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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짐
정상명 지음 / 이루 / 2009년 5월
평점 :
고작 ‘샐러리맨’이 꿈인 사람들한테 꽃 한 송이를
[잠깐 읽기 40] 정상명, 《꽃짐》
- 책이름 : 꽃짐
- 글ㆍ그림 : 정상명
- 펴낸곳 : 이루 (2009.5.25.)
- 책값 : 1만 원
(1) 아픔이 낳은 풀꽃세상
1999년에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모임인 ‘풀꽃세상’을 연 정상명 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처음부터 환경과 생태에 깊이 뜻이나 마음이나 눈길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고 느낍니다. 다만 한 가지, 어릴 때부터 딱히 ‘환경과 생태를 거슬러’ 살아오지 않았을 뿐이요, 이런 매무새가 큰 아픔을 겪으면서 ‘풀꽃세상’ 모임으로 모두어졌지 않을까 싶습니다.
.. 논물 대기 공사 도중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앵두 할머니와 앵두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슬그머니 발치에 핀 민들레 꽃대 하나를 꺾으시더니 손을 보신 후에 말없이 할머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할머니 역시 별 말씀 없이 꽃대를 받고는 곧장 입으로 가져가셨습니다. 저는 ‘민들레에 무슨 특별한 맛이 있어 그러시나 보다’ 했습니다. 제 추축은 틀렸습니다. 할머니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꽃대를 잡고는 피리를 부는 것이었습니다 .. (48∼49쪽)
정상명 님 딸아이 천초영 씨가 어머니인 당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아이는 갑작스레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정상명 님 딸아이가 튼튼하게 살아 있었어도 어머니께서는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모임을 열 수 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정상명 님 따님이 싱그럽고 아름다이 살아가고 있었어도 어머니께서는 환경과 생태를 걱정하는 모임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곱씹어 봅니다.
살아 있었다면 함께 모임을 열어 꾸렸을는지 모릅니다. 살아 있었다면 그런 모임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알콩달콩 오순도순 살아가는 데에만 마음을 쏟았는지 모릅니다.
기쁨이 꼭 기쁨이지만은 않다고 느낍니다. 슬픔이 반드시 슬픔이지만은 않다고 느낍니다.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는 일이 흔하다고 느낍니다. 기쁨을 더 큰 기쁨이 되도록 북돋우기도 하지만, 슬픔이 외려 기쁨이 되도록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고 부딪히고 깨지고 다치면서 좀더 튼튼히 걱정없이 즐겁게 타는 길을 익히듯, 무릎이 깨지고 어깨가 까지면서 내 자전거와 이웃 자전거를 한결 너그러이 헤아리듯, 아픔이라고 꼭 아픔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숱한 아이들한테 가장 큰 아픔이라면 대학입시에서 떨어지는 일이 될 텐데, 대학입시에서 쓴맛을 본다 하여 이 아이한테 낭떠러지만 있지 않아요. 쓴맛을 보기 때문에 더욱 달콤한 맛을 보는 앞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쓴맛에만 머물며 더 고달프고 괴로운 쓴맛에서 나뒹굴 수 있겠지요.
.. 아, 그 달콤하고 싱그러운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디 맛은 보라색’이라고 … 나무의 나이는 50년이 넘은 걸로 추정됩니다. 다른 나무와 달리 가래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잎사귀를 다 떨구어 지금처럼 온몸이 완벽히 드러나는 계절입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 아주머니 댁 복숭아는 특별히 맛있지는 않습니다. 딱딱한 편이고 당도도 좀 떨어집니다. 그러나 저는 언덕 위의 그 천막을 한 번 찜한 후로는 절대로 다른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제 마음을 ‘복숭아는 언덕 위의 그 천막집이다’로 정했으니 그렇게 하는 것뿐이지요. 저는 복숭아만을 먹는 게 아니고 복숭아 천막을 싸고도는 모든 풍경을 먹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51, 59, 79∼80쪽)
문득,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당신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 아이가 부모인 나보다 먼저 죽은 일을 슬퍼하면’서 이 슬픔을 이겨내고 삭여내고자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모임을 꾸릴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 옆지기가 옆지기 아버지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할 때에, ‘우리 아이한테 닥친 아픔을 견디어 내고자’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모임을 이끌 수 있을까 곱씹어 봅니다.
글쎄요. 어떠시려나.
모르는 노릇입니다. 자식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이 아니라도, 자식한테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이 아니어도,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밑바닥 시민모임 하나 꾸려 당신들 눈물과 웃음을 모두 쏟아부을는지 모르는 노릇입니다.
따지고 보면 남 일만은 아니거든요. 저와 옆지기한테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만, 저와 옆지기 또한 우리 어린 딸아이한테 어머니 아버지 된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마치 남 일처럼 ‘내가 아버지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머잖아 ‘우리 딸아이가 우리보다 먼저 죽으면?’ 하고 생각할 날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음악을 만든 적도, 스피커를 만든 적도, 나무를 만든 적도 없습니다. 바람도 푸른 하늘도 흰 구름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비로운 자연 속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누군가가 만든 좋은 것들을 듣고 즐깁니다. 세상을 밝히는 일에 먼지만큼도 보탠 게 없는 것만 같은데 ‘공짜’로 이 모든 것을 듣고 느낍니다 .. (70쪽)
엊그제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된 집을 장만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아직 우리한테 돈이 없어서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한다고 여길는지 모르나, 앞으로 우리한테 돈이 있게 되어도 집없는 사람으로 살림살이를 잇고 싶은 마음입니다. 집 하나 장만할 돈으로, 어쩌면 정상명 님이 했듯이 우리 깜냥껏 조그마한 시민모임을 열 수 있습니다. 집 하나 장만할 돈을 벌게 된다면, 이 돈으로 도서관 지킴이 한 사람을 두고 한 주 내내 도서관을 열어 놓고 알차게 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 하나 장만할 돈이 모였을 때에 집을 장만한다면 우리는 다른 어느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 집이 있다’로 끝납니다. ‘달삯 나갈 걱정’은 안 하지만, ‘목돈으로 더 널리 나눌 일’은 한 가지도 못하고 맙니다.
.. 사람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서 이름난 좋은 직장에 다니기를 소망합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렸을 때부터 엄청 시달립니다. 코흘리개를 겨우 면한 아이들에게 영어 과외를 시킨다, 영재 교육을 시킨다, 고액 과외를 시켜 좋은 대학에 보낸다, 난리입니다. 강남의 집값이 죽자고 오르는 이유가 좋은 학교가 몰려 있어서 거기 살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지요. 그리고 공부 잘해 좋은 대학 나와서 일류 기업에 취직을 하지요. 거칠게 말하면, 코흘리개부터 시작한 공부라는 게 겨우 샐러리맨 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걸 성공으로 여기는 우리 시대가 생각해 보면 너무나 초라합니다 .. (181쪽)
풀꽃세상 모임을 열고, 풀꽃평화연구소를 꾸리는 정상명 님이 펴낸 산문모음 《꽃짐》을 읽으면서, 조그마한 환경모임 ‘풀꽃세상’을 새삼 돌아봅니다. 정상명 님한테는 더없는 아픔이 있어 시민모임을 열 슬기를 얻었다지만, 이러한 슬기를 얻었다 할지라도 여느 때부터 곧고 바른 생각과 몸짓으로 당신 삶을 엮어 오지 않았다면, 사뭇 다른 길을 걸었으리라고.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이 발판이 되어 크게 거듭나거나 달라지기도 한다지만, 마음속 한켠에 고운 풀씨 하나 깃들어 있지 않았다면 풀꽃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는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으리라고.
(2) 산문모음 《꽃짐》
산문모음 《꽃짐》을 읽습니다. 아이를 보며 책을 읽자니, 214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을 덮기까지 닷새가 걸립니다. 읽다가 덮고 기저귀를 갈고, 읽다가 덮으며 아기를 어르고, 읽다가 덮으면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
.. 저는 할머니가 빨래하시는 모습을 참 좋아했습니다 … 추억이니 그리움이니 하면서 항아리에 의미를 붙여 귀히 간직할 수도 있지만, 편안하게 무시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 무심함은 아마도 나이가 주는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 지금부터 30년 전에 충청도의 고요했던 소도시 대전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채송화니 분꽃이니 하는 꽃들이 어느 집에나 풍성했고 인구가 적어 거리는 늘 비어 있었는데, 이따금 짐을 한두 덩이 실은 말 달구지가 꿈결처럼 지나가던 곳. 목척교 아래에는 맑은 물이 흘러가고 냇가 한편에서는 양잿물을 넣은 커다란 무쇠솥이 걸려 있어 무럭무럭 솟아나는 김 속에서 옥양목 빨래들이 희디희게 삶아질 때 .. (86, 93, 205쪽)
산문모음 《꽃짐》을 덮으면서, ‘정상명 님은 글을 썩 잘 쓰는 분이 아니구나’ 하고 느낍니다. 좀 엉성하고 어설픕니다. 왜 이러한 글을 썼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심심한 글은 아니요, 시시한 글도 아닙니다.
수수한 이야기거리에서 수수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글입니다. 자그마한 글감에서 자그마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인 글입니다. 돋보이지 않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삶을 건드리는 글이요, 스스로 돋보이고자 하지 않는 자리에 선 한 사람으로서 제 삶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 결혼한 후 저희 집 아이들이 ‘국민학교’에 다닐 때도 날씨는 매우 추웠습니다. 너무 추운 날이면 애들을 학교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 강추위에 여리디여린 것들이 두 볼이 시퍼렇게 얼어터지면서까지 학교에 가서 배울 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지요 .. (108쪽)
책 겉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짐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되었습니다.” 하고 한 줄이 적혀 있습니다. 책이름 ‘꽃짐’이란 꽃송이가 짐이 되었다는 이야기일 테고, 정상명 님 당신한테 닥친 짐은 오래도록 부대끼고 지켜보고 돌아보는 동안 ‘쇳덩어리로 이루어진 짐이 아니라 꽃송이로 가득한 짐’이었다고 느꼈다는 소리이구나 싶어요.
그래, 짐입니다. 무겁다고만 보았던 짐입니다. 그런데, 짐이었습니다. 무겁지는 않았으나 그 무게란 킬로그램 숫자로 재는 짐이 아니라, 당신 마음밭을 건드리는 짐이었어요. 당신 정상명 님 마음밭이 얼마나 넉넉한지를 돌아보도록 하는 짐이었고, 당신 정상명 님이 앞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이웃하고 어울리고 너른 자연하고 어깨동무를 하면 좋은가 하고 깨닫도록 일깨우는 짐이었습니다.
.. 어떤 한 작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정신세계로 들어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단돈 몇 푼을 내고 ‘위대한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분들의 평생에 걸친 인간과 생에 대한 탐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 (118쪽)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산문모음 《꽃짐》은 밋밋합니다.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예쁜 말이나 그림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뽐내려 하지 않고, 동무와 이웃 등을 밟고 올라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모습 그대로 고이 앉아 있으려고 합니다. 그예 그 자리에 고스란히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
혼자 지려는 짐이 아니요, 남한테 들씌우는 짐이 아닙니다. 함께 짊어지자는 짐입니다. 함께 들고 가자는 짐입니다. 무거우니 함께 들자는 짐이 아니라, 가뿐하고 어여쁘기에 함께 들고 가자는 짐입니다. 싱그럽고 아름다우니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천천히 나누어 들고 가자는 짐입니다.
아무래도, 잘난 척하지 않는 꽃짐이 되자면, 또한 스스럼없는 꽃짐이 되자면, 글이 좀 못생겨야 할 테지요. 글이 좀 투박해야 할 테지요. 글이 좀 가벼워야 할 테지요. 더없이 풋풋하게 펼쳐진 들꽃 한 송이 같은 《꽃짐》입니다. (4342.6.19.쇠.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