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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엄마 이야기 ㅣ 사계절 그림책
신혜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6월
평점 :
엄마랑 할머니랑 증조할머니가 만나서
[그림책이 좋다 54] 신혜원, 《세 엄마 이야기》
- 책이름 : 세 엄마 이야기
- 글ㆍ그림 : 신혜원
- 펴낸곳 : 사계절 (2008.6.27.)
- 책값 : 9800원
(1) 집살림은 하늘이 내린 고마운 일
그제 저녁부터 갑자기 뱃속이 얹히고 몸살 기운이 돌아서 그저 이부자리에 누워 꼼짝을 못합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팠던 적이 있나 싶고, 잠바를 입고 누워서 이불을 석 장 덮었는데에도 몸이 덜덜 떨립니다. 얹힘과 추위는 가시지 않고 몸은 처지면서 눈물이 저절로 샘솟습니다. 이렇게까지 아플 수 있나 싶은데, 꼬박 스무 시간 남짓 누워서 눈물 흘리고 갤갤대니 조금은 나아집니다. 히유, 좀 살아나는가 싶어서 밀린 기저귀 빨래를 합니다. 그러나 기저귀 몇 장 낑낑대며 빠니 몸은 다시 무거워져서 몇 시간 동안 도로 드러눕습니다. 그렇게 드러눕고 일어나 아까 못 다한 기저귀 빨래를 또 하고, 다시 드러눕고.
몸이 아파도 집안일을 미뤄 둘 수 없습니다. 아기한테 댈 천기저귀가 떨어지면 안 되니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할 만큼 아프면서도 빨래 걱정이 그치지 않습니다.
문득, 제 어릴 적 우리 어머니는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형과 저를 키우며 살림을 하는 어머니가 아플 때는 없었는지. 그무렵 몸이 아파서 드러누운 어머니를 누가 보살피거나 집안일을 치렀을는지.
.. 짐을 다 풀기도 전에 엄마는 고민에 빠졌어요. “도대체 이 넓은 밭을 어떻게 하지? 뭐든 심어야 할 텐데…….” … 콩 열다섯 알을 심고 엄마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어요. “이 많은 콩을 언제 다 심는담? 혼자서는 도저히 못하겠어!” 그리고 소리쳤어요. “엄마! 도와줘!” .. (3, 8∼9쪽)
옆지기도 아프고 지아비도 아프니 아기는 여느 때와 달리 젖을 제대로 안 먹고 잠을 제대로 안 들며 자지러지게 울기만 합니다. 아빠가 조금 살아나서 아기 손을 잡아 주고 볼을 부벼 주고 배를 쓸어 주고 하면 아기는 울음이 조금 잦아듭니다. 아기는 지 엄마 아빠가 몸이 아픈 줄을 느끼고 있겠지요. 그래서, 이처럼 자지러지게 울면서 함께 아파해 주려고 하지 않느냐 싶곤 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아기가 태어나서 백일을 넘도록 하루도 제대로 쉴 틈이 없습니다. 빨래며 밥하기며 치우기며 숱한 일을 어떻게 치러냈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잠을 잠대로 잔 날은 없고, 잠깐 동안 볼일을 보러 혼자 나들이를 나가야 할 때면 집 걱정이 가득합니다.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밀린 일감이 넘칩니다.
어쩌면 백일을 넘어 넉 달이 조금 안 되는 동안 이렇게 몸이 아프지 않고 버티어 낸 일이 대단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백일이란 아기가 그때까지 튼튼히 자라 준 일을 기리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백일까지 힘쓰고 애쓴 어버이 두 사람을 기리는 자리이기도 하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태어난 날을 기리는 ‘난날잔치’도 우리 자신을 기리기보다는 우리를 낳아 기른 어버이를 기리는 날이 아니랴 싶습니다.
.. 다섯 줄을 만들고 얼굴이 빨개진 엄마의 엄마가 말했어요. “이러다간 한 달이 가도 밭을 못 만들겠어!” 엄마의 엄마는 소리쳤어요. “엄마! 도와줘!” .. (12∼13쪽)
물 한 모금 빨지 못한 채 하루하고 이틀을 보낸 아침, 비로소 몸이 제자리를 찾는가 싶어 효소 탄 물을 마시고 밥술을 뜹니다. 어젯밤에 우격다짐으로 해 놓았으나 아침이 되도록 마르지 않은 기저귀 빨래 몇 점을 옥상마당에 널고, 아침에 새로 한 빨래 몇 점 또한 옥상마당에 함께 널어 놓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형과 저를 천기저귀만을 써서 길렀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천기저귀 빨래를 거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때가 언젠데 생각이 나냐?’고 하실 뿐입니다. 벌써 서른 몇 해가 훌쩍 지나간 일이니 떠오르지 않으실 테지만, 아버지가 새벽바람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일터로 나가 밤바람으로 집으로 돌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집안일이며 아기 돌보기는 오로지 어머니 몫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집안일이며 아기 돌보기를 살갗으로 느끼지 못한 채 살아오셨고, 어머니는 집안일이며 아기 돌보기며, 그리고 여러 가지 부업까지 하여 집살림을 보태기까지 하는 가운데 당신 젊음과 삶을 모두 바치셨으리라 봅니다.
.. 콩밭에선 콩 다발들이 가을 햇볕에 잘 마르고 있어요. 엄마는 다시 행복해졌어요. 하지만 엄마의 엄마는 딸네 밭에서 콩이 잘 마르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엄마의 엄마의 엄마는 다 마른 콩을 손녀딸이 잘 털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 (30∼31쪽)
동네에서, 또 동네 바깥에서, 나이 쉰 줄을 넘긴 아저씨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가 곧잘 있습니다. 이분들은 우리 두 사람이 아기를 늘 안고 어르며 젖 먹이고 기저귀 갈고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요새 사람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런 말씀 뒤에 으레, ‘나는 애들이 어릴 때 많이 안아 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하기는, 한국과 같은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 된 사람이, 남편 된 사람이, ‘집구석에 처박혀’ 아기 돌보기를 하거나 집살림을 꾸린다는 ‘하찮은’ 일에 몸을 바치거나 시간을 들이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돈 버는 일이 아니’라서 ‘값어치없는 일’로 여겨지는 아기 돌보기요 집살림 꾸리기입니다. 적잖은 젊은 아빠들은 ‘애가 똥을 누면 더럽다며 멀리 내뺀다’고 합니다. 다른 아기도 아닌 바로 지가 낳은 아기이면서, 지 아기 똥을 더럽다고 내빼면, 그 아기 똥은 누가 치울는지요. 지저분하고 더러우니 ‘하찮은 일을 도맡으며 값어치없는 일에 온삶을 바쳐야 할 여자’들만 치워야 할까요. 그리고 그 하찮고 값어치없는 일이기에, 당신들 아버지와 어머니가 늙어서 몸져눕게 된다면, 당신들 아버지와 어머니가 똥오줌을 못 가리고 이불이고 옷이고 오줌을 싸고 똥을 지려도 ‘에그 더러워!’ 하고는 손사래를 치게 될까요. 당신을 낳은 아버지 어머니를 당신 손이 아닌 ‘돈으로 사서 쓰는 일꾼’한테 떠넘기고 탱자탱자 ‘놀러’ 다니고, ‘돈만 벌러’ 바깥으로 나돌게 될까요.
.. 엄마는 맛있는 된장 꿈을 꾸었어요. 엄마의 엄마는 맛있는 된장 꿈을 꾸며 코를 골았어요. 엄마의 엄마의 엄마는 꿈도 꾸지 않고 맛있게 잠들었어요. 내년에도 엄마는 콩을 심을까요? .. (38쪽)
책을 좋아하고 글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다음, 책과 글로 한삶을 마무리한 사람들 이야기를 부지런히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을 찬찬히 살피면서 여러모로 비슷한 대목을 많이 느낍니다. 모두들 아기를 안 낳고 살거나 혼인을 안 하고 삽니다. 혼인도 하고 아기를 낳았어도 집살림은 자기가 안 하고 다른 사람 몫입니다. 소설쓰는 공선옥 님처럼 집살림과 아기 돌보기를 껴안는 글쟁이나 책쟁이는 몹시 드뭅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나라안 사람도 그렇고 나라밖 사람도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우리들한테 두루 사랑받는다는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분들인데, 정작 이분들 삶에서 ‘살림’이 보이지 않아요. 틀림없이 이분들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서 고운 목숨 하나 받아서 이 땅에서 사랑과 믿음을 넉넉히 누리면서 컸을 텐데, 그 어머니 사랑과 아버지 믿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땅에 발붙이는 느낌이 보이지 않고, 땅에 깃드는 얼이 나타나지 않으며, 땅에 배인 넋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땅과 함께하는 삶이 느껴지지 않고, 땅과 어깨동무하는 매무새를 찾을 수 없으며, 땅하고 어울리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못합니다.
알쏭달쏭한 일입니다. 참 아리송한 노릇입니다. 다만 한 가지, 제 깜냥으로 헤아리기로는, 나라 안팎 숱한 훌륭한 글쟁이와 책쟁이 분들께서는, 한 사람이 한 목숨 얻어서 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길에서 그지없는 아름다움이요 거룩함이요 즐거움이 될 한 가지를 놓치거나 버리거나 잃거나 잊거나 멀리하거나 모르지 않느냐 싶어요. 아이가 다 크고 난 다음 ‘어릴 때 좀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해 아쉽다’고 하는 늙수그레한 아저씨들마냥, ‘어릴 때 당신 아기 똥기저귀 갈아 주는 고단함이 기쁨이었음’을 못 느끼고 만, 하늘이 내려준 고마운 살림살이였음을 못 부대끼고 만, 우리 나라 남자들(요새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또 글쟁이와 책쟁이 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2) 즐거운 그림책 《세 엄마 이야기》
그림책 《세 엄마 이야기》를 읽고 봅니다. 먼저 제가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즐겁게 읽고 봅니다. 다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고 책값을 셈해 집까지 들고 와서 옆지기한테 보여줍니다. 그런 뒤 옆지기는 아기를 품에 안고 글을 읽어 주면서 그림을 보여줍니다. 아직 갓난쟁이인 우리 아기가 이 그림책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무늬나 빛깔은 느끼고 있지 않느냐 싶어요. 뭐, 아무것도 못 느껴도 괜찮습니다. 아기로서는 지 엄마가 자기를 품에 안고 있는 따스함이 좋을 테고, 지 엄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싱그러움이 좋을 테니까요.
모두 네 여자(주인공인 어린아이, 어린아이네 엄마, 어린아이네 엄마한테 엄마, 어린아이네 엄마한테 엄마인 분한테 엄마)가 나오는 《세 엄마 이야기》는 네 세대에 걸쳐서 저마다 어떤 삶을 꾸려왔고 무슨 삶을 소담스레 여기면서 지냈는가를 곱씹게 해 줍니다. 엄마네 딸은 엄마가 꾸리는 삶을 보면서도 배우고, 엄마가 딸아이한테 가르치는 삶도 배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힘들 때면 언제나 엄마가 달려가마’ 하는 삶을 배워요.
가만히 보면, 딸네 엄마뿐 아니라 아들네 엄마도 당신 아이한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득달같이 달려옵니다. 부리나케 찾아옵니다. 아무리 홀로 일어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 하더라도, 어머니로서 당신 사랑은 팔짱 끼는 삶이 아니라, 곁에서 ‘잘하고 못함을 가리지 않고 너그러이 굽어살피면서 한손 거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큰일이 아니고, 함께할 수 있음이 큰일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딸아이가 엄마가 되어도 아직 모자라거나 어수룩한 데가 있기 마련이고, 이 모자람과 어수룩함은 ‘무엇이 모자라고 무엇이 어수룩한 줄 깨달은 당신’이 돌봐 주면서 따뜻하게 가르쳐 주면서 찬찬히 물려줄 대목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맺어지는 사이가 아니라 사랑으로 맺어지는 사이입니다. 지식으로 맺어지는 사이가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지는 사이입니다. 다 함께 땀흘리니 흐뭇하고, 다 함께 누리니 뿌듯합니다. 다 함께 모여 수다를 떠니 신나고, 다 함께 모여 밥술을 뜨니 세상 부러울 일이 없습니다.
그림책 《세 여자 이야기》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터를 옮긴 젊은 엄마가 밭에 콩을 심어 거두는 이야기 하나로 살뜰하게 꾸며졌습니다. 비록 젊은 엄마는 딸아이를 낳아 기르는 ‘엄마’이지만, 낳기만 낳았을 뿐 엄마 노릇은 젬병인 분이시기에 뾰족구두를 신고 밭일을 합니다. 젊은 엄마네 엄마는 집일을 많이 하셨던 분이라 젊은 엄마와 달리 운동신을 신고 밭일을 합니다. 젊은 엄마네 엄마한테 엄마인 분은 농사꾼이라서 고무신을 신고 밭일을 합니다. 일을 마치고 난 다음에도, 젊은 엄마는 얌전을 떨며 손과 낯을 씻으나, 젊은 엄마네 엄마는 손발을 씻고, 젊은 엄마네 엄마한테 엄마인 분은 농사 연장을 말끔히 씻습니다.
다 다른 삶이요 다 다른 넋입니다. 그러나 이 다 다른 삶과 넋이 한 자리에 모입니다. 서로 허물이 없습니다. 오붓합니다. 이 허물없음과 오붓함, 여기에다가 살뜰하고 웃음나는 이야기 한 자락이 그림책 《세 엄마 이야기》가 우리한테 베푸는 고마운 선물보따리입니다.
(3) 그러나 아쉬운 대목
즐거운 선물보따리인 《세 엄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러 대목에서 아쉽습니다. 이야기 얼거리를 살피면, 이 그림책이 나오게 된 큰 밑그림은 ‘철없’기는 했어도 ‘인절미를 먹고 싶은 젊은 엄마가 콩을 심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고단하게 밭일을 해서 콩을 거둔 다음, 처음 젊은 엄마가 꿈꾸었듯 인절미 해 먹는 일이 나와야 옳습니다. 젊은 엄마는 틀림없이 떡하는 일을 하나도 모르는 채 그저 인절미만 먹고 싶었을 터이니 콩고물을 내고 떡을 찧고 할 때마다 또다시 엄마를 부르고 그 엄마는 다시 엄마를 부르는 일이 되풀이되었을 테고,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면서도 재미가 넘치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끝마무리에서는 엉뚱하게 ‘된장 담그기’로 나아갑니다. 젊은 엄마는 그토록 먹고파 했던 인절미인데 아무 거리낌없이 된장 담그는 일에 빠져듭니다. 바라보기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림책 흐름에서는 매끄럽지 못합니다. 나중에 《다시, 세 엄마 이야기》라고 해서 두 번째 이야기가 나와, 인절미 해 먹는 이야기를 새롭게 펼쳐 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다음으로, 그림책에서 잘못된 대목 여섯 가지입니다. 다음 여섯 가지는 이 그림책이 다음 쇄를 찍을 때 꼭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ㄱ) 3쪽을 보면, 도시에서 시골로 옮길 때 타고 간 자동차가 풀빛입니다. 그런데 5쪽에서는 빨강 자동차로 바뀌어요.
(ㄴ) 9쪽에서 ‘엄마의 엄마’가 나오는데, 할머니인 ‘엄마의 엄마’는 ‘경주용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매무새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탄 자전거는 경주용 자전거가 아닌 ‘산악자전거와 같은 1자 손잡이’예요. 엄마네 엄마가 경주용 자전거 타는 매무새로 두고프다면 자전거도 경주용 자전거(바퀴가 가느다랗고 손잡이는 양불처럼 생긴 자전거)를 타고 나오게끔 그려야 합니다. 산악자전거를 타는 매무새로 그리겠다면 할머니 매무새를 고쳐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그림처럼 여느 생활자전거를 타고 나타나는 모습으로 그리겠다고 할 때에도 할머니 매무새는 고쳐야 합니다. 경주용 자전거와 산악자전거와 생활자전거 타는 매무새는 모두 다릅니다. 덧붙이자면, 산악자전거를 탈 때에는 안장을 아무리 올려도 9쪽 그림에 나오듯이 허리를 앞으로 잔뜩 숙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허리를 앞으로 잔뜩 숙이고 타면 대단히 위험하게 되어요. 더욱이, 손잡이가 1자이기는 하나, 그림에 나오는 자전거는 ‘여느 생활자전거’입니다. 게다가, 페달 발구르기도 잘못되었습니다. 오른 페달이 위로 가 있으면 왼 페달은 밑으로 가 있어야 하는데 왼 페달은 밑이 아니라 가운데 크랭크축에 있습니다. 자전거 좋아하는 아이들이 이 그림을 보았다면 어떻게 생각할는지 아찔합니다.
(ㄷ) 19쪽에 ‘엄마의 엄마’가 두 손에 ‘낫’을 들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20쪽에는 “엄마와 엄마의 엄마는 호미로 열심히 풀을 뽑았어요” 하고 나옵니다. 더욱이 21쪽에서 ‘엄마의 엄마의 엄마’도 ‘낫’을 들고 나타나시는데, 22쪽에서는 ‘괭이’를 들고 풀을 캐냅니다. 그림과 글이 똑같이 어울려야 하지 않을까요? 낫을 들고 나타나서 호미질을 했다거나, 낫을 들고 날아와서 괭이질을 했다니, 아무래도 이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이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해 한다거나, 농사 연장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은 ‘호미가 어떻게 생기고 낫이 어떻게 생긴 줄을 잘못 받아들일 걱정’이 있습니다. 조금 더 덧붙여 보면, 가장 큰 할머니가 괭이질을 하는 손 매무새도 잘못되었습니다. 그림책대로 괭이질을 하면 괭이자루가 부러질 뿐더러 밭을 일굴 수 없습니다.
(ㄹ) 23쪽을 보면, “엄마의 엄마의 엄마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웃었어요” 하고 나옵니다만, ‘엄마의 엄마의 엄마’는 아주 쪼글쪼글 볶은 머리라서 ‘쓸어내릴’ 수 없어요. 이때에는 ‘쓸어올린다’고 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ㅁ) 3쪽 그림에서 집 뒤에 복숭아나무로 보이는 꽃 또는 열매가 발그스름한 나무가 서 있는데, 5쪽에서는 이 나무가 사라지고, 그냥 푸른잎나무로 바뀝니다.
(ㅂ) 21쪽에서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낫을 들고 짠 하고 날아옵니다. 이때 ‘엄마의 엄마의 엄마’는 고무신을 신고 있는데, 고무신 바닥이 운동화 바닥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지난날 고무신을 신고 다니신 분들은 모두 알 터인데, 검정고무신은 바닥이 판판합니다. 다만, 요사이 나오는 자주빛 고무신은 바닥이 운동화처럼 ‘1111’과 같이 빗살이 새겨져 있어서 덜 미끄러지게끔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그림책에 나오는 고무신이 자줏빛이어야 할 텐데 검정빛입니다. 흰고무신도 바닥에 빗살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무신을 그리려 했다면 마땅히 알맞는 빛깔로 그려야 합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할머님들은 검정고무신을 잘 안 신습니다. 검정고무신을 신다 보면, 처음 한 달 동안 뒷꿈치나 앞꿈치가 나가게 마련이라, 말랑말랑하면서 잘 안 닳는 자주빛 고무신을 훨씬 많이 신으셔요.
저로서는 아쉬운 대목을 여섯 가지 들었습니다만, 좀더 꼼꼼히 살피면 더 많은 아쉬움이 드러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 몇 가지가 있다 해서 그림책 《세 엄마 이야기》 빛이나 값이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랑스럽고 애틋하고 아름다우며 웃음 묻어나는 즐거운 그림책입니다. 그저, 앞으로는 이와 같은 잘못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며, 이처럼 살아가는 기쁨이 짙게 묻어나는 그림책이 꾸준히 나와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4341.12.10.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