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야, 자니? 산하작은아이들 39
이상교 지음 / 산하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85 ― 사랑 잃고 돈 심은 자리에 시라는 씨앗 하나를
 : 이상교 동시모음, 《먼지야, 자니?》


- 책이름 : 먼지야, 자니?
- 글ㆍ그림 : 이상교
- 펴낸곳 : 산하 (2006.5.12.)
- 책값 : 9500원



 (1) 어린이를 보는 어른 삶


 옆지기가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줍니다. 또는 아기한테 젖을 물린 채 노래를 불러 줍니다. 또는 아기를 눕힌 채 가슴을 살살 토닥이면서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아기 얼굴에 잠이 가득한데 제대로 잠들지 못하면 저도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아기가 잠에서 깨어 놀고 싶다고 할 때에도 아기를 어르거나 놀리거나 안으면서 노래를 불러 줍니다.

 다른 아기 어머니도, 또 아기 아버지도 이렇게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아기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들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기보다는 노래테이프를 돌리거나 노래시디를 돌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머니 목소리나 아버지 목소리보다는 텔레비전 소리를, 또 셈틀 소리를, 또 손전화 소리를, 또 숱한 기계소리와 차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사〉

 “이거 너 줄까?”
 개울가에서 주운 거라며
 짝이 돌멩이 한 개를 내게 주었다.

 새알처럼 매끈매끈한
 돌멩이 한 개
 내 손에
 들어왔다.

 짝 마음이
 내 마음속으로
 쏙, 이사 들어왔다.


 지난날 국민학교에 다닐 적에 동시를 읽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동시 외우기 숙제가 꼭 있었고, 국어 시간에는 무서운 선생님이 시외우기를 한 사람씩 꼬박꼬박 시키곤 했습니다. 시 하나를 막힘없이 낱말 하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면 지나가지만, 낱말이나 토씨 하나라도 틀렸다가는 안경 낀 그 선생님 오른손에 들린 굵직한 몽둥이가 어느새 우리 머리통까지 날아와서 딱!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시를 싫어하지 않았고, 시 외우기가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빈틈없이 외워서 읊지 못하면 무시무시하게 내리치는 몽둥이 때문에 시를 가까이하고픈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았습니다. 숙제로, 또 백일장 과제로 시를 깔짝깔짝 대기는 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나 꿈을 글 하나에 살뜰히 담아내는 일은 해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몽둥이찜질을 받으며 동시를 외우던 날이 스물 몇 해가 훌쩍 지나간 옛날 일이 됩니다. 우리 아기를 생각하면서 동시모음 하나 쥐어 봅니다.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서 학교 갈 나이는 아직 멀었는데, 우리 아이도 학교에 다닐 무렵, 그 학교 교사는 우리 아이를 비롯해 숱한 아이들한테 시 외우기 숙제를 낼는지, 또 시 외우기를 못하는 아이한테 매질을 할는지, 시를 외우다가 토씨나 낱말 하나 틀리는 아이를 얼굴이 벌개지도록 나무라다고 손찌검을 할는지 궁금해집니다.


 〈책이 된 꽃〉

 꽃이 책이다.
 나비가 읽고 가는
 책.
 꽃내 스민 갈피 갈피를
 더듬이로 읽고 간다.

 꽃이 책이다.
 바람이 읽고 가는
 책.
 새로 돋은 침을 묻혀
 소슬랑소슬랑 넘겨 읽는다.

 꽃이 책이다.
 해님이 읽고 가는
 책.
 포시시 눈맞춤으로
 총총총 읽어 내린다.
 ……



 나이가 들어서 동시를 다시 읽고, 어린이시를 새로 읽습니다. 동시는 어른이 아이한테 베풀어 주는 선물이고, 어린이시는 어린이 스스로 즐기고자 쓰는 시이면서 어린이 동무한테 나누어 주는 선물인 한편, 우리 어른한테도 건네주는 선물입니다. 동시는 처음부터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쓰는 시이기에, 어른들이 동시를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어린이 그대로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동시를 쓰는 어른들 마음결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마다 담긴 맛과 멋을 느낄 수 있고, 어린이와 함게 기뻐할 수 있어요.

 마음을 맑게 해 주는 동시가 아니라, 마음 맑은 어린이가 앞으로도 마음 맑은 어른으로 크고, 언제까지나 마음 맑은 사람이 되어서, 어린이 스스로와 어린이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자연 목숨붙이와 삶터를 맑게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비손이 담긴 동시입니다. 마음이 맑은 어린이가 쓰는 어린이시가 아니라, 어린이 눈높이에서 꾸밈없이 쓰는 어린이시요, 어린이 스스로 어린이 삶을 보여주는 어린이시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쓴 어린이시를 읽으면, 어린이 마음을 잃은 어른들이 미처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하는 잘잘못을 돌아볼 수 있는 가운데, 어린이가 무엇을 바라고 꿈꾸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또 무슨 사랑을 나누는지를 곱씹을 수 있습니다.


 〈먼지〉

 책장 앞턱에
 보얀 먼지.

 “먼지야, 자니?”

 손가락으로
 등을 콕 찔러도 잔다.
 찌른 자국이 났는데도
 잘도 잔다.



 아기는 저한테 장난을 치는 어른을 알아차립니다. 아기는 저한테 사랑을 쏟는 어른을 느낍니다. 아기는 저를 괴롭히는 어른을 알아봅니다. 아기는 저를 어루만져 주는 어른 손길을 압니다.

 아기는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을 할 줄 모르기에, 어설픈 어른들은 아기가 어른들 마음이나 뜻을 모르려니 잘못 짚곤 합니다. 그러나 말마디에 담기는 기운이 있고, 눈빛과 몸짓에 배인 낌새가 있습니다. 몸으로 살피는 아기이고, 마음으로 얘기 나누는 아기입니다. 참되게 기울여 주는 마음씀을 아는 아기이고, 사랑으로 다가와 주는 매무새를 느끼는 아기이며, 믿음으로 껴안으려는 손길을 붙잡는 아기입니다.

 우리들 어른은 정치를 하고 경제를 하고 문화를 하고 교육을 하고 과학을 하고 사회운동을 한다고들 하는데, 이런 여러 가지를 하는 동안 우리가 거쳐 왔던 어린 나날을 돌아보고, 지금 어린 나날을 보내는 아기를 둘러보며, 앞으로 태어나 자랄 아기를 톺아볼 수 있다면, 스스로 멈추어 고이는 일이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날을 못 보고 오늘날을 못 느끼며 앞날을 못 살피기에, 자꾸만 낡은 틀과 법과 테두리에 갇힌 채 얕은 셈속과 검은 돈과 먼지에 지나지 않는 끈만 부둥켜안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매듭〉

 엄마를 좇아
 바느질을 한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맨다.

 “매듭을 지어 놓아야
 실이 풀리지 않는단다.”
 ……


 옆지기 식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나들이를 가서 열흘 남짓 머물고 있습니다. 아기한테 이모가 되는 처제는 바깥으로 볼일을 보러 나가거나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면서도 일산집에 머물고 있는 귀여운 아기가 생각이 나서 일찍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또한 인천과 일산을 오가면서 일을 하느라 고달프지만, 아기 기저귀를 빨거나 안고 어르며 노래를 불러 주거나 함께 놀 때에는 시름이 가십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어른 된 우리들이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는 매무새만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아이든 이웃 아이이든 살붙이 아이이든’ 둘레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줄 알고 사랑할 줄 알며 껴안을 줄 아는데다가 돕고 함께할 줄 아는 몸짓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세상에는 따스함과 넉넉함이 좀더 넓고 깊이 자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배고파 칭얼대는 아기를 보면서 배고파 울고 있는 이웃을 보게 되고, 졸려서 잠들려는 아기를 보면서 잠잘 곳이 없이 한데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웃을 보게 되며, 신나게 엄마젖을 빠는 아기를 보면서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고단한 비정규직과 장애인과 이주노동자와 농사꾼과 낮은자리 일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큰이모부〉

 큰이모부는 착하다.
 나를 혼내지도 않고
 일찍 자라고 하지도 않는다.

 옷을 벗길 때는
 코나 귀가 뒤집히지 않게
 조심조심 벗겨 준다.
 코를 풀게 할 때도
 휴지로 코 밑을 세게 닦지 않는다.
 ……



 오늘도 인천으로 일하러 돌아오면서, 전철간에서 버르장머리없는 사람을 수없이 부대낍니다. 수없이 부대끼며 생각에 잠깁니다. 전철간 한쪽 구석에 서서 사람들 물결에 휩쓸리거나 거슬리지 않고자 있어도, 어김없이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책을 펼쳐 밑줄을 그어 가며 읽고 있는데 팔꿈치를 툭툭 치면서 미안하다 소리 한 마디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근 때라 미어터지는 전철 하나를 보내고 뒷차를 기다리며 맨 앞자리에 서 있는데, 어느새 제 앞으로 끼어들어 먼저 올라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그쪽을 쳐다보게 됩니다. 때때로 자기가 치고 지나간 사람 쪽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눈을 마주칩니다. 이때, 고개라도 살짝 숙여 준다면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가볍게나마 가라앉을 테지만, 똥씹은 얼굴이라든지 그예 메말라 비틀어진 얼굴로 콧방귀 뀌듯 잽싸게 돌려버리는 고갯짓을 볼 때면, 마음이 잔뜩 무거워집니다.

 이 나라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아니된 지 오래되었고, ‘동방 예의지국’이란 웃기는 옛날이야기가 된 지도 오래되었지만, 낯모르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굴 수 있는 이 못나고 헐벗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언제부터 이렇게 골고루 퍼져나갔을까 궁금합니다. ‘이웃사촌’ 사라진 지 까마득하다고 하지만, ‘이웃경쟁자’나 ‘이웃도둑’처럼 여기는 마음은 참으로 언제부터 우리 마음밭에 또아리를 틀고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강아지풀〉

 무릎에 올려
 안아 주고 싶다.
 강아지풀.
 ……



 돈만 버느라 마음이 돈다발처럼 차가워지고 말았는가요. 시 한 줄 읊을 줄 모르고, 아기한테 또 어린이한테 또 푸름이한테 또 젊은이한테 살가이 시 한 줄 읽고 나눌 줄 모르면서, 오로지 돈만 움켜쥐려고 하는 동안 가슴은 차갑게 식어 버리고 말았는가요.

 퀴즈대회에 나가서 ‘우리 말 달인’이나 ‘퀴즈 달인’은 될는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눌 아름다움은 하나도 모르는 바보가 되고 말았는지요. 대학 졸업장 없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슬기와 가르침은 한줌도 챙기지 않는 얼간이가 되고 말았는지요.


 〈귀뚜라미〉

 밤길을 걸어 돌아오는데
 컴컴한 구석빼기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귀뚤귀뚤 귀뚜르르르

 귀뚜라미가 울자
 컴컴하던 그 구석빼기가 환해졌다.



 아기한테 동시 하나 읽어 주면서 제 마음속으로도 동시라는 씨앗 하나를 심습니다. 아기와 나란히 누운 옆지기한테 동시 하나 읊어 주면서 제 가슴속으로도 동시라는 새싹 하나를 보듬어 봅니다.


 (2) 동시모음 《먼지야, 자니?》


 1949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예순 나이가 된 이상교 님이 쓴 동시를 모은 《먼지야, 자니?》를 읽습니다. 동시모음치고는 좀 두툼하고 책값이 센데, 시는 어렵지 않게, 또 금세 읽어 내립니다. 말끔하게 읽히고 깔끔하게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시와 함께 그림을 엮어 놓고 있어서, 시를 읽는 동안 말마디를 입에서 굴리고, 그림조각을 눈으로 담습니다.


 〈산새〉

 산새는
 노랫소리가 곱다.

 산에서 나는
 동그랗고
 예쁜 산열매를 따 먹고 살아
 노래가 동글동글 곱다.

 산새는
 날개 빛깔이 곱다.

 산에서 나는
 가지가지 빛깔
 산열매를 따 먹고 살아
 날개가 알록달록 곱다.



 드문드문 군더더기가 있네 하는 대목이 보입니다. 한 줄 또는 석 줄쯤 슬쩍 덜어내면 한결 매끄러우면서 깊이가 더해질 텐데 싶은 대목이 보입니다. 오늘날 아이들로서는 도무지 겪어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쓴 대목이 보입니다.

 냇물이 말라 버린 대한민국이지만, 냇물이 남아나게 하지 않는 이 나라요, 그나마 냇물이 남아서 흐르는 곳에서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 주워 와 책상맡에 놓거나 동무한테 선물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겠습니까. 무시무시한 물길이 서울부터 부산까지, 또 서울에서 인천으로 난다고 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품을 쓴다는데, 무슨 동시가 있고 어린이시가 있으며 어른시가 있을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산에는 산새가 아닌 부동산투기만 있고, 그나마 남은 산에는 케이블카를 놓느니 구멍을 뚫어서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내느니 하고 시끌벅적한 이 나라입니다. 그나마 도시에서 참새나 비둘기를 구경하기도 수월하지 않을 뿐더러, 참새와 비둘기는 새로 여기지 않는 우리들이 되었는데, 그러면 ‘새’란 어떤 짐승을 가리키고, 새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는 좀처럼 생각해 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부모님 자가용으로 학교에 갔다가, 노란 학원차를 타고 학원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오늘날 아이들인데,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도 이와 똑같은 굴레를 뒤집어써야 할는지, 앞으로는 달라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두 다리로 걸어서 학교에 가거나 자전거를 몰고 학교에 가거나 버스를 잡아타고 학교에 갈 아이들이 늘어날 수 있을는지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들하고 골목길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도 골목길은 차츰차츰 사라질 뿐더러, 골목길이 고즈넉하게 남아 있는 우리 동네에서조차 아이들은 걷지를 않고 차를 탈 뿐입니다. 골목꽃과 골목빨래와 골목집과 골목사람 자취를 나누고 싶어도 학원에 매이고 시험교재와 학습지에 매이게 되는 아이들이니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섬돌 밑에 줄기를 밀어낸 길풀을 들여다보자고 할 수 없습니다.


 〈봄눈〉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씨.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꽃씨.

 흙에 발이 닿자마자
 풀씨, 풀꽃씨 내려놓고
 보풀보풀 봄눈 숨지고 만다.

 숨진 자리마다
 풀은 돋아 자라고
 눈송이만 한 풀꽃을 매단다.



 눈이 오면 눈사람을 굴리거나 눈싸움을 하거나 눈놀이를 즐기는 우리들이 아니라, 찻길에서 차가 못 다닐까 근심스러워 염화칼슘 뿌려대는 어른이 되고 만 우리들입니다. 고작 차유리에 내려앉은 얇은 눈더미를 긁어서 대충 뭉쳐서 던지고 끝납니다.

 사랑을 잃은 어른이라 사랑을 못 얻는 아이들이 되어 가는구나 싶습니다. 사랑 잃거나 버린 자리에 돈을 끼워넣었으니, 돈은 넘치고 쎄서 모자람 없이 장난감을 사고 엠피쓰리를 들으며 알록달록 새옷을 차려입는 아이들이 되어 가는구나 싶습니다.

 동시가 박제가 되고, 어린이시가 논술지옥이 되는 때입니다. 《먼지야, 자니?》라는 동시모음을 가슴에 안고 조용히 쓰다듬습니다. (4341.12.2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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