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군대위안부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39
요시미 요시아키 지음, 이규태 옮김 / 소화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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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65 ― 일본은 ‘성노예’, 한국은 ‘성폭력’
 :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군대위안부》



- 책이름 : 일본군 군대위안부
- 글 : 요시미 요시아키
- 옮긴이 : 이규태
- 펴낸곳 : 소화 (1998.8.20.)
- 책값 : 6700원


 (1) 어머니 일과 집안일과 남자


 아기 손발톱을 자릅니다. 아기는 손톱이 길면 얼굴을 할퀼 수 있기 때문에 조금만 자라도 가위도 잘라 주어야 합니다. 어른들 쓰는 손톱깎이로는 아기 손톱을 깎을 수 없습니다. 여느 때에는 자를 수 없고, 아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때, 아니면 엄마젖을 물고 있을 때 자릅니다. 그러나 잘 때에는 발가락이 간지러워서 깨기도 하기에, 웬만하면 젖을 물 때 자릅니다.

 아기 손발톱을 자른 뒤, 옆지기 손발톱을 깎습니다. 아기를 낳은 뒤부터 오늘까지 아흔 날 하고도 이틀이 지났으나, 옆지기는 아직 제 몸을 되찾지 못합니다. 식사장애가 있는데다가 산부인과에서 받은 아픔이 모두 가시지 않기도 했지만, 갓난쟁이하고 늘 붙어 있어야 하다 보니, 집 바깥으로 바람 쐬러 나들이를 하기조차 힘들어서 마음이 지치는 바람에 몸이 함께 지칩니다.

 이리하여 손발톱을 깎아야 한다고 스스로 말은 하지만, 깎기 힘들어서 아기한테 젖을 물린 채 벽에 기대어 잠듭니다. 지아비는 옆지기 손톱과 발톱을 차근차근 깎습니다. 다 깎은 손발톱을 보는 옆지기는 “되게 바짝 깎네.” 하면서 “나는 이렇게 못 깎는데.” 합니다. “그다지 바짝 깎지도 않았는데.” 하고 대꾸하니, “바짝 깎아도 빨래를 못하니 손톱이 지저분하네.” 하고 이야기합니다.


.. 이 책은 종군위안부와 그 제도의 역사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는 그 실태를 은폐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일본군 성노예’ 또는 ‘군용 성노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전후 약 50년 간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그 본질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 이 책의 커다란 목적의 하나이다 … 문제가 되는 것은 위안소에서 강제, 미성년자의 사역, 징집시의 강제와 그에 대한 일본 국가의 책임이다. 나아가, 위안소 제도라는 군용 성노예 제도를 만들어 운영했다는 것이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의 논쟁은 단지 위안부 문제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일본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인의 자긍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본인의 역사 인식과 아이덴티티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의 민족주의적인 언설의 배경에는 한일 간 또는 일본인과 다른 아시아인과의 역사 인식의 차이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  (7, 8, 9쪽)


 두 여자 손발톱을 자르고 깎은 뒤 제 손발톱을 깎다가 잠깐 멈칫합니다. ‘빨래를 못하니 손톱이 지저분’해진다고?

 물끄러미 제 손톱을 들여다보고 발톱을 만져 봅니다. 참말 제 손발톱에는 때가 하나도 없습니다. 남들보다 손을 자주 씻는다고 할 수 없고, 아니 손을 씻는 일도 드문데, 손발톱에는 때가 조금도 없습니다.

 옆지기 말을 미루어 보니, 날마다 퍽 긴 시간을 아기 기저귀를 빨고 옆지기와 제 옷을 빠느라 보냅니다. 새벽마다 콩과 쌀과 여러 곡식을 씻어서 불려 놓습니다. 밥하기와 설거지하기를 도맡고 있습니다. 날마다 한 번씩 아기를 씻깁니다. 한두 주에 한 번씩 이불이나 담요를 한 장씩 빨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날마다 하지 못하기는 하나, 걸레를 빨아 방이며 나무벽이며 훔치고 닦습니다. 딱히 손을 씻는 때는 없지만, 참으로 긴 시간을 물을 만지면서 삽니다. 손에서 물기 가실 겨를이 없으니, 어쩌면 이러저러하는 동안 손발톱에도 때가 앉을 겨를이 없는지 모릅니다.


.. 일본이 개시한 전쟁은 대의명분이 없는 침략 전쟁이었고, 또 승리의 전망이 없는 무모한 전쟁이었다. 이와 같은 전쟁에 휴가 제도도 불충분한 채로 장기간 전장에 장병을 묶어 놓기 위해서 성적 위안이 필요하다고 일본군은 생각했던 것이다 … 일본군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육해군 전부가 전시에는 휴가를 주지 않았다. 더구나 병영 내에서 병사의 인권은 완전히 무시된 채 상관의 엄격한 감시와 사적인 제재가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  (65∼66쪽)


 우리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제 손은 제 국민학교 적 어머니 손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제 국민학생이었을 때 어머니 나이였는데, 어머니는 당신 나이와 견주어 다른 동무네 어머니보다 손이 누렇게 뜨고 마디가 굵고 주름이 많이 잡혀 있었습니다. 어머니 손에서 물기 마를 날은 거의 없었고, 잠깐이나마 자리에 앉아 쉬는 때는 거의 못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참 힘들게 살림을 꾸리시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어머니가 무엇 하나 심부름을 시켜도 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속썩이거나 근심하시지 않도록, 또 어머니 부업을 거들 수 있으면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왜 어머니(여자)들은 우리 어머니뿐 아니라 이웃 어머니들도 그토록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 술동무가 집으로 놀러오면 ‘왜 어머니들만 그렇게 술시중을 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머니한테도 술동무가 있어서 서로 놀러다니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녀차별’이나 ‘남녀평등’이라는 이름을 모르던 때이고, ‘성차별’이나 ‘성평등’이라는 낱말은 들어 본 적이 없던 1980년대에, 인천 제2부두 앞 조그마한 집에서 우리 집 돌아가는 흐름과 이웃사람 꾸려가는 삶을 지켜보면서, 내가 남자로 태어나 부끄러운 노릇이 아니냐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로 태어났어도 그리 좋은 꼴은 못 보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만큼 내가 할 몫이 있다는 뜻이 아니랴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우리 아버지, 또는 이웃 아버지, 또는 학교 남자 교사, 또는 동네 아저씨나 할아버지 …… 둘레에서 보고 부대끼는 숱한 남자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런 멋없고 짜증스럽고 안쓰러운 삶으로 내 앞길을 얼룩지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군인으로부터 성병을 옮겨 받은 것은 위안부들에게는 끔찍한 일이었다. 더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성병에 걸려도 대단한 것은 아니라며 콘돔을 사용하지도 않고 습격해 오는 군인들도 적지 않았다 ..  (171쪽)


 또렷하게 언제부터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퍽 어릴 때부터였는데, 조그맣게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앞으로 커서 제금나게 될 때, 그리고 뒷날 누군가와 짝이 맺어져 함께 살게 될 때에는, 모든 집살림을 내가 하겠노라고.

 이런 꿈을 꾸면서 어머니가 하는 일을 찬찬히 돌아보게 됩니다. 동무네 집에 놀러가면, 동무네 어머님이 하는 밥과 반찬을 하나하나 살핍니다. 처음 보는 밥거리를 보면 어떻게 하는지를 꼭 여쭙니다.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사는지 둘러보고, 우리 집 꾸밈새와 다른 꾸밈새는 더욱 눈여겨봅니다.

 버리는 물건이 없도록 살고, 작은 물건 하나도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된다고 느끼고 있어서, 과자봉지 하나도 안 버리고 모아 두는 버릇이 일찍부터 배어 있습니다. 딱히 다시쓰기를 한다고 배우지는 않았는데, 어머니가 다시쓰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 이 얼음과자 막대기는 어디에 다시 한 번 쓰고, 요 라면봉지는 어디에 또다시 쓸까 하고 머리를 굴렸습니다. 이것도 안 버리고 저것도 안 버리면서 모읍니다. 종이조각 하나도 책갈피로 쓰면 되고, 종이접기를 해서 갈무리를 해도 됩니다.

 한 번 혼인하고 한 번 헤어지고, 다시 한 번 혼인하여 살고 있는 이즈음, 혼자 살 때이든 둘이 살 때이든 집식구 빨래는 거의 제 몫입니다. 하기는, 집식구 밥도 제가 차려 주니까요. 옆지기가 아기를 배었든 배지 않았든, 부모님 집을 나와서 혼자 살던 1995년 4월 5일부터 이제까지, 혼자서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혼자서 집을 치우고 꾸미며, 혼자서 집일을 갈무리하고, 혼자서 밥차리고 쓸고닦고 손빨래하고 살았으니, 서른네 해 삶에서 열네 해 삶이나 집일과 밖일을 함께하는 셈입니다.
 

.. 일본 정부와 군은 조선ㆍ대만에서의 여성 징집에는 국제법상 아무런 제한이 없다고 하여, 조선과 대만을 위안부 공급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 징집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조선의 인구가 대만보다 몇 배 많고, 나아가 중국이 일관된 주요한 전장이었기 때문에 중국인의 동포인 대만인보다는 조선인이 위안부로 삼기에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 또 1956년 일본은 민간인 억류자의 사적 청구권을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에 1000만 달러를 지불하였다. 그러나 억류자가 약 11만 명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당 91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  (182, 208쪽)


 집일은 사회에서 거의 아무런 대접을 받지 않습니다. 다른 이 집에서 밥어미로 일한다면 달마다 100만 원은 쳐주기는 할 텐데, 자기 집에서 살림꾼으로 일하면 돈 한푼이 없습니다. 집살림은 따로 돈이 되기를 바라며 하는 일이 아니니, 돈으로 값을 칠 수 없으며, 돈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있어요. 보람도 있고요. 그러나 집일을 도맡으면서 밖일을 함께하기란, 이 나라 한국에서는 대단히 힘듭니다. 잠이 모자라고 손이 딸리고 몸이 축납니다.

 그래서 새삼스레 깨닫고 알게 되는 일이 많아요. 왜 이 나라 한국에서는 ‘여자 학자’가 드물고 ‘여자 지성인’이 드물며 ‘여자 글쓴이’가 적고 ‘여자 정치꾼’을 찾기 어려우며 ‘여자 사장’을 만나기 힘든지. 왜 ‘남자 무엇무엇’만 넘치는지.

 그러나 또 하나 새삼스레 깨우치고 알아차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제는 퍽 많은 여자들이 집밖에서 일거리를 찾으면서 움직이고 있는데, ‘남자가 집일을 몰라서는 안 되지만, 여자 또한 집일을 몰라서는 안 됨’을 말입지요. 집일은 한 사람이 옹글게 바로서고자 할 때에 몸과 마음에 새겨야 하는 일이라, 여자한테만 떠넘겨서는 안 될 뿐더러, 남자들이 손사래쳐서도 안 되지만, 집밖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남자든 여자든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왜 옛날부터 스승 된 분들이 제자한테 어떤 재주를 물려준다고 할 때면, ‘세 해는 빨래하고, 세 해는 밥을 하고, 세 해는 걸레질을 하고, 그러면서 부지런히 논밭을 갈게 하면서 아홉 해를 보내야 비로소 조금씩 일을 가르쳐 준다’고 했는지를 느껴야 합니다.


 (2) 살아내야 나누게 되는 성평등


 세 식구 손발톱을 자르고 깎자니 꽤나 긴 시간이 듭니다. 옆지기는 몸이 나아지만 제 손으로 제 손발톱을 깎을 테지만, 딸아이는 앞으로 얼추 열 살쯤 될 때까지는 지아비나 지어미가 깎아 주어야 합니다. 귀지가 쌓여서 파 주어야 할 때에도 지아비나 지어미가 파 주어야 합니다. 신발끈을 아이가 스스로 묶자면 이 또한 오래 걸릴 노릇이고, 양말 신기나 옷입기 또한 적잖은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이불 개기, 제 밥그릇 제가 설거지하기, 빨래하기와 개기, 걸레 빨기와 방바닥 훔치기, 밥하기와 찌개 끓이기 들은 언제쯤 스스로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어버이 된 이 가운데 누가 아이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쳐 줄까요.

 우리 집에서야 아빠와 엄마가 함께 물려주고 같이 가르쳐 줍니다. 늘 서로 도와 일하고 함께 놀고 같이 나들이를 다니니, 아이는 엄마아빠 손을 하나씩 잡고 같이 나들이를 다니며 함께 놀고 서로 도와 일을 할 테지요.

 그런데, 우리 아이가 만날 또래동무들은 어떠할까요. 우리 아이가 차츰차츰 크는 동안 만날 손위 언니 오빠나 손아래 동생들은 어떠할까요.


.. 이미 검토한 바와 같이, 군이나 장교의 기록에 의하면 점령지에서의 강간 사건 방지 및 성병 예방이 위안소의 설치 목적이었다. 그럼 그 설치 목적은 달성되었을까 … 위안소 제도 도입이 강간 방지에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위안부 제도란 특정 여성을 희생으로 삼는 성폭력 공인 시스템이며, 여성의 인권을 짓밟는 것이다. 한편으로 성폭력을 공인해 두면서, 또 한편으로 강간을 방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강간 사건을 방지한다는 본질적 해결에 이를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였다. 원래, 강간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범죄를 일으킨 군인을 엄중하게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먼저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군 형법 규정 자체가 강간죄에 대해 관대하였다 ..  (56∼57쪽)


 혼자 살 수 없을 뿐더러, 혼자 살지 않는 세상이니, 내 몸과 함께 이웃 몸을 살펴봅니다. 사람 몸뚱이와 함께 자연 삶터며 자연 목숨붙이를 들여다봅니다. 나와 이웃이 모두 아늑하면서 느긋하게 살아야 하고, 사람과 자연이 모두 넉넉하면서 오순도순 지내야 합니다. 우리 나라와 이웃나라 어느 쪽에서도 힘이나 돈이나 이름값으로 올라서려 한다든지 깔아뭉개려 한다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남자와 여자, 또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와 어른, 또는 어른과 아이, 장애인과 장애인 아닌 사람, 또는 장애인 아닌 사람과 장애인, 나라밖 사람과 나라안 사람, 또는 한국사람과 이주노동자, 배운 이와 못 배운 이, 또는 고졸 밑인 사람과 대졸자 들이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높은 다른 대접도 안 되고 낮은 다른 대접도 안 됩니다. 버스를 타건 전철을 타건 교통카드에는 똑같이 900원이 찍히는데, 우리들 일자리에 따라서 받는 일삯이 달라진다면, 세상 어느 누가 ‘일삯 적게 주는 쪽’에 일하려 하겠으며 ‘일삯 적게 주는 자리’를 고마이 여기겠습니까.

 사회가 골라야 삶이 고릅니다. 세상이 골라야 남녀 사이가 고릅니다. 정치와 경제도 골라야 하지만 교육과 문화도 골라야 여남 사이가 고릅니다. 사회가 고르지 않아 삶이 고르지 않을 때에는, 남녀 사이가 뒤틀리는 한편 명문대 바라보기 제도권 입시교육을 털어낼 수 없습니다. 세상이 고르지 않아 남녀 사이가 고르지 않을 때에는, 가난 푸대접과 일자리 푸대접이 우리 삶터 구석구석을 휘감으면서 살맛 안 나는 하루하루가 됩니다.


.. 이러한 증언에서 분명해지는 바와 같이, 거의 대부분의 소녀들은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괴롭고 희망 없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그녀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또한 여성 차별 속에서 충분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1930년의 조선 국세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 남성의 식자율은 36%이고 여성은 불과 8%였다 ..  (110쪽)


 옆지기와 저는 우리 딸아이한테 ‘사름벼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성운동에 뜻을 두거나 남녀평등에 마음을 두는 분들은 으레 ‘부모 성 함께쓰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부모 성 함께쓰기’가 뒷날 아이한테 끼칠 영향을 헤아리니 그리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은 ‘부모 성’이지만, 알고 보면 모두 ‘아버지 성’일 뿐입니다. 우리네 어머니 성이라고 해 봐야, 어머니를 낳은 그 위 어버이 가운데 아버지 성입니다. 그렇게 이 나라 남자든 여자든 모조리 ‘남자 성’만을 물려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부모 성 함께쓰기’를 한다고 해 보아야, 모두들 ‘아버지 성 겹쳐쓰기’가 될 뿐입니다.

 그래, 이런 어이없는 참모습이 그지없이 어이없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뾰족한 수가 있고 힘이 있어서 이런 틀거리를 깰 수 있으랴 싶어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러면 “우리는 부모 성을 아예 안 쓰면 되겠네.” 하는 생각이 나왔고, 법으로는 새로운 성을 만들 수 없을 뿐더러 성을 안 쓰면서 살 수도 없지만, 우리는 우리 집에서만큼은 성을 안 부르고 살기로 다짐합니다.

 딸아이 이름 ‘사름벼리’에서 ‘사름’은 아이한테 성이 되는 대목입니다. ‘벼리’는 이름이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사름벼리’라고도 부르고, ‘사름이’라고도 부르고, ‘벼리’라고도 부릅니다. 다만, 아이 성이 ‘최’라고는 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딸아이는 ‘사름벼리’일 뿐입니다.

 ‘사름’은 모내기를 할 때 첫 모가 며칠이 지나면서 처음으로 오르는 싱그러운 푸른빛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벼리’는 고기잡이를 할 때 쓰는 그물에 달린 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름’은 농사일을 소담스레 여길 줄 알라는 뜻이고, ‘벼리’는 바닷일을 알뜰히 헤아릴 줄 알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 가운데 먹고사는 대목, 농어촌을 고루 보듬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딸아이 이름에 담았습니다.


.. 사회운동ㆍ여론ㆍ의회 등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는 소리가 없는 한, 군대 그 자체가 위안소와 유사한 시설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는 일본이 특수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  (221쪽)


 요즘 우리 세상에 참 많이 떠도는 말을 몇 가지 꼽아 보라면, 첫째로 ‘생태환경’이 아니랴 싶습니다. 조금도 생태하고는 가깝지 않음에도 ‘생태’를 붙이고 ‘환경’을 붙입니다. 출판사들 가운데에도 생태환경 책에는 한 번도 눈길을 둔 적이 없음에도 세상 흐름이다 보니까 시늉 삼아 한두 권 내면서 환경책을 사랑하는 듯 생색내기도 합니다. 자동차에 넣는 기름을 만드는 회사에서는 ‘깨끗한’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는데, 휘발유가 깨끗하다면 얼마나 깨끗한지, 또 휘발유가 ‘자연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사랑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많이 떠돈다고 느껴지는 말은 ‘자유’와 ‘민주’입니다. 더욱이 우리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나라라고 내세웁니다. 정당 이름에 ‘자유’며 ‘민주’며 으레 들어가지만, 이분들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자율’학습을 시킨다고 하는데, 자유와 마찬가지로, ‘자율’ 또한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이 따위 이름을 지었는지 그예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세계 곳곳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갖가지 끔찍한 전쟁무기를 수없이 만드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민주주의를 퍼뜨리고 지키는 나라’라도 되는 양 여기면서 떠받드는 이 나라입니다. 총칼을 든 민주도 있는지, 몽둥이를 든 자유나 자율도 있는지, 저로서는 하나도 알 길이 없습니다.

 셋째로 많이 떠돈다고 느껴지는 말은 ‘인권’과 ‘평등’입니다. 사람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들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담도 높낮이도 없다고 하는데, 아무리 둘러보고 살펴보아도, 돈나라(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허울뿐인 인권이요 껍데기뿐인 평등만 도사리지 않느냐 싶어요. 이론으로 따지는 인권이 아니고, 지식으로 가리는 평등이 아닙니다. 삶으로 따지는 사람 권리이고, 몸과 몸으로 부대끼는 고른 자리입니다.

 생태이든 환경이든, 자유든 민주이든, 인권이든 평등이든, 이 모두는 우리가 이 모습 그대로 살아내는 가운데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생태를 살고 환경을 살아야 생태를 말하고 환경을 말할 수 있구나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유를 살고 민주를 살아야 비로소 자유가 무엇이고 민주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인권을 살고 평등을 살아야, ‘아하 인권과 평등이 이렇기 때문에 아름답구나!’ 하고 뼛속 깊이 받아들이면서 어깨동무할 수 있어요.


.. 종군위안부 제도라는 성적 노예제를 가능하게 한 의식은 현재 어느 정도 극복되어 있는 것일까. 공창제는 없어졌고 민법ㆍ형법도 개정되었으나, 전자는 개실이 딸린 목욕업으로, 풍속 관련 영업으로 형태를 바꿔 사실상 잔존하고 있다. 일본인의 해외 매춘관광이나 일본에 돈을 벌러 온 외국인 매춘부 등을 보면, 본질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성에 대한 사고방식에도 큰 변화가 있는 것 같지 않다. 텔레비전ㆍ주간ㆍ만화잡지 등에 범람하는 누드나 노골적인 성 묘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성에 대한 규제가 없어진 정도에 비례하여 욕망이 무절제하게 표출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군과 비교해 보면 일본군에게는) 무기도 간식도 변변하게 없었지만, 매춘부는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이 인간으로서의 처절함은 본질적인 것이야.”라는 발언이 나오는 것이다. 성에 대한 의식ㆍ문화는 전쟁 전과 전쟁중과 전후를 통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용인하는 점에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일본인, 식민지 여성, 점령지 여성을 불문하고 모두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학교 교육을 만족스러울 정도로 받지 못한 여성들이었다. 매춘부 출신 일본인 위안부도 가정이 경제적으로 곤궁했었기 때문에 위안부가 되기 이전에 이미 미성년의 나이에 부모가 팔았든가 아니면 부모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졌던 것이다 ..  (245∼246, 248쪽)


 (3) 성폭력 나라와 성노예 나라


 일본사람이 쓴 《일본군 군대위안부》를 읽어내고 거듭 새기면서 곱씹습니다. 이 책을 쓴 일본사람은 ‘일본은 씻을 수 없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깨닫는 마음이었기에, 이와 같은 책을 엮어냈다고. 씻을 수 없이 부끄러운 짓이었기에, 이 일을 자기 스스로 안 잊고 자기 뒷사람 또한 안 잊게 하려고 책 하나를 야무지게 엮어냈다고. 일본사람으로서 앞으로 슬기롭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살아가고픈 마음이라서 이러한 책에 자기 삶을 바쳐서 엮어냈다고.

 한국사람이 쓴 ‘일본군 군대위안부’와 얽힌 책을 거의 모두 읽었고, 손에 닿는 대로 사서 집에 갖추어 놓았습니다. 저부터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와 함께 살아갈 우리 집 식구들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우리 형편으로 보건대 이런 이야기를 담은 책은 머잖아 하나같이 판이 끊어지리라 내다보았기에, 눈에 뜨이는 족족 사모았습니다.


.. 종군위안부 존재 그 자체는 전쟁이 참가해 본 경험이 있는 일본 군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 그러나 이 문제가 여성에 대한 중대한 인권 침해이며 국가 범죄ㆍ전쟁 범죄로 연결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 전후 50년 간 사죄ㆍ명예 회복ㆍ개인 배상의 문제가 완전히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의 이러한 자세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패전에 직면해서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공문서를 파기ㆍ인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 때문에 국가가 관여한 증거가 없다고 하여 이러한 발언이 가능했던 것이다 ..  (11, 12∼13쪽)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안 읽히고 안 팔리고 안 얘기 되는 책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 사는 데에 더없이 소담스럽다고 할 만한 책은 어김없이 안 읽히고 안 팔리고 안 얘기 된다고 느낍니다. 이 가운데 ‘일본군 군대위안부’로 몸과 마음이 다친 분들을 다룬 이야기책은 참 안 읽힙니다. 안 팔립니다. 얘기도 안 됩니다. 더구나 이러한 이야기책을 엮으려는 사람마저 몹시 드뭅니다.

 한국땅 대학교에 역사학과 없는 학교가 드물고, 인류학과와 사회복지학과와 교육학과, 그리고 역사교육학과까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루거나 파헤치면서 우리 삶을 보듬으려고 하는 젊은이 눈길과 마음길은 너무 모자라거나 얕습니다.

 ‘일본군 종군위안부’가 되어야 했던 사람은 어디 먼 나라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 할머니였을 수 있고 이웃집 할머니였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야 했던 수많은 이 나라 여성들은 이 가시밭길에서 허덕여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맞이한 해방과 오늘날까지, 몸이며 마음이며 남성들한테 굴레가 씌워진 채 숨을 죽이며 울어야 했습니다.


.. 육군성 경리국 건축과와 육군군수품 본부는 공동으로 해외파견군에게 콘돔을 진중용품으로 보내고 있었다. 하야시의 연구에 의하면, 1942년 중에 보낸 수는 밝혀진 것만도 3210만 개나 된다 ..  (84∼85쪽)


 아무래도 우리 나라는, 이 나라 한국은, ‘성노예’를 만든 일본보다도 끔찍하다고 할 만큼, 모질다고 할 만큼, 여느 삶자락부터 ‘성폭력’이 휘둘러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일까요. 엉덩이를 쓰다듬고 가슴을 주무르는 성폭력만이 아니라, 우리 삶자락 구석구석 여성을 찬밥 대접할 뿐더러 밥어미로만 여기면서 깎아내리는 성폭력으로 말입니다. 집살림을 아주 하찮은 듯 여기면서, 이제는 젊은 남자도 젊은 여자도 집살림을 벗어던지려고만 하면서 말입니다. (4341.11.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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