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식탁 1
시무라 시호코 글.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그리움과 애틋함을 만화 하나에 소롯이
 [살가운 만화 41] 시무라 시호코, 《여자의 식탁 (1)》



- 책이름 : 여자의 식탁 (1)
- 글ㆍ그림 : 시무라 시호코
- 옮긴이 : 김현정
- 펴낸곳 : 대원씨아이 (2008.5.15.)
- 책값 : 4200원



 (1)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는 눈골목 사진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아침, 모든 일을 젖혀 놓고 사진기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옵니다. 오늘은 모처럼 장갑까지 끼고 나옵니다. 설마 싶어서 두툼한 겉옷을 챙겨 입습니다. 모자를 눌러쓰며 눈발을 막고 사진기는 겉옷 안에 넣어 눈이 맞지 않게 하면서 뒤뚱뒤뚱 뜀박질을 합니다.

 창영동 골목집에서 배다리 철길다리 밑으로 지나 경동으로 건너갑니다. 늘 다니면서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았던 골목 모습을, 오늘은 눈발 날리는 모습으로 새롭게 담습니다. 경동을 지나 율목동으로 접어들고, 다시 경동으로 건너온 다음 용동으로 넘어가고, 용동에서는 인현동으로 건너서 은행에 들러 돈을 찾고, 지하상가를 거쳐 찻길을 가로지른 다음 동인천 〈대한서림〉 옆을 스쳐서 내동을 살짝 바라보다가 전동 삼치골목을 쳐다봅니다. 삼치골목은 가게마다 간판갈이를 하느라 부산합니다. 시에서 관광특구로 지정하며 간판을 새로 다는 듯합니다.

 부지런히 발을 놀려, 내동과 전동과 송학동1가가 만나는 무지개문(홍예문) 앞에 섭니다.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뒤 무지개문 밑에 서고, 이 길에서 사고가 많아 걱정이라 한다면 이리로 자동차가 못 다니게 하면서 이곳을 ‘근현대 문화역사 체험 마을 특구’로 삼아도 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송학동1가 골목길을 지나 북성동3가로 접어들고, 중국사람들 살림집을 하나둘 넘겨보면서 북성동2가로 접어들고, 중국인거리에서 허물어져 가는 공화춘 건물 앞에 서서 잠깐 고개를 숙인 뒤, 선린동 해안동성당 앞에 닿습니다. 선린동 해안동성당 맞은편에 자리한 해안동성당 교육관은 시 지정 문화재라고 하는데, 이곳 또한 또다른 시 지정 문화재인 공화춘 건물과 마찬가지로 그예 썩어들며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 “참지 않아도 돼.” “그치만.” “그래.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구나. 하지만, 난 정말로 괜찮아. 이쿠가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모른 척할 순 없어. 아빠랑 할머니가 반대해도 엄마가 설득할게. 그러니까, 다음에 친엄마와 만날 기회를 만들자.” ..  (14쪽 - 수영 클럽의 아이스크림)


 눈발이 멎을까 싶어 쉴 새 없이 걷고 달리고 사진을 찍습니다. 엉덩방아도 찧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북성동2가 골목 안쪽에 옛날 그대로 남아 있는 우물터를 스치고 지나간 다음, 관동2가로 접어들었고, 관동2가에 멋들어진 텃밭을 꾸리는 집 앞에 어느새 새로 생긴 울타리를 물끄러미 바라다봅니다. 이곳 관동2가에는 나이트며 가라오케며 단란주점이며 잔뜩 있어서, 인천시에서 ‘역사문화의 거리’라고 붙인 이름이 남우세스럽기도 한데, 아무래도 그 술집에서 체한 사람들이 쓰레기를 텃밭에 함부로 버리는 듯합니다. 집임자는 텃밭에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직하게 울타리를 쌓았고 경고글까지 붙여놓습니다.

 중앙동2가를 지나고 중앙동3가와 관동3가를 지난 다음, 신포동에서 머뭇거리다가 송학동3가로 거슬러 갑니다. 다시 내동을 지나면서 내동 성공회성당 앞을 지나갈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하고, 지하상가를 건너서 답동성당 옆으로 지나갑니다. 답동성당을 옆으로 끼는 샛길에 늘 자동차가 두 줄로 서 있어서 다니기 나빴는데 지지난달에 시에서 드디어 거님길 공사를 해서, 걸어다닐 때 차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도록 바뀌었습니다.

 다시 율목동으로 들어서면서 머잖아 사라질 인천시립도서관을 옆으로 흘깃 바라본 다음, 율목공원으로 들어갑니다. 율목공원 들머리에서 길에 염화칼슘 뿌리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고생 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나이를 제법 많이 먹은 은행나무한테도 인사를 하고 나서, 율목동 안쪽 고즈넉한 집자리, ‘개조심’ 푯말이 붙은 마당가에서 서성이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부랴부랴 신흥동2가 골목을 누비고, 다시 율목동과 유동과 경동이 엇갈리는 골목을 지납니다. 인천시에서 밀어붙이는 산업도로 공사터 옆을 지나는 길을 마지막으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 ‘본심을 알 수 없어서 타인이 무섭다는 말은 자주 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 정말로 바깥출입을 안 하게 되면서, 넌 이제 이대로 평생 틀어박혀 사는 건가 생각했거든. 하지만 다행이야.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선 안 된다는 걸 겨우 깨달았구나. 넌 다시 한 번 타인과 마주할 용기를 갖고 있었어.’ ..  (26쪽 - 호밀 100%의 호밀빵)


 집으로 돌아오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손은 꽁꽁 얼어붙었으나 등판에는 땀이 줄줄 흐릅니다. 속옷을 모두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아침에 신나게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모두 155장을 찍었습니다. 얼마 못 찍었습니다. 밥을 먹고 다시 마실을 나가야겠어요.

 아침부터 눈밭 골목길을 후들거리는 다리로 누비면서 몸이며 손발이며 고단하기 짝이 없지만, 눈구경을 하기 어려운 오늘날, 모처럼 눈발이 그치지 않고 흩날리는 이런 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눈구경이 어려우니 눈온 모습은 덜 찍거나 안 찍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아무리 우리 세상이 이렇게 뒤바뀌고 있다고 하여도, 어렵게 만나는 눈송이인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송이를 냠냠하면서 비알진 골목에서 미끄럼도 타며 놀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어서 오거라. 볼일은 끝났니?” “네. 저기,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오시면 같이 우리 집에 안 갈래요? 유부초밥 다 같이 함께 먹어요.” …… ‘난 단순하니까 괜찮아. (열심히 한 상이야) 그러니까 분명 또다시 힘을 내서 달릴 수 있어.’ ..  (56쪽 - 운동회의 유부초밥) 






 생각해 보면, 오늘은 아기와 옆지기가 집에 없으니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아기와 옆지기가 집에 있으면, 밥하고 빨래하고 뭐하고 하느라 바깥마실은 엄두도 못 냅니다. 아기와 옆지기가 한동안 처가에 가서 지내고 있으니, 보일러가 얼지 않도록 틈틈이 인천집으로 돌아와서 손보고, 고양이한테 밥 주고 하는 사이사이, 눈골목 사진도 찍고 밤골목 사진도 찍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기와 옆지기가 함께 있는 집에서는 아기와 옆지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여덟아홉 가지 곡식으로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면서는, 밥그릇과 찌개그릇을 사진으로 담고, 빨래 널어 놓은 옥상마당을 드문드문 사진으로 담습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할 때에는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고, 골목길 마실을 할 때에는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좋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으며, 자전거 타고 마실을 다니면 또 자전거 타고 지나다니는 길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살아가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깁니다. 살아가는 발자취가 고스란히 사진이 됩니다. 삶과 생각과 모습이 온통 사진으로 아로새겨집니다.


.. ‘난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과자는 맛있고 예쁘고, 다만 너무나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78쪽 - 일요일의 다과회 마카롱)
 





 오늘 눈골목 사진은, 그동안 봄 여름 가을 사이에 신나게 다니던 곳을 다시 찾아가면서 담았습니다. 이제까지 봄 사진과 여름 사진과 가을 사진은 수두룩하게 있으나, 겨울 모습을 말할 만한 사진이 없어서 짝을 이루어 놓지 못했는데, 오늘 다리힘이 쪽 빠지도록 돌아다니면서 비로소 마무리가 지어집니다.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는 동안, 제 어릴 적,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놀던 일이 떠오릅니다. 골목길 동무들하고 놀던 일이 떠오르고, 중고등학생 때 시험공부로 밤늦게까지 붙들어매는 학교가 싫어서 주말이면 하염없이 골목길을 걷고 또 걸어서 다니던 일이 떠오릅니다.

 1992년에도 이 길을 걸었는데 그때나 이제나 마찬가지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1985년에도 이 골목에서 놀았는데 그때나 이제나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1982년과 1981년에 엄마 손을 잡고 신포시장과 송현시장과 신흥시장을 다녔지, 하고 떠올립니다. 이제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 2019년에 이 골목을 다시 거닐 수 있을지 모르고, 2029년에 아이와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 예전에 살던 집 둘레를 거닐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1981년이나 1992년은 그리 까마득한 옛날 같지 않은데, 2019년이나 2029년이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까마득한 앞날 같습니다. 그때까지 이 골목이, 우리 골목집이, 이웃 골목 삶터가 하나도 안 남아 있을 듯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 담은 사진에만 남고 그예 없어져 버릴 듯합니다.
 





.. ‘상처 입힐 것 같아서 무섭다고 말하면서 히로야 오빠가 씻은 딸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히로야 오빠가 보물처럼 다룬 딸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 있지. 웃을 거 같아서 말하지 못했지만, 변신해서 인기를 얻는 것보다, 누군가를 사귀는 것보다, 난 사실은 이게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 같아. 지금 빠져 버린 ‘사랑’이라는 걸.’ ..  (100∼102쪽 - 히로야가 씻은 딸기)


 사진을 찍는 동안 등과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습니다. 손가락이 얼고 발가락이 얼었습니다. 그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저는 ‘사라져 가는 우리 고향’을 사진으로 담을 마음이 없는데, ‘잊혀져 가는 우리 옛 도심지’를 사진으로 찍을 생각이 아닌데, ‘추억이 되어 버린 우리 골목길’을 사진으로 박아 놓을 뜻은 없는데.

 사진에 하나둘 찍힐 때마다 ‘이야기’로 헤아리고 있습니다만, 다른 분들한테는 그저 ‘기록’이나 ‘추억’으로 느껴지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살아가는 발자국이며 살아온 손때인데, 낡은 집이고 ‘주거환경개선을 해야 하는 낙후된 지역’으로만 느끼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 ‘이젠 다 싫어. 알바 가는 것도 싫어. 시시한 공부도 싫어. 타카하시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싫어. 이젠 모든 게 다 싫어, 싫다고. 싫어. 싫어. 싫어.’ ..  (111쪽 - 종이박스 속의 말린미역) 






 눈을 쓸고 쓰레기를 치우는 몽당빗자루에 깃든 사랑을 사랑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이 몇 사람한테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쓸고 일곱 시에 쓴 다음 아홉 시에 또 쓰는 골목집 아주머니와 할머니들 손자취를 곱새길 수 있는 넋이 몇 분한테 살아 있을지 궁금합니다.

 사랑하니까 찍는 사진이고, 사랑하기에 찍을밖에 없는 사진이며, 사랑을 바치며 찍게 되는 사진인데.

 같이 살고 싶어 찍는 사진이고, 함께 살고 있으니 찍는 사진이며, 오순도순 모이고 어우러지면서 엮어내는 사진인데.


 (2) 사랑에 빠진 삶, 사랑을 그리는 삶, 만화 《여자의 식탁》


 만화책 《여자의 식탁》을 읽습니다. 지난해 8월에 아기를 낳은 뒤 다섯 달 동안 만화가게에 들르지 못해 그사이 새로 나온 만화는 하나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그제 어렵사리 만화가게 나들이를 하면서 잔뜩 사들였는데, 마침 지난해 5월에 처음 옮겨졌다고 하는 《여자의 식탁》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4권까지 나왔고, 아직 줄거리와 맛을 알 길이 없기에 1권만 먼저 사서 읽습니다.


.. ‘처음으로 남자에게 안기면서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의 시간과 씁쓸한 첫사랑’ ..  (180∼182쪽 - 버스 정류장)


 그린이 ‘시무라 시호코’ 님은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어울리는 이야기를 ‘먹을거리 하나’에 따로따로 담아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책이름이 《여자의 식탁》이구나 싶은데, 밥상머리 먹을거리는 새삼스러운 요리이지만은 않습니다. 초콜릿 하나이기도 하고 딸기 한 송이이기도 합니다. 스파게티 한 접시이기도 하고, 운동회 때 먹는 유부초밥이기도 합니다. 차멀미를 막아 줄까 싶어 씹는 민트껌일 때가 있고,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혼자 대학교 다니며 알바하여 공부할 돈을 버는 아이가 고향 부모님이 보내 준 말린미역일 때도 있습니다.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와 순대로 옛생각을 되새기기도 하듯, 청어 한 접시나 삼치 한 접시로 옛사람 만나던 일을 떠올리기도 하듯, 눈물 젖은 막걸리 한 사발이나 도시락 한 그릇으로 어린 날 집식구와 옛동무를 그리워하기도 하듯, 《여자의 식탁》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먹을거리에 모든 삶이 담기고 모든 이야기가 스미며 모든 우리 발자취, 곧 우리 생활문화역사가 있음을 찬찬히 보여줍니다. 군더더기 없는 그림결에 부드러운 흐름으로 우리 마음결을 사로잡고 눈길을 촉촉하게 해 줍니다.

 사랑이란 시끌벅적한 사랑만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사랑이라면 누구한테나 마음속 깊은 데에 조용히 소담스레 보듬고 있기도 하다고 들려줍니다. 사랑이기에 옛사랑과 새사랑 가리지 않고 언제나 내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일으켜세우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곳에 튼튼하게 살아 있어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귀엣말을 합니다. (4342.1.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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