놓고 ‘교훈적’이라느니 ‘계몽적’이라느니 하는 꼬리말을 달아 놓으면서 깎아내리기 일쑤입니다. 재미가 있으면 재미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고, 나를 가르쳐 주면 넉넉히 배우면 될 텐데, 재미를 재미 그대로 못 느끼는 가운데 가르침은 가르침 그대로 못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우리 삶에서 어느 하루 어느 누구한테고 서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는 일이 없건만, 영화와 책에서만큼은 ‘저눔이 날 가르치려 들어? 건방지게?’ 하고 생각해 버립니다.


.. (김기덕) “가족들은 생계비를 벌지 못할까 봐 내가 시나리오 쓰는 것을 반대했고, 저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거리에서 타자기를 안고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사람들이 대학 나온 사람들도 못하는 것을 한다고 포기하라고 한 적도 많습니다.” … “이제 저는 다수가 행복한 것보다, 한 나라가 행복한 것보다, 어떤 집단이 행복한 것보다 개인이 자유롭고 행복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 행복은 물질적 만족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 “인정받지 못했다고 제가 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 단단하게 제 생각을 고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34∼35, 79, 97쪽)


 《나쁜 감독》을 읽다 보니, 김기덕이라고 하는 영화감독은 고작 ‘국졸’이고, 영화판에 따로 선후배나 스승이라 할 만한 줄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 때문에 찬밥이나 미운털이지는 않을 테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많이 배우고, 너무 많은 가방끈을 움켜쥐고 있느’라 영화이고 책이고 사람이고 삶이고 스스럼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매무새를 스스로 놓쳐 버리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머리속에 어떤 지식으로 가득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지식이 들어서지 못합니다. 머리속이 텅 비어 있어도 아무런 지식이 뿌리내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 머리에 자질구레한 지식을 꽉 채워 놓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살갑고 넉넉하게 껴안지 못합니다. 또는, 우리 머리에 아무런 생각을 담아 놓지 않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깊고 너르게 살펴보거나 헤아리는 품이 없습니다.

 꽉 차서 야무진 듯 보이지만 갑갑하게 꽉 막혀 있는 셈이고, 확 트이거나 열린 듯 보이지만 썰렁하게 메말라 있는 셈입니다.


.. (김기덕) “저는 제 영화에 꼭 맞는 배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제 시나리오를 이해하고 시간이 맞는다면 가능합니다. 유명한 배우가 출연해서 영화가 잘되는 것보다 그 배우가 누구인지 모르고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보는 게 저는 더 중요합니다.” … “저의 가장 큰 스승은 자연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지루하게 유럽 영화사를 외웠다면 다른 감독들과 다름없거나 감독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그냥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게 참 행복합니다.” ..  (54, 87쪽)


 다만, 김기덕 감독 영화가 빈틈없이 잘 짜이거나 훌륭하게 잘 엮이기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는 잘 짜이거나 엮였다 할지라도 앞으로도 잘 짜거나 엮을지는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저, 김기덕 감독은 김기덕 감독대로 온힘을 다해 당신 영화를 알뜰살뜰 일구어 선보이면 될 뿐입니다. ‘영화관 손님’은 영화관 손님대로, 영화관에 가는 까닭이 ‘영화를 보고 싶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 때우기를 하러 가는 영화관입니까. 사랑놀이를 하려고 가는 영화관입니까.

 뭐, 사람에 따라, 또 때에 따라 시간을 때우거나 사랑놀이를 하려고 영화관에 마실을 갈 수 있어요. 언제나 어디서나 자유란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관이 시간만 때우러 가는 곳은 아니요, 책방이나 도서관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러만 가는 곳은 아닙니다. 책을 보러 가면서 책 하나로 마음밥을 얻도록 하자는 책방입니다. 영화를 보러 가면서 영화 하나로 내 삶밥을 곱씹도록 하자는 영화관입니다. (4342.8.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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