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군의문사 유족들은 말한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엮음 / 삼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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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는 아들을 머저리로 만들고, 딸한테 생채기를 남긴다
 [잠깐 읽기 24]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책이름 :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글ㆍ사진 :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 펴낸곳 : 삼인 (2008.12.5.)
- 책값 : 12000원



 (1) 내가 겪은 군대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보면서, 이 아기가 사내로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반가운가 하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내였으면 기저귀를 갈다가 갑자기 오줌을 찍 사면 얼굴에 맞잖아요’ 하고 말하지만, 그런 아기 오줌질이야 아무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내로 태어날 때 가장 걱정스러운 ‘군대’ 문제는 아직도 풀릴 길이 까마득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 현재 국방부 훈령인 전공사상자 처리 규정엔 ‘자살’ 규정만 있고 ‘구타나 가혹 행위 등’으로 인한 자살의 경우는 명시돼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공무 수행 중 자살에 대한 순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  (64∼65쪽)


 그렇다고 계집으로 태어난 우리 아이가 ‘군대’ 문제 때문에 피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사귀는 남자아이가 군대에 갈 때라든지, 이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랑하여 혼인할 남자아이가 ‘군대에서 지내는 세월에 걸쳐 몸과 마음에 받은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때에는 똑같이 ‘군대’ 때문에 피를 보게 됩니다.

 저처럼, 군대에서 바보 멍텅이 돌대가리가 되어 버릴 뿐더러, 군대를 거치면서 입이 걸어지고 마음이 메말라 버리는 사람들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지만, 저하고 함께 사는 옆지기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이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또 장인 장모 모두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입니다.


..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했다. 국가에서 데려간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 원인조차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함께 배를 타고 먹고 잤다는 부함장이라는 사람은 20여 일이 지나서야 아들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들 잃은 슬픔에 잠겨 식음 전폐하기를 몇 날 며칠. 부모는 생업도 접고 아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찾아나섰다. 그 과정에서 아들의 속옷이 제대로 인계되지 않고 심지어 일부 품목은 부모의 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고 세탁돼 있었다. 자꾸 감추려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  (76쪽)
 

 나날이 군대 가는 사내 숫자가 줄어, 이제는 중졸자도 군대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중졸자까지는 군대에 안 갔습니다. 제가 군대에 간 1995년에는 ‘고퇴자(= 중졸자)’도 군대에 갈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중졸이면서 군대에 온 녀석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군대에서 “야, 넌 어떻게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데 군대에 왔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대한민국 군대에 너희들이 잘못 들어왔어도 국방부 시계가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어!” 하면서 까닭없는 주먹질과 얼차려를 덤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무렵 제 후임병으로 ‘다른 형제와 친척 없는 외동 장남이면서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생활보호대상자’ 집안 아이도 여럿 들어왔는데, 도무지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 이 아이들이 어찌 군대에 들어왔던가 하고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신상기록카드를 곰곰이 살피니,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북파간첩 키우는 부대’로 끌려갔다가(징집) ‘북파간첩 대상자 부적격 판정’을 받고 ‘일반 군대, 이 가운데 강원도 산골짝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힌 육군 보병’으로 흘러든 셈이더군요.

 요즈음도 북파간첩을 키우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1997년에 전역을 하는 그때까지, 한국군에서는 틀림없이 북파간첩을 키웠고, 그 부적격자는 우리 부대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연고자가 더 없는 외로운 집’에서 살던 아이들이었고, 이 아이들은 자기들이 군대면제자였음을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훈련소를 거쳐 자대에 왔으며, 전역하는 날까지도 이런 일은 1급비밀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어릴 적 살던 동네 이웃집 아저씨도 북파간첩 출신이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키 크고 덩치 우람해 또래 동무들 모두가 무서워했지만, 우리들보고 ‘남자는 체력단련을 잘해야 해!’ 하고 으르렁댈 때를 빼놓고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 집 형은 아버지한테 얻어맞으면서 태권도와 무술을 배웠고, 집에서도 매섭게 체력단련을 해야 했습니다. 북파간첩 출신 아저씨는 5층짜리 아파트 마당에 샌드백과 평행봉을 손수 용접하고 시멘트 부어서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도 체력단련을 하라고 시켰고, 아저씨 말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체력단련은 재미있는 놀이라서 곧잘 즐겼습니다.

 아저씨네(라기보다는 이웃집 형네) 놀러가면 때때로 아저씨가 임진강이며 북한강이며 물속으로 헤엄쳐 북녘으로 넘어 들어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당신이 군대에서 일찍 나온 까닭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통이 나서 자기 동료가 바로 옆에서 온몸에 총알구멍이 나면서 죽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동료 주검이라도 건지고 싶었지만 자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혼자 빠져나왔다는데 그 죄책감을 씻을 수 없었답니다.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5분 동안 물속에서 헤엄쳐야 하는 훈련을 받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물속에서 자기들이 숨을 못 참고 물 밖으로 나올라치면 고참들이 군화발로 머리를 까고 몽둥이로 두들기면서 꼭 5분 동안 물속에서 물을 마시면서라도 버티게 했다고 했는데, 소름이 돋는 한편, 나도 5분 동안 물속에서 참을 수 있을까 하고 집에서 바가지에 물을 받아 머리를 처박아 보곤 했습니다.


.. 진상 규명 결정이 내려졌지만, 늙은 아비와 어미는 여전히 답답함이 남았다. 아들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국방부가 군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지도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 가족들은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에 동의했다.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지만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부검 결과는 대부분의 의문사가 그렇듯 자살이었다. 심한 모욕과 얼차려, 구타를 자행해 아들을 사지로 내몬 병사와 간부들은 제대로 된 징계 한 번 받지 않았다 ..  (81, 94쪽)


 어릴 때에는, 저 또한 군대라는 곳에 들어가기 앞서까지는, 우리 아버지가 군대에서 지역차별을 받으면서 얼차려와 주먹다짐으로 시달리다 못해 고향 동무들하고 같이 실장갑에 대못을 박고 “썅, 서로 죽어 보자!”고 싸움박질을 했다는 일이 장난이나 거짓이나 뻥튀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군대에 들어가고는, 그리고 그 군대가 남녘땅 군대에서는 가장 외지고 춥고 고되다는 곳으로 용케(?) 들어가서 스물두 달을 채우고 나오는 동안에는 생각이 아주 뒤바뀌었습니다. 왜 부잣집 사람들이, 정치꾼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 하는지를 온몸으로 깊디깊이 깨달았습니다. 훈련소와 자대에서는 ‘신상명세서 쓰기’ 종이를 나누어 주며 한쪽에 ‘내 식구나 친척 가운데에 국회의원, 시도 지사 따위가 있는지 적으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유명인사나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간부 가운데 식구나 친척이 있으면 적으라 했는데, 이렇게 적은 동기들은 모두 ‘좋은’ 데로 빠져나갔고, ‘줄 닿는 뒷배’가 없는 저 같은 떨거지는 기차와 배와 군짐차를 여러 차례 갈아타면서 강원도 양구 산골로 엉덩이가 걷어차이며 들어갔습니다.

 자대에 들어가던 무렵부터 눈이 얼마나 오지게 오던지, 사단휴양소에서 이틀이나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눈밭을 헤치고 겨우 자대에 들어가니 더블백을 풀기 앞서 빗자루와 눈삽과 흙삽을 하나씩 받고는 한 시간 동안 산을 타고 올라가서 보급로 눈치우기를 해야 했습니다. 훈련소와 자대를 거치며 ‘이놈(고참)들 눈에 밉보이면 그대로 죽어 버릴 수 있구나(이때는 ‘의문사’를 몰랐고, 그냥 ‘개죽음’만 알았습니다)’ 하고 느꼈기에 죽자 사자 고참 꽁무니에서 1미터 거리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따라붙어 겨우 ‘눈치우기 산타기’에서 낙오를 안 했는데, 고참은 자기 뒤에 1미터 넘게 떨어진 모든 후임병을 눈밭에 머리박기를 시키며 발로 뻥뻥 걷어찼습니다. 등과 배와 얼굴을. 낙오를 안 해 옆에서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저로서는 ‘안 맞아서 다행’이 아니라, ‘나만 안 맞으니 이따 돌아가서 지금 맞은 사람(다른 고참)들한테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크게 들어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이등병 때,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며 저녁점호를 받던 동기는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는 채’로 고참한테 발길질을 받아서 이마가 쭉 찢어져서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고, 제가 전역할 무렵 스물여섯 나이로 고시에 실패해서 들어온 ㄱ대 공부벌레 늦깎이는 날마다 뒷간에서 대여섯 살 아래 동생(고참)들한테 얻어맞고 우느라 늘 눈이 부어 쳐다보기에 언제나 안쓰럽기에, 제 앞으로 나오는 담배를 몇 갑씩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 주곤 했습니다. 이 녀석(형)은 이때부터 담배를 배웠습니다.


.. 경찰들은 또 장례를 치러야 된다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먼저 현덕의 동료 부대원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혹시 부대에서 가혹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살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경찰은 가족들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단, 부대원과의 개별 면담은 허락하지 않았다 … 부모는 아무리 애간장이 끊어져도 죽은 아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찾아간 군부대에서는 오히려 “아들이 나약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부대에 피해를 주었으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쳤다. 적반하장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과 맞서기에 늙은 부모는 너무나 힘이 없었다 ..  (146, 156쪽)


 그렇지만 모든 군대가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로 얼룩져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나왔던 그 양구 골짜기 부대만(민통선 안쪽에서 이북 군인과 마주하고 있는) 더 모질었는지 모릅니다. 해병대 전적비가 있는(도솔산) 그 산골짜기 부대는 한 해에 꼭 닷새만 해를 볼 수 있는 비와 안개와 눈으로 덮인 곳이었고, 주둔지 대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중대에서도 소대가 따로 지내기도 했던 만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시무시함이 더 깊었는지 모릅니다.

 사단장이나 별 달고 무궁화 단 분들께서 우리 부대에 나들이하실 때마다 모든 중대원이 하루 내내 ‘취나물 뜯기 사역’을 해서 몇 마대씩 선물로 앵겨 드리지 않으면 대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은 괜찮았습니다. 한 해에 한 번씩 사단장님께서 헬기가 아닌 지프를 타고 가칠봉전망대로 헤엄을 치러(가칠봉gop 꼭대기에는 수영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별 단 분들께서 헤엄치러 놀러옵니다. 마땅한 소리이지만, 지오피 꼭대기에 마련된 수영장은 우리 같은 땅개들이 자갈과 시멘트와 모래와 물을 주둔지부터 한 사람씩 등짐 지고 날라서 만들었습니다) 가시는데, 사단장님 지프가 작은 돌멩이 하나에라도 바퀴가 통! 하고 흔들리다가는 연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불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혹한기훈련을 앞두고 사격훈련을 하는데 그 추위에 총기고장도 잦고 손이 떨려 제대로 맞추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런 형편은 아랑곳 않고 제대로 못 쏜다고 몇 시간 동안 ‘뒤로 포복’으로 눈밭을 밀며 자대복귀 시키다가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 무전병 헬멧에 총질을 해대어 구멍을 내고 다음에는 우리들 대갈통에 구멍을 내겠다던 중대장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일도 그리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관물검사를 하며 ‘불온서적 색출’을 하는데,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불온서적이라고 스무 권 남짓 찾아내어 태우게 하는 일이 저한테 떨어져, 어찌 책을 태우나 속이 아파서 안 태우고 소각장 한쪽 구석에 몰래 숨겨 놓았으나 들키고 말아, “너 빨갱이 아냐? 간첩 아냐? 너희 같은 새끼들은 총으로 쏴죽여서 저기(철책) 안쪽에 갖다 던지면 월북했다고 신고하면 그만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갖은 징계와 구박과 주먹질을 받던 일도 있었는데, 여느 날 늘 벌어지는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를 돌아보면 새발바닥 피 같은 장난입니다. 논산훈련소에서 똥물먹기가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그러기 앞서 우리 부대에서도 푸세식 뒷간을 혀로 핥아서 닦기를 시키는 고참이나 중대장이나 행정보급관이 있었고, 삽날과 곡괭이자루로 맞는 일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으며, 소총 소염기에 머리박느라 머리에 구멍이 나는 일도 잦았습니다. 






 (2) 군대에서 살아남으면 용하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참 많이 맞았지만, 저는 적게 맞은 셈이고, 저 또한 후임병을 아주 적게 때렸습니다. 저는 꼭 세 번 때렸는데 세 번 때릴 때 거의 반죽음으로 때려 놓았으며, 웬만하면 주먹이 아닌 입으로 후임병을 들볶았습니다. 저를 때렸던 고참은 전역 뒤에 어느 한 사람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저한테 맞은 후임병 셋도 두 번 다시 연락이 안 됩니다. 때린 분한테는 왜 때렸는지 묻고프고, 맞은 동생한테는 너무 미안하다고 빌고 싶으나, 어느 누구도 보거나 만나거나 알고 지낼 수 없습니다.

 그저 다들 그 끔찍한 데에서 살아남았으니, 그 일로 다 잊자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저한테 욕 많이 먹던 어느 분은 예닐곱 해 앞서인가 길거리에서 두어 번 마주쳤는데, 술이나 마시자며 연락처 좀 주고받자고 했으나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 마시지’ 하면서 끝내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모르지만, 모두들 어디에선가 어떻게든 군대에서 보냈던 일은 훌훌 털어버렸는지 모를 노릇이고, 털어낸다 해도 털어지지 않아 그때 생채기가 오늘날 자기 모습으로 굳은 가운데 사람들과 부대끼고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우리 애를 제일 괴롭혔던 그 군인이, 아주 부대 안에서 소문이 났더라고. 부산역 TMO에서 그 자를 조사하는데, 난 좀 늦게 갔어. 헌병 조사관이 추궁을 하니까, ‘어, 그럼 진술 거부하겠다’ 그러더군. 그러니 헌병이 또 달래서 진술을 시키는데……. 그 정 아무개라는 사람이 날보고 힐책을 하더라고. ‘왜 아들을 그리 약하게 키웠습니까’라고. 바로 조사관들 앞에서, 허허허 ……. 허허허, 우리 애를또 많이 괴롭혔던 자들 중에 전주에 있는 한 명은 그래도 가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쥐어박아도 살살거리고 살아남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는 뜻이겠지.” ..  (250쪽)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라는 책을 읽으며, 어느 한편으로는 ‘군대에서 죽은 이 사람들은 그나마 자기들 목숨을 내려놓았을 때’ ‘그래, 이제 더는 안 맞아도 되고 더 욕을 안 먹어도 되며 더 속으로 눈물 안 흘려도 돼’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 군대 적 때 일이 그러했으니까요. 이등병 때 수없이 얻어맞고 불쌍하게 있던 동생들이 일병이 되고 후임병이 생기니 자기가 받은 그대로 후임병한테 고스란히 물려주는 모습을 보며, “야, 너도 이등병 때 그렇게 겪었는데 왜 그러느냐?” 하고 불러세워 따끔히 한 마디 하면 “네, 죄송합니다! 안 그러겠습니다!” 하면서도 눈빛에는 ‘씨, 씨, 그동안 맞은 만큼 돌려줘야지!’ 하는 불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곳은 뼛속 깊이 ‘시키는 대로 해라. 안 그러면 맞는다. 맞다가 죽을 수 있다. 맞다 죽으면 그냥 개죽음이다’ 하는 생각이 박혀 있으니 우리들 여느 사람 여린 힘으로는 어쩔 길이 없는가 싶곤 합니다. 그냥저냥 이등병 일병 때는 죽지 안을 만큼 맞고 버티자고 하다가, 상병 병장이 되면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주면서 속풀이 하자고 생각하게 되는가 싶곤 합니다. 안 맞고 크면 이상하고, 안 때리며 고참질 하면 또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가 싶습니다. 제가 상병이 되어도 동생들을 한 번도 안 때리니 동기들이 “야, 너만 안 때리면 우리가 어떻게 되냐. 너 때문에 우리가 상병이 되도 병장들한테 맞잖아. 그렇게 하면 안 돼!” 하고 자꾸 그래서, 상병 6호봉에 이르러 처음으로 동생들한테 욕을 했고, 병장 계급장을 달고 나서 비로소 주먹다짐을 했습니다. 이때에는 “얌마, 병장이 되어서도 그러면 우리 밑에 있는 애들이 함부로 날뛰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리하여 군대 조직 질서가 남자들 몸과 마음이 하루하루 또아리를 틀고, 사회에 돌아와서도 이 버릇이 씻기지 않아, 한국땅 남자들은 ‘군대에서 아무리 몸소 손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옷을 개고 내무반 쓸고 닦고 이부자리 치우고’ 했어도, 군대에서 벗어나는 그때부터 모든 집안일은 ‘여자들이 알아서 할 일’로 넘기고, 무슨 일만 있으면 쉽게 주먹을 들고 손찌검을 하고 회초리나 몽둥이를 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푸름이들이 ‘제도권 교과서’가 아닌 ‘마음밭 살찌우는 진짜 책’을 찾아나서지 못하듯, 군대지옥에서 풀려난 젊은 사내가 ‘폭력으로 얼룩진 위계 질서’를 떨구지 못하고 자기 또한 ‘밥그릇 서열과 주먹힘’ 따위로 사람을 깔보거나 얕보거나 푸대접하지 않느냐 싶어요.


.. “텔레비전을 보면 매번 군대가 좋아졌다, 군대가 변했다는 얘기를 떠들잖아. 난 그거 하나도 안 믿어. 군대 깊숙이 자리잡은 폐쇄성과 폭력성이 사라지기 전에는 변했다는 말을 하면 안 돼.” ..  (98∼99쪽)


 2006년 여름이던가, 서울 어느 미술관에서 ‘이름난 어느 서양 그림책 작가’ 원화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그분 이름을 잊었지만, 온나라 어린이와 어버이한테 사랑받는 분인데, 이분은 미국사람이면서 ‘군대에 안 가고 산림보호원 공익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총을 드는 일은 자기 마음을 다치게 할 뿐 아니라, 내 이웃을 다치게 하기에 군대에 안 가겠다고 하여, ‘대체 복무’로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자연을 들이마시면서 자연사랑과 사람사랑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고 밝히더군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군대라는 조직을 키워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라도 키울 노릇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돈-이름-힘이 있는 사람은 다 빼돌릴 수 있는데다가, 군대라는 곳부터 ‘좋고 나쁜’ 곳으로 갈리는 한편, ‘사람 죽이는 훈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우리 스스로 이 땅 젊은 넋을 살인기계이자 바보로 만드는 틀거리가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대체복무제’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 나라 앞날이 어찌 될는지 걱정과 근심일 뿐입니다. 권력자한테는 젊은 넋이 모두 깨어 ‘권력이 썩지 않도록 일어서는’ 일이 걱정과 근심일는지 모르나, 이 나라와 삶터를 돌아본다면, 젊은 넋은 ‘살인기계 훈련’이 되도록 할 일이 아니라 ‘참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몸을 기르고 다스리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손길을 바라는 외로운 어르신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손이 모자란 공장과 농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젊은 넋이 세상을 더 알뜰하고 애틋하게 껴안거나 부대끼도록 하자면, 이 젊은 넋들 손을 ‘참다운 땀방울 흘리는 곳’으로 돌려놓아야지 싶습니다. 젊은 넋이 총칼 훈련 받을 시간에, 시골 논밭에서 손농사를 짓도록 하면, 우리 나라 농업은 100% 유기농으로 바꾸는 한편, 나라밖에서 곡식과 푸성귀를 사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넉넉할 수 있습니다. 젊은날, 공장에서 일하면서 ‘물건 하나 만들기까지 얼마나 어려운가’를 몸소 배울 수 있고, 이 젊은이들이 새벽녘 길거리 청소를 해 보면서 ‘우리가 술주정을 하면서 길을 마구 더럽히거나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이 동네를 어떻게 망치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땅 모든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편, 또래 동무들뿐 아니라, 이 나라 절반을 차지하는 딸들한테 사랑스러운 벗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군대 틀거리로는 이 땅 모든 아들들은 이태 동안 영 글러먹은 머저리나 깡패가 되어 갈 뿐입니다. (4342.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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