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책 읽고, 놀고, 대학도 가고, 일석삼조 독서토론기
조원진.김양우 지음 / 삼인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책읽고 대학 갔다가, 책만 들고 대학 관두고
 [잠깐 읽기 37] 조원진+김양우,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책이름 :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글 : 조원진, 김양우
- 펴낸곳 : 삼인 (2009.4.20.)
- 책값 : 11000원


 (1) 책읽기와 대학교 가기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는 고등학생이던 때, 학교나 학원 동무인 여러 아이들이 ‘책을 읽고 느낌을 이야기로 나누자’는 데에 뜻을 맞추면서 열다섯 차례에 걸쳐 ‘독서토론’을 해 온 발자국을 담아낸 책입니다.

 따로 학교에서 교사가 이끌지 않은 ‘책읽기모임’이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이 꾸역꾸역 몰려든 동아리가 아닌 ‘책읽고 나누는 모임’이었습니다. 다만, 아이들은 열다섯 차례뿐 아니라 서른 차례이든 쉰 차례이든 얼마든지 ‘책읽고 나누고 함께하는 모임’으로 꾸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또는 마땅하게도 ‘책읽기모임’은 ‘논술모임’으로 바뀌었고, 아이들 스스로도 이렇게 가야 한다고 그럭저럭 느끼거나 받아들였습니다. 열다섯 차례에 걸쳐 스스로 모임을 꾸려 나가던 어느 날, 아이들한테 가뭄에 단비처럼 모임을 도와준 ‘어른’이 나타났거든요.


.. 사실 《제3의 물결》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우리 모임이 수준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이 책으로 토론을 하면서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려운 책만이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항상 내 관점만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독서토론을 하면서는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친구들과 서로 다른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법도 배웠다 ..  (32, 56쪽)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도움이 어른’은 아이들한테 더없이 좋은 길동무였을는지, 그지없이 반가운 이슬떨이였을는지.

 언제나 받아들이기 나름이므로, 아이들 스스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즐거이 함께하려 했다면 도움이 어른은 좋은 사람이고 고마운 길잡이입니다. 더구나, 아이들은 ‘책읽기모임’을, 티없는 마음으로 책을 사랑하는 줄기를 내 삶을 사랑하는 줄기로 잇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책읽기모임’을 하면서 ‘다가오는 대학입시에서 논술시험 대비도 잘할 수 있어 괜찮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스스로 도움이 어른을 바랄밖에 없었고, 스스로 얼마든지 ‘책읽기모임’을 꾸려 나갈 수 있었고, 또 열다섯 차례 꾸려 나가기까지 했지만, 스스로 이루어 온 열매와 보람에 어떤 뜻과 값이 담겨 있는가를 더 깊이 곰삭이고 깨닫고 되뇌기보다는, 가볍게 ‘대학교 잘 붙기’ 쪽으로 갑작스레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 토론이 진행될수록 저마다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게 됐다는 거다. 처음 멋모르고 독서토론을 시작할 때는 무서울 게 없었다. 어떤 개념을 모른다든지 지식이 부족하다는 데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고, 엉터리 같은 말이라고 거침없이 내뱉었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무지하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토론도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보다는 주제에 대한 발표 위주로 진행되었다 ..  (106쪽)


 딱하다면 딱한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를 쓰고 함께한 아이들만 딱한 노릇이 아닙니다. 그나마 이렇게 ‘책읽기모임’이라도 해 보겠다면서 ‘입시에 옴쭉달싹 못하도록 매인 껍질’을 벗어던지려고 하는 몸부림조차 안 하는 아이들이 거의 모두이니까요.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고, 그예 억누르는 틀에 맞춰 지내면서, 몰래몰래 ‘어른들 하는 짓’을 따라 담배도 태우고 술도 마시고 사랑놀이도 즐기면서 푸른날(청소년기)을 썩히고 있으니까요. 담배태우기와 술마시기와 사랑놀이가 나쁜 짓이 아니라, 왜 담배를 태우고 왜 술을 마시며 왜 사랑을 나누려 하는지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채, 그저 ‘어른 따라하기’로 치달을 뿐이니까요.

 학교에서는 시험만 잘 치르면 ‘착한 아이’가 됩니다. 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험을 잘 치르는 아이가 몹쓸 짓을 한다 해서 크게 꾸지람을 듣는 일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옆 짝꿍을 괴롭힌다든지 도둑질을 한다든지, 또는 청소 땡땡이를 친다든지 겉속이 다른 말을 한다든지, 애엄마나 늙어 힘든 사람을 뻔히 보면서도 안 돕는다든지, 새치기를 버젓이 한다든지, 쓰레기를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든지, 용돈이 넉넉해 군것질을 내키는 대로 한다든지, …… 타이르고 다독일 대목이 많다 하여도 ‘공부를 잘하는데요!’ 하면서 대충 얼버무리거나 잠자코 지나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시험성적이 좋은 아이는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이 아이를 때리는 교사는 몽둥이 세기가 달랐습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한테는 온힘을 다해 몽둥이질을 더 많이 했고, 공부 잘하는 아이한테는 살살 몽둥이질을 하는 데다가 몇 대 때리지도 않았습니다. 웬만한 잘못은 슬쩍 못 본 체하기도 했습니다. 담배 태우다 걸리는 동무들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뺨 한 대 맞고 풀려나는데, 공부 못하는 아이는 ‘너흰 임마, 수업 안 들어도 되잖아? 어차피 잘 텐데?’ 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장 돌 줍기에다가 툭하면 발로 엉덩이 걷어찬다든지 하면서 갖은 모욕을 주면서 괴롭히기만 했습니다.


.. 논술공부를 한다는 것, 또는 그와 비슷하게 입시의 맥락에서 독서나 토론을 한다는 것은 사실 특정한 문화의 산물이었고, 그 문화는 정확히 말하면 중산층 가족의 것이었다 … 이렇게 ‘권력을 지닌’ 언어를 익히는 과정에서 다른 언어들 내지 하위주체의 언어들이 추방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193쪽)


 따지고 보면,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라는 책 하나까지 이루어 낸 아이들은 퍽 남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제법 잘 나오는 아이들인 가운데, 집안 형편도 썩 괜찮았던(그러나 아주 넉넉하지는 않은) 아이들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그럭저럭 어중간이었다면, 또 집안 형편도 그리 낫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 아빠 엄마 되는 분들께서 ‘그래, 너희가 좋은 생각을 하는구나. 잘해 보렴!’ 하면서 북돋워 주거나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치지 않았겠다고 느낍니다. 하물며 학교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뭔가 ‘불량서클’을 ‘책읽기모임’이라는 이름을 입히면서 뻘짓거리 하지 않느냐고 눈을 번득이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되는 아이’에다가 ‘있는 아이’라는 ‘타고난 재주’가 있으니, ‘책읽기모임’을 내걸면서 입시논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로지 대학교 가기만을 바라고 있고 내몰고 있고 밀어붙이고 있거든요. 제아무리 착하고 얌전하고 바르고 상냥한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시험성적은 젬병이라면 ‘저 병신!’ 하고 깎아내리는 교사요 부모요 어른입니다. ‘그래, 좋은 사람이구나!’ 하면서 어깨를 쓰다듬고 손을 맞잡아 주지 못하는 교사요 부모요 어른입니다.

 교사든 부모든 어른이든 아이들 스스로 ‘책읽기모임’을 하든 ‘야구모임’을 하든 ‘연극모임’을 하든 ‘인터넷게임모임’을 하든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거들 일은 거들면서 기쁨과 슬픔을 아이들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맞부딪칠 수 있게끔 부드러운 울타리가 되어 주지 않습니다. 어른들부터 돈에 매이고 이름에 팔리고 힘에 끄달리는 삶이거든요. 어른들부터 옳지 않게 살아가면서 아이들한테도 옳지 않은 삶을 ‘현실은 이러하니 어쩔 수 없더라’ 하는 핑계로 감추어 놓고 있거든요.


..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과 함께 부대끼면서 배워 나가는 것임에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입시’가 가까워질수록 다른 삶들과 만날 기회는 점점 적어졌다 … 내가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  (210∼211쪽)


 이리하여,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는 조금도 대단한 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꼴이 이러하기 때문에 외려 대단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뒤죽박죽 엉키고 꼬이고 다투고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잔뜩 담긴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야말로 아이들 오늘날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힐 수밖에 없는 고등학교 삶자락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교육방송 교재’와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입시지옥 속알맹이를 더 깊이 파고들거나 파헤치는 눈썰미를 기르지 못해 겉핥기에 그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겉모습이나마 핥으면서 잘잘못을 깨닫는 눈썰미를 스스로 길러내려고 한 아이들은 얼마나 있습니까. 교사나 부모가 시키는 교과서 외우기와 논술대비를 벗어나, 스스로 ‘참답게 알고 싶다’는 마음외침을 따르면서 손수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골라드는 아이는 이 나라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빈틈없이 나올 수 없던 책이요, 처음부터 허술함 가득한 채 이루어질 수밖에 없던 ‘책읽기모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빈틈많음과 허술함이야말로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를 읽는 즐거움입니다. 이렇게 깨지고 까이고 넘어진 발자국이야말로 ‘앞으로 중고등학생인 나이에 스스로 책읽기모임을 꾸려 나가는 좋은 앞사람 보기’가 되어 주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2) 왜 관두지 못할까


.. 토론이 잘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일이 모두에게 처음일뿐더러, 어려운 책을 고르는 바람에 모두가 읽는 것조차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토론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에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60년대식 사고에 멈춰 있는 틀에 박힌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고, 모두에게 똑같은 것들을 암기시키는 식으로 수업을 한다. 우리는 그동안 10년을 학교에서 공부했으나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토론을 해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 무조건 풀고 답을 적기만 강요했던 수학이, 암기만 죽어라 했던 역사가 진짜 공부일까? 아무리 흥미 있는 내용이라도 문제 풀기나 암기에 치중해 공부하면 따분하고 지루해진다. 학생들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공부를 피해 수능을 준비하는 것이다 ..  (36, 109쪽)


 고등학생 아이들 네다섯이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가며 책을 읽으려고 아득바득 애쓰는 모습을 책으로 읽으면서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 나이였을 때에는 어떠했는가를 돌아봅니다.

 제가 책읽기에 눈을 뜬 때는 중학교 2년이고, 한 반에 《영웅문》을 교과서 뒤에 숨기고 읽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이 책이 좋은 책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리고 제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고 쓸데없는 시험지식 외우기 수업이 골이 난 저로서는 딱히 할 일도 없어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나 하고 있었는데, 그 교과서 밑에 책을 감추어 놓고 읽는 모습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제 뒤통수를 그지없이 후려갈겼습니다. ‘수업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구나!’ 하고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뭐 마땅히 읽을 만한 책이 우리 집에 없었고, 학교에서 어디 빌려 주는 데도 없습니다. 그래도 기껏 읽는답시고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300원 주고 빌려서 읽었습니다. 그런 다음 중학교 3년 때에는 얇은 ‘빨간 책(시사영어사에서 펴낸 영한대역본)’을 한 권에 1000원에 사서 읽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고 고2로 올라선 무렵, 바야흐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제가 입시를 치를 1993년 가을부터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뀐 틀에 맞추어야 했고, 제 또래는 수능뿐 아니라 논술도 맨 처음으로 치르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나중에 논술시험은 몇몇 대학교에서만 치르는 틀로 다시 달라졌습니다). 갈팡질팡 입시제도 때문에 갈피를 잡기 어려웠지만, 저로서는 한 가지 빛줄기를 보았으니, ‘외워서 잘 쓰는 시험문제 풀이에서 벗어나, 교과서 아닌 책도 읽고 생각하는 테두리를 넓힌다’고 하는 입시방침이라고 밝힌 대목입니다. 그래서, 중학교 2년 때부터 하던 ‘교과서 아닌 책’ 읽기를 마음놓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논술시험을 준비해야 했기에,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딱 두 사람만 ‘대학 독일어 논술시험’을 따로 준비해야 했는데, 학교에서는 ‘두 사람한테만 가르치자고 독일어 수업을 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 학교는 제2외국어로 버젓이 독일어를 가르쳤고, 수업도 한 주에 두 번 있었으나, 1학년 때에만 수업을 하고, 그 뒤 이태 동안은 국영수 보충수업과 다름없이 해 버렸습니다)’고 밝히며 우리 둘보고 학원에 가서 배우라고 내밀었습니다.

 대단히 엉뚱한 학교입니다만, 전교조도 없던(이제 막 꿈틀거리던) 때에 무슨 수업권이 있겠습니까. 하는 수 없이 인천에서 독일어를 어디에서 가르치느냐 알아보니 딱 한 군데 있었고, 그나마 그 학원에서도 독일어 수업은 고작 일곱 사람만 들었습니다. 학원강사는 당신 스스로도 우리를 가르치기 쉽지 않음을 느꼈을 텐데,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 독일어를 기본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니, 알맞춤한 교재가 딱히 없어, 당신이 예전부터 쓰던 교재를 장만해 오라 했는데, 그 교재는 인천 시내 어느 책방에서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마실을 가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도 갔으나 그곳에서조차 팔지 않았습니다.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더군요. 빈손으로 학원으로 가니, 학원강사는 우리 두 사람한테 ‘헌책방에는 갔느냐?’고 물었고, 안 가 보았다 하니, 헌책방도 안 가 보고 없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줄곧 입시에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아끼려고 발버둥쳤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공부해서 숨막히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잃는 게 많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못하면서,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소홀히 하면서 입시에만 매진하다 보니, 내 삶에서 내가 없어졌던 것이다 … 이 시대와 절대 발맞추지 않으려는 듯한 꽉 막힌 이야기도 (교과서에) 많이 실려 있어 공부하기가 무척 괴로웠다. 고리타분하고 뻔한 내용이어서 흥미가 일지도 않고 공부할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 뛰어난 인재들을 동원하면서도, 내용을 시대에 맞춰 더 개정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교과서를 무조건 암기하게 한다는 것이다 … 교실에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이 금기시된 듯한 느낌이었다 ..  (47, 92∼93쪽)


 이리하여 토요일 보충수업이 끝난 세 시 반에 부리나케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골목으로 갔고, 이곳에서 세 시간 남짓 뒤진 끝에 꼭 두 권을 찾아냈습니다. ‘있구나, 있어!’ 하면서 기뻐하는 가운데 책값을 치렀고, 책값을 치르고 나오려는데 책방 뒤쪽이 궁금해 슬쩍 돌아보다가, 헌책방에 ‘교과서와 교재 아닌 책’도 많이 갖추고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판이 끊어진 독일어 교재 하나 찾아낸 일은 기뻤지만, 이 기쁨을 잠재울 만큼 ‘뭐야? 헌책방은 이런 곳이었나? 난 이런 헌책방에서 고작 판끊어진 교재나부랭이나 찾는답시고 몇 시간을 헛되이 버렸나?’ 하고 생각하며 부끄러웠습니다.

 이날부터 제 책읽기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제 책읽기뿐 아니라 책을 읽는 매무새도 바뀌었고, 책을 읽으며 바라보는 세상도 바뀌었습니다. 여느 새책방에는 꽂혀 있지 않던 책을 헌책방에서 잔뜩 만났고, 교재와 부교재에는 대충 이름만 걸쳐 놓던 ‘시인과 소설가 작품집’이 얌전하게 꽂혀 있어 들뜬 마음으로 하나둘 장만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좋고 나쁨을 떠나, 통으로 책 하나를 살피면서 앞사람들 넋과 얼을 돌아보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ㄱ대학교 한국사학과를 꿈꾸면서, 고등학교 3년 때에는 일찌감치 그 ㄱ대학교 역사학과에서 교재로 삼는 역사책을 모두 읽어냈고, 그 대학교 교수들이 쓴 웬만한 역사책은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었습니다.


..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이다. 어째서 우리 나라의 많은 고등학생들은 스무 살이 가까워져서야 생각하기와 글쓰기를, 그것도 ‘입시를 위해서’라는 옹색한 이유로 해야만 하는 것일까 … 동시에 우리는 글쓰기 영역에서도 자유로운 글쓰기가 아닌 논술에 맞춘 글쓰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조차 우리는 별 무리 없이 수긍했다. 대학에 가야 한다는 절박함은 어찌 보면 쉽게 생길 법한 고민들을 없애 버렸다 …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로부터 이를 극복할 전망을 발견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나조차 중고등학교 내내 공부를 잘했지만 말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늘 ‘사탕’이 주어진다 ..  (140, 147, 161쪽)


 1993년 입시에서 저는 제가 바라던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바라던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로 바라던 곳을 다니며, 대학교가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다쳤습니다. 내 학생증은 복학생이었다가 졸업까지 했어도 일자리를 못 얻고 도서관을 헤매는 선배한테 선물로 남기고 그 대학교를 관뒀습니다. 이럴 바에는 고등학교부터 관뒀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속이 아팠으나,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고등학교를 때려치운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일찌감치 그만두었으면 내 삶이며 생각이며 더 단단하고 슬기롭게 다스리지 않았겠느냐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더 아름다운 제가 되었겠습니다마는, 얄궂고 어줍잖은 길을 어느 만큼 걷기도 한 탓에, 얄궂고 어줍잖은 길에서도 아픈 이웃이 있으며 아픈 이웃을 돕는 길을 생각할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거꾸로, 얄궂고 어줍잖은 길을 안 걸으면서 더 크고 너른 아름다움을 나눌 길을 찾았을 수 있는데, 스스로 잘잘못하고 맨몸으로 부딪히면서 까이고 차이고 넘어지고 얻어맞고 쫓겨나고 밟히고 하던 하루이틀이 제 몸을 한결 단단하게 갈고닦는 밑거름은 아니었을까 싶으며 고맙게 받아들입니다.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를 덮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이만큼 생각밭을 일구는 매무새라 한다면, 이 아이들 스스로 제 기득권을 얼마든지 내버리면서 아이들 꿈과 뜻에 튼튼한 날개를 달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대안학교도 많고 뜻있는 괜찮은 대안학교 교사도 많은 요즈음은 얼마든지 “책의 바다에 빠지는 노란잠수함”이 더 즐겁고 신나게 바다밑을 넘나들고 누빌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찌감치 ‘입시를 관두지 않았’고, ‘시험성적이라는 기득권을 더 꼭 움켜쥐었’기 때문에 이렇게 책 하나로 갈무리하는 아이들 푸른날을 남길 수 있었으며, 이 푸른날을 발판으로 삼아 아이들 스스로 ‘곧바른 지식인으로 걸어갈 길’을 차근차근 다지지 않겠느냐 싶기도 합니다. ‘노란잠수함’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까이지 않았거든요. 남김없이 밟히고 짓이겨지고 차이고 밀리고 쫓겨나고 들볶이지 않았거든요. 이제부터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부딪히면서 까이고 아파하고 밟히고 슬퍼하고 차이고 괴로워하며 쫓겨나고 고달픈 가운데, 세상 살아가는 보람을 저마다 다르게 붙안지 않겠느냐 믿어 봅니다.

 저한테는 ‘책읽고 대학 갔다가, 책만 들고 대학 관둔’ 삶이지만, 이 아이들한테는 ‘대학 가려고 책읽고, 책도 들고 대학도 다니는’ 삶으로 일구면서, 이 나라에서 함께 어깨동무할 수 있다면, 이런 삶으로도 서로서로 반갑고 기쁠 수 있다고 믿어 봅니다. (4342.6.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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