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2
차소리 시끄럽지, 손전화 소리 귀 따갑지, 사람들 수다 쟁쟁거리지, 우리 스스로 부처님처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책읽기는 어렵습니다. 자리에 앉기 쉽지 않으나 자리에 앉아도 옆에 앉은 이들이 밀거나 다리 벌리거나 신문 펼치면 고달픕니다. 서서 책을 읽는 동안, 밀고 치는 사람들한테 부대낄 때에도 힘이 듭니다. 잠깐 눈을 쉬고자 고개를 들면 수많은 광고판으로 눈이 아프고, 고개를 숙여 창밖을 내다보면 이번이 어느 역에 서는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역마다 역이름 적어 놓은 자리가 너무 작고 글씨도 너무 작습니다.
덜컹거림은 버스와 견주면 많이 적다고 할 전철일 텐데, 아예 없지 않을 뿐더러 썩 밝지 않은데다가 깜빡거리는 다 된 형광등이 제법 많고, 땅밑으로 들어가면 형광등 불빛은 흐려서 눈이 아픕니다. 더군다나 공기는 얼마나 나쁜지요.
그렇지만, 바쁜 도시사람들로서는 일터에서 책을 못 읽고 집에 가도 책을 못 펼칩니다. 일을 마치고 책을 구경할 책방 나들이를 해 볼 엄두는 얼마나 낼 수 있을는지요. 그나마 저녁에 술 한잔 걸친 뒤에라도 전철에 몸을 싣고서 겨우겨우 책 한 쪽이나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달파도 벗이요 힘이 들어도 동무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사람들 북적이고 담배 냄새며 화장품 냄새며 갖가지 냄새가 범벅이 된 타는곳에 멀뚱멀뚱 다리 아프도록 선 채로 지하철이나 전철을 기다리며 책장을 펼치고 있으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입니다. 온갖 힘겨움과 고달픔을 잊고 책나라로 뛰어듭니다. 그러다가 사람물결에 휩쓸려 전철칸으로 빨려들어가서 손잡이 하나 못 잡고 허우적거리노라면 애써 펼치고 있던 책은 구겨지고 몸도 구겨지고 마음도 구겨집니다. 그나마 나 혼자 구겨지지 않고 전철에 탄 모두가 구겨지니 마음을 달랠 수 있으려나요. 뭐, 조금도 마음을 달랠 만한 일은 아닙니다만.
언제나 머나먼 전철길을 달리기 때문에(인천으로 돌아올 때는 끝에서 두 번째), 오징어가 된 채로 웬만큼 시간을 보내고 나면 숨통이 트이고 책을 펼칠 자리도 넉넉해집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몸 고단함이 크기 때문에 책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어서 눈이나 감고 잠들어 버리고 싶은데, 감기는 눈을 부릅뜨거나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새힘을 북돋우면서 글줄 하나라도 읽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책 하나에 담긴 빛접은 줄거리를 새기자고, 달콤한 알맹이를 맛보자고, 시원한 이야기에 젖어들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십 분, 또는 이십 분, 이렇게 눈 부릅뜬 채로 책에 묻히고 있으면 어느새 없었던 힘이 차츰 솟습니다. 구부정했던 어깨가 펴집니다. 후들거리던 다리에도 힘이 오르고, 뒤숭숭하고 띵하던 머리도 살살 깨어납니다. 이윽고 마지막 역에 닿아 마지막 사람물결과 함께 전철역을 빠져나오면, 개미새끼 하나 없이 어둡고 고즈넉한 골목길. 홀로 골목길을 거닐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옆지기나 아기하고는 함께 나들이를 할 수 없던 날, 혼자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빠는, 옆지기한테든 아기한테든 무어 선물할 만한 것 하나 손에 들고 있지 못합니다. 그저, 다시 찾은 맑은 마음과 몸뚱아리 하나로 집 문을 따고 들어가서, 하루 내 아기와 씨름한 옆지기를 달래고, 칭얼거림으로 엄마를 들볶은 아기 기저귀를 갈고 빨고 널고 말리고 개고 씻기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4341.9.20.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