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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문답 - 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고뇌
홍대용 원저, 김영호.이숙경 지음 / 꿈이있는세상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촘스키’를 읽는 당신, ‘홍대용’도 함께 읽으셔야지요
[잠깐 읽기 9] 홍대용, 《의산문답》
- 책이름 : 의산문답, 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고뇌
- 글 : 홍대용
- 옮긴이 : 이숙경, 김영호
- 펴낸곳 : 꿈이있는세상 (2006.4.15.)
- 책값 : 9000원
(1) 책읽기와 취향
여러 매체에서,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별 다섯 만점’을 잣대로 비평을 하곤 합니다. 얼마 앞서 ㅈ이라는 사람이 펴낸 책을 놓고 ‘인터넷 서평단’은 하나같이 별 넷이나 다섯을 주었지만(서평단 글쓰기를 하는 분들은 거의 이렇게 점수를 붙여 주더군요), 이 책을 자기 돈을 치러서 사서 읽은 여러 사람들이 별 하나만 주었습니다. 별 0개를 주도록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별 하나를 붙였구나 싶은데, 이렇게 별 하나를 준 사람들 글은 여느 독자들한테 크게 공감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전문 서평꾼 한 사람이 ‘나는 내 돈 주고 사서 읽었어도 아주 좋았기에 별 다섯을 준다. 내가 별 다섯을 준다고 나를 똑같은 서평단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글을 남깁니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그 전문 서평꾼은 ‘취향이 다른 문제’라고 자기 생각을 앞세우면서 별 다섯을 주었는데, 자기가 내세우는 이야기대로라 해도 ‘별 하나 주기도 아깝다’고 하는 사람 또한 취향 문제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취향 문제를 넘어서는 더 큰 문제가 있어요. ㅈ이라는 분이 낸 책이, 얼마나 짜임새가 있고 알맹이가 야무지고 따로 그런 책을 낼 만한 뜻이나 이야기가 무르익었느냐는 대목.
사람을 죽이는 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살결빛이나 옷차림이나 일자리에 따라서 푸대접하는 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높은 아파트 창턱에서 고양이를 집어던지는 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쓰레기물을 끝없이 내뿜는 공장이 우리 동네에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골목길에서 빵빵거리며 우악스럽게 내달리는 자동차를 보며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대통령이나 교육감이 누가 뽑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 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취향이라 한다면, 너는 참이슬을 마시지만 나는 처음처럼을 마신다든지, 너는 한라산물맑은소주가 맛있다 하지만, 나는 시원소주가 맛있다든지, 너는 이과두주를 좋아한다지만, 나는 고량주가 좋다든지 할 때가 취향입니다.
.. “무릇 짐승과 초목이 아는 것과 깨달음이 없다고 했지만, 아는 것이 없는 까닭에 거짓이 없고, 깨달음이 없는 까닭에 몹쓸 짓도 하지 않는다.” .. (48쪽)
어느 책 하나를 놓고 잘 되었느냐 잘못 되었느냐를 가리는 일은 취향을 넘어서야 한다고 느낍니다. 날카롭고도 차분하게, 깊고도 치우침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큰일이라고 느낍니다. 책 하나가 나오기까지 어마어마한 나무가 베어지고, 나무를 베려고 적잖은 물과 기름을 써야 할 뿐더러, 나무를 베어내는 곳까지 길을 닦고 제재소를 짓고, 이 나무를 다듬어서 짐차에 실은 뒤 배로 옮겨 싣습니다. 그런 다음 기름으로 움직이는 배가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다니며 종이공장에 부려놓고, 종이공장에서는 또 물과 기름을 써서 종이로 만듭니다. 이렇게 종이가 된 다음, 짐차에 실려 인쇄공장에 가서 기름과 물을 먹고 책으로 찍힙니다. 책으로 찍힌 다음 다시 짐차에 실려서 배본소로 들어가고, 배본소에서는 또다시 작은 짐차로 옮겨 담긴 채 전국 곳곳에 있는 책방으로 실어 옮깁니다. 책방에서는 전기불 환하게 켜 놓은 책꽂이 한쪽에 이 책을 꽂아 놓습니다. 책을 사는 우리들이 몸소 책방으로 간다고 해도 자원이 듭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집에서 받아보아도 택배기사가 자원을 써야 합니다.
우리가 읽는 책은, 얼핏 보면 ‘돈 몇 푼 치러서 재미있게 읽으면 그만인 개인 테두리’로 느껴질 터이나, 찬찬히 헤아리면, ‘돈을 넘어서는 사람 삶터 이음고리가 고스란히 담긴 테두리’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지금 너는 과거에 들었던 것에 집착하고 남을 이기려는 마음에 빠져서 입을 함부로 놀리면서 남의 바른 말을 막으려고 하니, 네가 도를 구하고자 함에 있어서 잘못됨이 있는 것이 아니냐? … 네가 진정으로 도를 들으려거든 네가 옛날에 들었던 것을 씻어버리고, 또한 너의 이기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네가 마음을 비우고, 네가 입을 조심한다면 내 어찌 숨김이 있겠느냐?” .. (63∼64쪽)
모든 책은 헌책이고, 모든 책은 새책인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낡아도 책이고 깨끗해도 책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래되어도 책이고 갓 나와도 책인 까닭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김치국물이 튀겼다고 해서 책에 담긴 줄거리를 못 읽을 일이 없습니다. 빳빳하고 종이 냄새 물씬 풍기는 새책이라고 해서 책에 담긴 줄거리를 곱으로 받아들일 일이 없습니다. 책은 그저 책입니다.
지식으로 머리에 담아내는 물건이 아닌 책입니다. 마음으로 새겨 읽는 마음밥인 책입니다. 곡식을 먹어 몸을 살찌우듯, 책을 읽어 마음을 살찌웁니다. 밥을 먹으며 일할 힘을 얻듯, 책을 읽어 가슴이 따뜻하거나 넉넉한 사람이 될 사랑과 믿음을 추스를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어영부영 ‘유명인사’ 내세워서 팔아치우는 책은 겉만 번지르르한 도둑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얼레벌레 ‘진보인 척’ 우쭐거리며 팔아먹는 책은 시커먼 꿍꿍이속을 감춘 몹쓸 깡패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 “그렇지만 베, 비단과 옷, 이불은 살아 계실 때에 봉양하는 기구이고, 관곽이나 정삽은 돌아가시고 난 다음, 장사 지낼 때에 남 보기에 좋게 하는 장식이다. 이것들은 모두 흙에 들어가면 썩어서 유해를 더럽힐 뿐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움만 신경을 쓰고 마침내 유해가 더럽혀지는 것은 생각지 않으니, 이렇게 하는 것을 효도라 하고 또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 .. (138∼139쪽)
지난날 이 땅 어른들, 또 우리가 책으로 만나며 높이 받드는 북중미 토박이들 삶, 그리고 티벳이나 몽골 높은산에서 살아가는 토박이들 삶, 그리고 아프리카나 호주 토박이 삶은 ‘종이로 찍힌 책’을 읽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답게 가꾸던 삶이었습니다. 이들한테는 책이라는 물건이 따로 없어도 되었습니다. ‘책으로 적어 놓을’ 이야기를 늘 몸으로 익혔고 마음에 새겼으며, 이 이야기를 한결같이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주고받으면서 곱씹고 되뇌었어요.
학교 문턱을 밟지 못했던 이 겨레 수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그윽하며 훌륭한 슬기를 엿보거나 배울 수 있던 까닭은, 당신들 몸과 마음에는 ‘굳이 종이에 담아 놓지 않아도 될 흔들림 없는 사랑과 믿음’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로 학교를 다니거나 책을 읽지 않아도, 당신들 꾸려가는 삶이 바로 ‘책읽기’와 다름이 없었고, 당신들 부대끼는 삶을 언제나 깊이 되새기고 돌아보고 받아들이면서 몸뚱이뿐 아니라 가슴으로 사람을 만났습니다.
.. “그러나 만약 공자가 바다에 떠다니다 오랑캐 족이 사는 곳에 들어와 살았다면, 중국의 법을 써서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나라 도를 국외에 일으켰을 것이다. 따라서 안과 밖이라는 구분과, 높이고 물리치는 의리에 있어서도 자연히 중국이 아니라 마땅히 국외에 춘추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성인 된 까닭이다.” .. (165쪽)
사람한테는 책 한 권으로 넉넉할 수 있습니다. 책 한 권 없어도 넉넉할 수 있습니다. 책 만 권이 아닌 십만 권이나 백만 권이 있어도 턱없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 수백만 권이 이르는 책이 있다고 하여, 그 하버드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책에 담긴 알짜’를 잘 삭여서 펼치면서 살아가고 있던가요. 미국이나 일본 대학교하고 견주면 너무 우스운 숫자이지만, 그래도 나라안 으뜸가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수많은 책이 있다고 하여, 이 서울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책이 말하는 슬기와 깨달음’을 고이 곱새기고 받아먹으면서 이웃하고 즐겁게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이웃사랑을 하는 똑똑이는 몇이나 되는지요. 이웃나눔을 하는 부자는 얼마나 되는지요. 이웃믿음으로 어깨동무하는 권력자는 이 땅에 한 사람이라도 있어 본 적이 있는지요.
(2) 옛책 《의산문답》과 오늘날 책
.. 기존의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다른 만물보다 더 지혜로운 존재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엄연한 서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과 동식물의 본성이 같다고 본 낙론의 입장에 선 학자들은 사람만이 귀한 것이 아니므로, 자연히 동식물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 자연과학 분야에도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 즉,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명분이나 내세우며 글이나 읽는 당시 양반들을 비판하고, 신분에 따라 직업을 한정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능력 위주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 (52, 55쪽-붙임말)
옛책 《의산문답》이 지난 2006년에 새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무척 보기 좋은 판짜임에, 알맞는 글자크기에, 우리 역사나 문화를 거의 돌아보지 않는 오늘날 흐름을 살피면서 꼼꼼하게 넣은 붙임말과 풀이말까지 해서, 아주 야무지고 단단하게 엮어냈습니다. 우리 옛책이 이만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튼튼하고 쏠쏠하게 묶어냈습니다.
꼭 ‘양장’으로 묶어내어야 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판을 크게 키우고 글자도 더 키우고 해야 ‘옛 어른 뜻을 높이는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적어도 《의산문답》을 펴낸 출판사 분들은, 홍대용 님이 이 책을 펴낸 그 옛날, 무슨 생각과 마음과 얼과 넋이었는가를 깊이깊이 곱씹고 되새겼음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 나라에도 이만한 책이 있습니다’ 하고 떳떳하게 내보일 수 있구나 싶어서 반갑습니다. 조선시대 실학자를 들먹일 때 늘 정약용과 박지원만 울궈먹고 있던 우리 문화 눈높이를 돌아보아도(정약용 님과 박지원 님 책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똑같은 알맹이를 놓고 아무런 ‘새 풀이’ 없이 되풀이하는 모습은 자원낭비라는 소리입니다), 드디어 홍대용 님 삶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살피고 껴안을 수 있도록 선물 하나 내어주었으니 그지없이 고맙습니다.
.. 그러나 비록 당대에 그의 뜻을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세상을 깨우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고, 박지원ㆍ이덕무ㆍ유득공ㆍ박제가 등의 실학자들과 뜻을 함께 나누며 자신의 생각을 알렸던 것이다 .. (78쪽-붙임말)
그런데 홍대용 님 이 책은 얼마나 사랑을 받거나 눈길을 받으면서 읽힐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너도 나도 ‘우리 출판사 목록에 정약용이나 박지원 책 하나 집어넣으면 잘 팔릴 테지!’ 하는 마음이 가득한 이 나라에서, ‘열하일기 하나 붙잡고 늘어져도 책장사 잘 되는’ 이 나라에서, 《의산문답》이 1700년대에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를 곱씹고 2000년대에 새로 읽을 만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짚어낼 손길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 그런데 조선의 정치상황을 보면, 정부의 기득권층은 진실로 민생을 위한 현실 개혁정책보다는 자신들의 이권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를 보는 홍대용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 (113쪽-붙임말)
우리 세상이 돈이 아닌 삶을 볼 줄 안다면야, 《열하일기》도 읽히고 《의산문답》도 읽히리라 봅니다. 《의산문답》뿐 아니라 《을병연행록》도 읽힐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박지원과 홍대용에 그치지 않고, 역사책에 이름 석 자로만 남은 숱한 옛 어른들 발자취를 돌아보고 되새기면서, 우리가 서로를 아름답게 받아들이며 믿고 돕고 사는 길을 스스로 찾아나설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워드 진도 훌륭하지만 박지원도 훌륭합니다. 노암 촘스키도 훌륭하지만 홍대용도 훌륭합니다. 며칠 앞서, 우리 나라 국방부에서 ‘불온도서 스물세 가지’를 몸소 뽑아서 밝혔는데, 이 스물세 가지에는 ‘노암 촘스키’ 책이 둘이나 끼워져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국방부 관계자께서 홍대용 님 책을 읽어 보셨다면, “아니 1700년대 이때부터 ‘반정부 사상’을 외치고 있었다니!” 하면서, ‘반정부 불온도서’로 이 《의산문답》 하나를 끼워 놓고 촘스키 님 책 하나는 덜어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4341.8.2.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