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다케나카 치하루 지음, 노재명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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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낱 불쌍한 떨거지인 미국과 이명박과 ……
 [잠깐 읽기 31] 다케나카 치하루,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 책이름 :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 글 : 다케나카 치하루
- 옮긴이 : 노재명
- 펴낸곳 : 갈라파고스 (2009.4.10.)
- 책값 : 11000원



 (1) 아이들 삶에서 사랑과 전쟁이란


 중학교 1학년인 처남은 ‘한국전쟁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를 모릅니다. 헷갈려 합니다. 어쩌면, 해방된 해를 모를 수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잡아먹은 해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르는 일은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어딘가 글렀다거나 말썽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전쟁이 터진 해를 안다 한다 하여 전쟁이 어떠한 일인가를 알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피해 숫자를 알고, 휴전을 언제 맺었는지 아는 이들이 한국전쟁뿐 아니라 온누리 전쟁이 우리 삶을 어떻게 옥죄는지를 깨닫고 있을까요? 임진왜란이 우리한테 아픔이었다면, 고구려가 땅을 넓힌 일은 아무한테도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곰곰이 살피면, 우리 처남만 아니라 이웃 아이들도 한국전쟁을 잘 모릅니다. 일제강점기는 더욱 모릅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를 잇는 군사독재와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을 거치며 이러한 독재 앙금이 그리 풀리지 않은 사회 얼거리를 더더욱 모릅니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인지는 아예 모른다 하겠습니다. 촛불집회 이야기를 얼핏 들었을 테지만 살갗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아이들 삶에 어떻게 잇닿고 있는가를 깨닫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모두와 얽혀 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와 아이를 가르치는 학교교사 모두 이러한 이음고리를 못 느끼거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가두기 때문입니다. 아이들한테 비싼 손전화를 사 줄 돈은 있고, 인터넷게임을 하도록 마음써 주기는 하지만, 아이들한테 제 삶이 어떻게 흘러왔으며 앞으로 어찌 흘러갈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생각을 잇지 못합니다.


.. 최근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대 테러전쟁에 수많은 나라들이 이런 선택을 강요당했습니다. 미국 정부에 반기를 들면 손해를 본다, 그렇기 때문애 전쟁에 협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과연 이 경우에도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사상적 근거가 존재할까요? … 미국이나 유럽의 강대국이 중동에 개입한 이유는 전략적인 거점과 석유 확보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산유국이 밀집되어 있는 페르시아만의 강대국 이란이 반미로 돌아선 것은 이들에게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더욱이 미국 식의 시장경제를 비판하는 사상이 수출된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굉장히 곤란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란에 전쟁을 유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신에 전쟁을 해 줄 나라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란과 인접한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 목표를 이루게 됩니다 ..  (26, 116쪽)


 6월 25일을 안다 하여도 4월 19일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한국사람일까 궁금합니다. 8월 15일을 안다 하여도 5월 18일을 모른다면? 10월 9일은 알아도 11월 13일을 모른다면? 12월 25일은 알아도 5월 1일은 모른다면? 그리고 이 모두를 죄다 모른다면? 이 모두를 죄다 안다면?

 안다면 무엇을 어디까지 알까요. 모른다면 무엇을 어느 만큼이나 모를까요. 뭔가를 안다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가요.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우리 어른들은 어떻게 마주했으며, 우리 어른 스스로는 얼마나 제대로 샅샅이 깨닫고 있을까요.


.. ‘폭력을 통제하는 방법’은 우연히 발생한 폭력사건에 일시적으로 대처하는 수준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폭력을 추방할 수 없습니다 ..  (166쪽)


 한국전쟁을 알아야 한다면, 한겨레가 둘로 쪼개어져 서로 죽이고 죽은 일이 끔찍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나쁜 놈이요 빨갱이는 죽일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은 나쁘다’는 속없고 알맹이없는 이야기만 외쳐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은 ‘대리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 대리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우리 스스로 얼마나 바보스러웠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한국전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군인보다 훨씬 많은 민간이 죽은 이러한 전쟁은 북녘이든 남녘이든,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느 무엇한테는 이바지할 구석이 없음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이란, 우리 스스로 치고받은 싸움이 되었든, 일본이 우리 땅에 쳐들어온 싸움이 되었든, 때리는 쪽이나 맞는 쪽이나 모두 제 삶이 망가지고 제 삶터가 무너지며 제 삶자락이 사라지게 이끕니다. 나를 때린 이를 내가 앙갚음하며 때린다 하여 나한테 남은 생채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 다리 자른 사람을 찾아가 그이 다리를 싹둑 자른다 하여 내 다리가 새로 돋지 않습니다.

 한 번 죽으면 끝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없습니다. 꺼진 셈틀을 켜듯 다시 켤 수 없고, 하드디스크를 갈아 새로 켤 수 없습니다. 오락실에서 돈을 더 넣고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는 놀이처럼 새로 열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오로지 누구한테나 꼭 하나만 있는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을 망가뜨리고 무너뜨리고 짓밟는 전쟁입니다. 일으켜 짓밟으려 하는 쪽이나 일어나 짓밟히는 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일으켰다고 이네들 삶이 안 무너지겠습니까. 전쟁에 휩쓸렸지만 이겨냈어도 우리 삶이 안 무너졌겠습니까.

 낫과 쟁기가 아닌 총과 칼이란 처음부터 없어야 했습니다. 이제라도 걷어치워야 합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하여 지키는 군대를 키운다지만, 세상 어느 나라 군대이든 ‘지키는 군대’란 어느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나라밖으로 쳐들어갔든 나라안에서 쿠테타를 일으키거나 독재에 팔뚝질을 하는 여느 사람을 후려갈기든 하는 군대였을 뿐입니다.

 우리를 지키는 힘은 ‘총칼 주먹다짐’이 아닌 ‘맨 몸뚱이 사랑’일 뿐입니다. ‘돈과 재물’이 아닌 ‘어깨동무 믿음’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이란 몹시 끔찍했던 지난날이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지난 삶이요, 우리가 다시 불러들이지 말아야 할 지난 발자국입니다.


..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로부터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사실 한 나라 안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내전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슬럼지역에 사는 주민을 개발계획 때문에 강제 퇴거시키는 정책은 여러 나라에서 시행됩니다. 이른바 ‘아름다운 도시’, ‘범죄 없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정책이지요 …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의 시민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위험하고 더러운 것’들이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 전가된다는 사실입니다 ..  (172∼173쪽)


 열네 살 처남은 아홉 달짜리 아기를 보면서 ‘귀엽다’고 이야기합니다. 아기가 한 달이 될 무렵부터 보았는데, 나날이 ‘더 귀엽다’고 이야기합니다. 열네 살 처남은 제 두 눈으로 제 가까이에서 아기를 처음으로 마주할 뿐 아니라, 똥오줌을 누고 칭얼거리고 젖과 죽을 먹고 기고 놀고 웃고 우는 모두를 보면서 ‘귀엽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귀여운 아기’를 보게 되고 느끼게 되고 알게 된 처남한테는, 저 스스로 모르게 마음속에 사랑이 싹트리라 믿습니다. 아니, 사랑이 싹틀밖에 없습니다. 어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니, 어른이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 말을 하는 이 작은 목숨붙이가 이 하나로 얼마나 아름다운 줄을 느끼고 있으니 마땅히 사랑이 싹틉니다.

 그렇지만, 열네 살 처남 앞뒤와 둘레로 얼마나 많은 어리고 푸르고 젊은 넋들은 ‘귀여운 아기’를 부대끼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집에서, 제 배움터에서, 제 일터에서, 제 동네에서, ‘귀여운 아기’뿐 아니라 ‘살가운 나무’나 ‘애틋한 길고양이’나 ‘고마운 이웃’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버이와 교사와 학교벗만이 아닙니다. 버스기사나 전철기사, 길에서 스치는 사람, 가게 일꾼, 학원 강사, 동네 사람들 가운데 오늘날 ‘열네 살 아이’한테 사랑과 믿음이 스스로 샘솟도록 도와주거나 이끌어 주는 어른은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평화를 보고 자라야 평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장난감 총으로 전쟁놀이를 하는 가운데 저절로 총싸움은 아무것 아니요 텔레비전으로 흘러나오는 ‘미국이 일으킨 침공’ 또한 재미난 볼거리로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맛을 보고 자라면 사랑을 알면서 나누지만, 돈맛을 보며 자라면 돈만 벌면서 돈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2) 첫걸음 떼는 책


 일본사람이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는 책이 우리 말로 옮겨졌습니다. 이 책을 펼치기 앞서, ‘왜 우리는 전쟁 이야기마저 일본사람 글을 읽어야 하는가?’ 하고 물어야 했습니다. 왜 우리 스스로 우리가 치르고 겪은 그 숱한 전쟁 이야기를 우리 땅과 사람과 넋에 맞추어 풀어내지 않는가 하고 되물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사랑하기 때문일까요? 입으로는 ‘전쟁 반대’를 외치더라도, 우리 몸은 ‘전쟁에 길든 채’ 살아가기 때문일까요? ‘전쟁 반대’를 외치는 입이라면, 저절로 ‘군 가산점’ 따위는 얼마나 ‘전쟁 사랑’이며 ‘사람 푸대접’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군 의무 복무’란 참된 나라사랑이 아닌 기득권 지키기에다가 군사독재가 이 땅에서 씻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입으로만 외쳐지는 ‘전쟁 반대’만 있을 뿐, 우리 온몸으로 부대끼려는 ‘전쟁을 털어낸 삶’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전쟁 반대’를 하겠다면, 《우리들의 하느님》을 쓴 동화쓰는 할아버지 권정생 님처럼 “승용차를 버려야 이라크파병을 막을 수 있다”는 깨달음에 가 닿을 터이나, 승용차는커녕 냉장고와 텔레비전조차 못 버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 가해자, 즉 폭력을 휘두른 학생도 폭력의 ‘희생자’로서 보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생활이 완전히 망가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폭력의 문화’에 깊숙이 빠져 있는 병든 상태입니다 ..  (200쪽)


 그러고 보면, 이제는 세상을 떠난 동화쓰는 권정생 할아버지님입니다만, 권정생 님 또한 텔레비전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 나름대로 세상을 읽자면 텔레비전을 보셔야 했기 때문일 테고, 걸어다니기도 힘든 터라 좋은 영화를 보자면 비디오로 보아야 했기 때문이리라 봅니다.

 권정생 님 작은 집에는 냉장고도 있었습니다. 한 번 앓아누우면 꼼짝 못하고 끙끙거려야 했으니, 며칠 먹을거리를 간수하자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두 다리 멀쩡하고 두 손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텔레비전이 없으면 세상을 읽을 수 없는가요? 신문을 읽어야만 세상을 알까요? 냉장고를 모셔야만 굶지 않고 살게 되나요? 승용차를 굴려야만 집과 일터를 오가며 우리 뜻을 펼치게 되나요? 손으로는 빨래를 못하고 전기 먹는 빨래기계를 돌려야만 할까요? 그러다가 열 몇 해쯤 지난 냉장고와 세탁기와 승용차들은 어떻게 하지요? 이런 기계와 전자제품을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까지 ‘안 버리고’ 잘 쓰고 있습니까?


.. 전후의 일본은 자신의 식민지와 전쟁터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따라서 그 후 일본인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전후를 보낸 아시아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많은 일본인들은 잊기 쉽습니다. 중국이나 한반도는 1945년 이후 내전이나 분단, 군사지배를 경험했습니다. 이 지역사람들에게 전쟁은 1945년 8월에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반공정책을 지원했던 일본은 두 나라의 분단에 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21세기인 지금도 두 나라는 아직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 아시아인들은 지금껏 일본사람들을 증오하거나 해치려는 행동을 하지 않고 지내 왔습니다. 일본이 가혹한 식민지배와 잔인한 살육을 범했어도 넓은 마음으로 일본인들을 대했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나라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지금껏 아시아인들이 일본인에게 보여준 관용의 정신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인으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뿐 아니라, 정부를 비판해 온 세력 또한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쟁은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정치가들은 음지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입니다 ..  (219, 234쪽)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고 하는 책은,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는가?’ 하는 밑뿌리까지 파고들지 않습니다. 아니, 파고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쓴 분 스스로 아직 ‘나는 밑뿌리가 무엇인지 다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밑뿌리를 찾는 가운데, 모자라나마 풀이법 또한 함께 찾고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아주 뾰족하고 시원스런 이야기를 바라는 분들한테는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는 책은 지루하거나 아쉽게 느껴지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몸부림을 치고 있기 때문에, 또한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평화를 사랑하는 옳은 길’은 무엇인지 누구보다 글쓴이 스스로 찾아나서고 있기 때문에 따뜻한 살내음이 배어 있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거든요. 글쓴이 스스로 아직 어설피 알고 있는 대목이 엿보이고, 잘못 아는 대목 또한 군데군데 보입니다만, ‘옳은 길’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글쓴이가 몸담은 대학교에서 ‘가해자이며 전범인 일본은 어느 누구보다 용서와 사랑을 많이 받은 겨레’임을 몸소 깨닫는 가운데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먹다짐을 일으킨 주제에 입만 살았네?’ 하고 빈정거릴 분이 틀림없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가해자 또한 제 삶이 망가져 있음’을, 일본사람 스스로 ‘가해자였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제대로 못 느끼는 대목에서 제대로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직은, 한국사람 스스로 ‘주먹질을 받았음에도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멀리할 줄 알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책을 써내도록 바라고 또 바라야 하겠습니다만, ‘주먹다짐을 일으킨 주제라 할지라도 평화와 사랑으로 돌아서며 고개숙여 뉘우치고 바르게 제 삶을 되찾는 길’이 담긴 이 책 하나를 곱다시 껴안는 일도 겉훑기로나마 보람과 열매를 얻는 일이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 이를 보면 이 분쟁(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분쟁)은 사실 신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이익 대문에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아니라 인간들의 싸움이라면 인간이 평화의 길을 열 수 있습니다 ..  (96쪽)


 저는 이 책을 덮고 다시 한 번 읽으며 책 귀퉁이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가 아니라 ‘미국, 그러니까 흰둥이들은 왜 허구헌 날 싸움질이여?’ 하고 책이름을 고쳐 달아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흰둥이든 미국이든 이명박이든 또 아무개이든 한낱 불쌍한 떨거지가 아닐까 싶구나.” (4342.4.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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