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사들의 행진 - 야누시 코르차크 ㅣ 양철북 인물 이야기 1
강무홍 지음, 최혜영 그림 / 양철북 / 2008년 6월
평점 :
아이를 사랑한다면,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셔요
[그림책이 좋다 49] 강무홍 + 최혜영, 《천사들의 행진》(야누슈 코르착)
- 책이름 : 천사들의 행진
- 글 : 강무홍
- 그림 : 최혜영
- 펴낸곳 : 양철북(2008.6.20.)
- 책값 : 10800원
(1) 사람
저는 올 5월 25일, 천주교 인천교구 송림동성당에서 ‘정하상 바오로’라는 덧이
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어느 한 가지 종교에 몸을 맡기지 말고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저로서는 세례를 받았지만, 몸이나 마음은 오롯이 천주교 하느님한테만 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입니다. 이 한 분 하느님은 우리 삶 어느 자리에나 함께 있습니다. 기쁜 자리, 슬픈 자리 어디에나 있습니다. 내가 이웃을 우러르는 자리뿐 아니라, 내가 마음속으로 이웃을 깎아내리는 자리에도 있습니다. 내가 몸바쳐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손길 나누는 자리에도 있으나, 내 힘이 닿지 않아 이웃과 식구한테 도움을 받는 자리에도 있습니다. 내가 촛불 하나 들고 길거리에 나간다면 이 자리에 함께 있는 한편, 집구석에서 홀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면,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기도 합니다.
.. 그(야누슈 코르착)는 몸을 수그리고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이의 눈빛은 어두웠습니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니? 여기가 내 집인데.” 한순간 아이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환히 떠올랐습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몸을 기댔습니다 .. (4쪽)
더 나은 종교, 더 알맞는 종교, 더 열린 종교가 있을까는 모르겠습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종교에 마음과 몸을 맡기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종교힘이라면 넉넉하다고 느낍니다. 세례를 받고도 성경에 적힌, 또는 성경에 적히지 않은 하느님 삶을 고이 따르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이분은 우리 곁에 함께 살아 있는 하느님이라고 느낍니다. 세례를 받고 더 높은 공부와 마음닦이를 거쳤다고 하나, 하느님 삶과 함께 걸어가지 않는다면, 이분은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거나 괴롭히는 못난이가 아니냐 생각합니다.
저와 옆지기 두 사람은, 세상에서 돈이 된다고 하는 일에 그리 몸을 바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우리로서는 우리 살림살이를 조금이나마 넉넉하게 해 주는 돈을 얻으면서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돈이 우리 삶을 얼마나 채워 주고 있는가도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을 넉넉하게 돌보아 주고 있는 쪽이 아니라면, 아주 적은 돈밖에 얻지 못하더라도 이 길로 걸어가자고 다짐합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찾으면서 먹고사는 돈까지 거둘 수 있으면 가장 나을 텐데, 이런 길은 아직 못 찾기도 했지만, 어쩌면 없을지 모릅니다.
옆지기는 늘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은 산에서 살아야 한다고. 산이 아니라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고. 그러나 지금 우리 둘은 산에서 못 삽니다. 들어갈 산이 없는 한국이기 때문입니다. 오두막이 못 되고 굴이 못 되어도 비와 해를 가릴 곳을 얻어서 산나물과 감자로 먹고살아도 너끈하지만, 돈과 땅이 없는 형편으로는 산에 깃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할 텐데, 저마다 제 이웃을 자기 살갗으로 받아들이며 함께하기보다는 ‘자기한테 벌이가 될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터전이 자꾸 넓어지고 있습니다. 이웃에 집이 있지만 서로서로 얼마나 이웃으로 느끼고 있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한목소리로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배부른 소리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먹고살기를 채우기만 하면 우리 삶이 그길로 모두 끝인지, 먹고살기를 채우는 길이 우리가 갈 가장 즐겁고 아름다운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서 오백만 원을 사회에 내놓아야 아름다움일는지, 한 달에 오십만 원 벌어서 오천 원 겨우 사회에 내놓으면 아름다움이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병원이 끝나면, 그(야누슈 코르착)는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고는 약도 쓰지 못하고 앓고 있는 아이들을 정성껏 치료하고 돌봐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한 의사도 ‘가난’을 치료할 수는 없었습니다. 거리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굶어죽어 가는데도,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 (10쪽)
지금 이 나라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가르치는 일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아리송합니다. 동무를 사귀고, 어버이를 모시는 모든 사람 사이는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로 흐르는가 알쏭달쏭합니다. 아이들을 낳아서 기를 때, 아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는가요. 아이들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어떤 매무새와 넋으로 스스로 제 살 길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는가요. 우리 어버이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먹이고, 무엇을 보이고, 무엇을 나누며, 누구와 이웃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이웃사랑을 물려줄 수 있습니까. 자연 삶터를 아끼지 않는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자연사랑을 이어줄 수 있습니까. 돈사랑이 아닌 사람사랑과 마음사랑으로 살아가지 않는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돈벌이 말고 무엇을 들려줄 수 있습니까. 두 다리로 걷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우리 사는 터전과 마을과 나라가 어떻게 아름다운가를 이야기할 수 없겠지요. 옷이며 이불이며 손으로 빨아서 고이 아껴서 입고 덮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어떤 땀방울을 건넬 수 있습니까.
잠자리에 들기 앞서 성경 몇 대목을 읽으며, 기도글을 읊으며, 하느님을 따르며 살다가 떠난 훌륭한 넋들 발자취가 담긴 책을 헤아리면서, 슬픈 마음을 누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읽어서 ‘참 훌륭하다’고 느낀 그분들 걸음걸이며 발자국은, 우리가 지식으로 머리에 집어넣을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껴안으면서 살아갈 다짐이자 몸가짐이 아니온지요. 그럴싸할 뿐 아니라,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거나 자랑할 수 있는 시커멓고 큰 차가 아니라, 기름 적게 먹고 자원 덜 써서 만든 야무지고 값싼 자동차를 몰면서 ‘아낀 돈으로는, 우리 사회 얼거리에서 가난을 헤어나기 어려운 이웃’을 손수 알아보고 찾아내어 도와주는 손길을 내밀어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골프장에서 휘두를 골프채 성능과 값을 알아보는 책자를 넘길 그 시간에, 골프장 하나 짓는 동안 무너지는 우리 자연 삶터와 시골사람 삶터를 돌아볼 뿐더러, 자기가 참말 운동을 하는지 지랄을 하는지를 곱씹어 볼 ‘홀로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 2차대전 때 폴란드의 한 교육학자는 그가 데리고 있던 기숙사의 아이들이 나치스의 집단학살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자, “아이들을 1분 간도 방치할 수 없다”면서 자기를 구조해 주려는 손길도 뿌리치고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함께 끌려가 학살당했다.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은 물론 그런 상황과는 다르다. 그러나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스스로의 영토를 잃고 쫓겨나 짓밟히고 비뚤어져 병든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사실은, 나날이 우리들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폴란드의 그 학자의 백 분의 일의 양심이라도 가지고서 이 글을 썼는지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죄스럽다 .. 《이오덕-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청년사,1977) 머리말
1977년에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책을 낸 이오덕 님은 ‘폴란드사람 야누슈 코르착’ 이야기를 당신 책 머리말에 적습니다. 이 머리말에 나온 ‘폴란드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 사람은 오래도록 없었습니다. 이 폴란드사람 책은 199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말로 옮겨졌습니다(그러나 이 첫 책은 거의 알아보는 사람이 없이 사그라들었고, 두 번째 세 번째 책도 똑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살아남은 책은 이번에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을 펴내 준 ‘양철북’에서 2002년에 내놓은 《아이들》 하나뿐입니다.). 1979년을 유네스코에서 ‘세계아동의 해’로 삼아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세계 아동의 해 기념 어린이그림 출품’을 했으면서도, 한국땅 어느 누구도 1979년이 왜 ‘세계 아동의 해’가 되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1979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이해 ‘세계 아동의 해’ 기념우표까지 펴낸 한국이지만, 이 기념우표가 왜 나왔는지를 깨닫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이오덕 님은 ‘전쟁 문학’을 다룬 어느 책 하나를 읽다가 몇 쪽에 걸쳐서 나온 폴란드사람 이야기에 크게 뭉클해서 당신 책 머리말에도 그분 이야기를 적었지만, 1979년 그해에, 한국땅 미술학원에서는 ‘세계 어린이 그림대회에 입상시킬 작품을 보낼’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야누슈 코르착이라고 하는 이름은 ‘미국과 일본’에는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밖 훌륭한 사람들 이야기나 책을 부지런히 번역해서 팔아먹고(?) 있는 한국 사회와 책마을 흐름을 돌이켜본다면, ‘미국과 일본에는 소개가 잘 안 되고 있는’ 야누슈 코르착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리 대단하고 놀랍다고 할 만하다는 이야기가 가득하고, 이리하여 1979년이 ‘야누슈 코르착이 태어난 100돌이라고 해서 이해를 기리는 온갖 일을 했음’에도, 미국과 일본에 이어 한국까지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믿고 언제나 함께하면서 웃고 우는 교육자’ 이야기를 한국사람들이 알아보고 배우고 깨닫고 곰삭이기는 힘들었구나 싶기도 합니다.
(2) 책
충청남도 홍성에 자리한 〈풀무학교〉에서 일하는 홍순명 선생님은 1987년에 《린하르트와 겔트루트》(광개토)라는 책을 우리 말로 옮겼습니다. 1962년에 《나라 건지는 교육》(정음사)이라는 책을 펴낸 최현배 님은 책 끝에 〈베스달로찌이의 교육 사상〉이라는 논문을 싣습니다. 《나라 건지는 교육》은 1975년에 정음문고로 다시 나오는데, 이 책 끝에 실린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때에 쓴 ‘페스탈로찌를 연구한’ 한국사람이 쓴 첫 글입니다. 그러나 페스탈로찌라는 분 삶과 생각이 담긴 책은 1960년에 이르러 왕학수 님이 낸 《세계교육명저총선 (1)》(세계교육명저발간위원회)에서 처음으로 한국말로 옮겨졌고, 이때 〈숨은이의 저녁놀〉이나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쳤나〉가 소개됩니다. 뒷날 일본사람이 연구한 페스탈로찌 논문이 신구문화사 손바닥책으로 옮겨지기도 했지만, 페스탈로찌가 써낸 수많은 글 가운데 사람들이 널리 읽을 만한 책은 좀처럼 옮겨지지 못했고, 고려대학교 김정환 교수가 옮긴 《은자의 황혼》이 아직까지도 ‘딱 하나 판이 끊어지지 않고 겨우 읽히’고 있을 뿐입니다. 1949년에 박지영이라는 분이 《페스타롯찌》(대한교육연합회)라는 전기를 써냈는데, 일제강점기 때 최현배 님을 비롯해 뜻있는 분들이 페스탈로찌 연구를 하며 이분 교육얼을 한국땅에 이어심어 보고자 무던히 땀을 흘리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고려대 김정환 교수가 애써서 《페스탈로찌의 생애와 사상》(박영사,1974)과 《페스탈로찌의 교육사상》(고려대학교 출판부,1975)을 쓰고, 《페스탈로찌의 교육철학》(고려대학교 출판부,1995)까지 써냈음에도,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배우는 이들이 교재로 스쳐 지나가듯 살필 뿐, 삶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로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데도, 김정환 교수는 《페스탈로치가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편지》(서원,1989)를 우리 말로 옮기고, 《페스탈로찌의 실천》(젊은날,1991)을 우리 말로 옮기면서, ‘허울뿐인 이름으로 남는 위인전 주인공’이 아닌,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돌아보며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이슬떨이’로 페스탈로찌가 훌륭한 사람임을 깨달아, 우리들한테 이분 뜻과 생각을 나누어 주고자 애썼습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페스탈로찌 님이 쓴 손꼽히는 훌륭한 책 가운데 하나인 《린하르트와 겔트루트》가 1987년에 옮겨졌으니 무척 축하하고 기릴 만한 일이었으나, 이 번역책을 눈여겨보거나 알아챈 교육학자나 교육학과 교수나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몹시 드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 교육은 ‘아이 넋과 얼과 삶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교과서 진도를 학기에 따라서 제대로 끝마쳐서 시험점수 잘 맞도록 하고 더 높다는 대학교에 보내도록 하는’ 교육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페스탈로찌가 애쓴 끝에 생긴 초등학교’이면서도 초등교육이 이토록 끔찍하게 무너질 수야 없습니다. 더더구나 초등학교 문을 열게 한 어른이 무슨 마음으로 초등학교를 열었는가를 찬찬히 헤아리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없어요.
초등학교 아이들한테조차 착하고 따뜻한 마음씨가 아닌, 더 많은 영어 지식과 한자 지식을 쑤셔넣는 데다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영어교실 짓는 데에 바치는 모습을 살핀다면, 한국에서 교육은 ‘가르침’이 아니라 ‘고기짐승 살찌우기’와 다를 바 없다고 느낍니다.
.. 그(야누슈 코르착)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되물었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의 아이가 아프고, 불행하고, 위험에 처해 있다면, 당신은 그 아이를 버리겠습니까?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200명이나 되는 우리 아이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담담하게 덧붙였습니다. “군인들에게 아이들을 밀지 말라고 해 주십시오. 줄을 서서 갈 테니까, 아이들이 놀라거나 겁에 질리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 (32쪽)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자 한다면서, 초등학교 아이들이 즐겨 읽는 어린이책을 살펴보지 못할 뿐더러, 어린이 그림책을 헤아리지 못하는 초등학교 교사요 교대 학생입니다.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고자 한다면서,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즐겨 읽는 문학책과 만화책을 거들떠보지 못할 뿐더러, 이 푸름이들이 마음밭을 살찌울 책이 무엇인가를 살피지 못하는 중고등학교 교사요 사범대 학생입니다. 대학교 교수를 꿈꾼다고 하면서 대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이 우리 세상을 어떻게 읽어내도록 이끌까를 굽어살피면서 자기부터 마음자리 다스릴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시간강사요 조교수입니다.
그러고 보면, 교사들을 탓하기 앞서, 아이들 어버이 된 우리들 여느 어른들부터도, ‘아이를 낳기는 하지’만 ‘아이가 어떤 책을 언제 어떻게 즐기는가’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아이들한테 걸맞는 책이 무엇인지, 아이 마음을 가꾸거나 북돋울 책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입니다. 책뿐 아니라 삶에서도, 어떤 놀이와 일로 아이들 몸을 튼튼하게 추슬러 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어른들입니다.
.. 기차 안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사람들한테 떠밀려 흩어지지 않도록 그의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습니다. 그의 품에 안긴 가장 어린 아이가 먼 미래의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 나 농부가 될 거예요. 그래서 밀을 많이 기를 거예요. 밀이 자라면 언니들이랑 오빠들한테 줄 거예요. 할아버지한테도 줄 거예요, 아주 많이.” .. (39쪽)
누구나 입으로는, “나는 우리 아이를 사랑해요.” 하고 말합니다. 말하곤 합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또 몸으로 바라보는 어른들 삶과 매무새를 살피면, 오늘날 그 어떤 한국 어버이들이 “우리 아이를 사랑해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오도록 살아가고 있는가를 모르겠습니다. 입으로 사랑한다고 읊는다고 하여 참말 사랑하고 있겠습니까. 입으로 나라사랑 안 하는 이가 누가 있으며, 글로 겨레사랑 안 한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미친 소고기도 한국 경제를 사랑해서 들여온다고 하는 판입니다. 지난날 미국쌀을 사들일 때에도 한국 경제와 농촌을 사랑해서 들여온다고 했습니다. 미군범죄가 끊이지 않아도 범죄자 미군을 벌주지 않는 한국정부는 이 나라 사람들을 걱정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밀어넣는 어느 교사가 “우리는 학생을 사랑 안 해” 하고 말하든가요. 유전자를 건드린 곡식으로 먹을거리를 만드는 식품회사 회장님들은 당신 아이들한테 당신 회사 먹을거리를 기꺼이 내놓을까요. 베스킨라빈스 창업주는 자기가 만든 얼음과자를 자기 식구들한테 안 먹인다고 하면서, 자기 식구 아닌 사람한테는 엄청나게 팔아치워 떼돈을 법니다. 아이들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가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어버이들조차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으로 실어나르고자 자가용을 몰면서 이 땅을 더럽힙니다. 앞과 뒤가 맞는 일을 우리 어른 스스로 안 하고 있는 가운데, 아이들보고는 ‘공부 잘하라’는 말만 되뇌입니다. 아이들이 해야 할 공부가 무엇이기에, 아이들이 공부 잘하면 아이와 우리 모두한테 무엇이 도움이 되기에.
(3) 코르착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과 함께 나라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야누슈 코르착(야누쉬 코르착/야누스 코르착)’ 님 책은 모두 일곱 가지입니다.
① 새책방에서
《노영희 옮김-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양철북,2002)
② 헌책방에서
《송순재,안미현 옮김-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내일을여는책,2002)
《김신애,송순재 옮김-홀로 하나님과 함께》(내일을여는책,2001)
《송순재,안미현 옮김-아이들을 변호하라》(내일을여는책,2000/1998)
《송순재,손성현 옮김-안톤 카이투스의 모험》(내일을여는책,2000)
《김선애 옮김-아이들이 심판하는 나라 (1)∼(2)》(시공사,1996)
시공사에서는 ‘야누스 코르착’으로 적고, 내일을여는책에서는 ‘야누쉬 코르착’으로 적었으며, 양철북에서는 ‘야누슈 코르착’으로 적습니다. 《안톤 카이투스의 모험》과 《아이들이 심판하는 나라》는 이야기책이고, 《아이들을 변호하라》와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는 교사와 어버이한테 읽히고자 쓴 책이며, 《홀로 하나님과 함께》는 기도책입니다.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은 우리들 누구한테나 마음속에 천사가 깃들어 있으나, 천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깨우쳐 주는 작은 천사(어린이)한테 깨우침을 받고는 자기 스스로 작은 천사와 손 잡고 살아가고자 애썼던 늙은 천사가 자기 길을 어떻게 걸어갔는가를 퍽 어둡게 느껴지는 그림결로 보여줍니다.
나라가 어두웠고 사회가 어두웠으며 아이들 앞날이 어두웠습니다. 허울뿐인 ‘보호’구역에서 ‘보호’가 아닌 ‘감시’와 ‘따돌림’에 들볶이면서 굶주려야 한 사람들 삶이었으니, 이와 같은 그림결이 그때 그 사람 그 모습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데에 어울리지 않으랴 싶기도 합니다.
어두웠으니 어두웠지요. 어둡다고 했으니 어두웠어요. 어두운 곳에서 몸둘 곳을 찾으려 했지만 빛줄기를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밖에는 없는 빛이었고, 밖에서 빛을 뿌려 주려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괜히 자그마한 빛이라도 조금 뿌렸다가는 덩달아 붙잡혀 괴로운 굴레에 붙잡힐 수 있었기에 더 몸을 사리기도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코르착은 아이들 가슴마다 빛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버려진 아이들’을 꾸준히 고아원에 받아들였고, 먹을거리가 모자랐어도 모자란 대로 서로 더 나누면서 살았습니다. 나치가 아이들을 붙잡아 가스실로 보내기 앞서, 틀림없이 코르착과 아이들은 어디론가 내뺄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코르착도 아이들도 ‘보호’ 아닌 보호구역에 머물렀습니다. 그러고는 다 함께 손 잡고 노래 부르면서 가스실로 갔습니다. 아이들과 코르착과 스테파니아 선생님 모두한테는 가슴에 고이 안고 있는 빛이 있었거든요. 이 빛으로 아이들과 코르착과 스테파니아 모두 웃고 노래하며 어깨동무를 하며 지냈어요. 그리고 이 빛은 코르착네 고아원 둘레에 빛을 선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코르착뿐 아니라 스테파니아 선생님과 이백이 넘는 아이들만 걱정없이 지낼 쉼터가 아닌, 이 모두가 함께 깃든 곳에 이 모두한테 이웃인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슴에 빛을 안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꾸면서, 그곳 ‘보호구역’에 남았고, ‘가스실 가는 기차’를 탔고, 마지막 때까지도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들한테 이야기 한 자락 건넸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죽음이 닥친 그때에, 자기들을 총칼로 윽박지르는 그 나치 군인들한테까지도 사랑을 나누어 주려고 한 코르착이요 스테파니아요 아이들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메마른 가슴에 환한 꽃을 피워 주기를 꿈꾸었고, 거친 마음에 살가운 열매를 맺워 주기를 바랐으며, 피눈물도 없이 된 그 몸뚱이에 뜨겁고 붉은 피가 다시 흘러 주기를 비손하면서 기꺼이 ‘나치 가스실’로 걸어간 이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은 이 ‘빛 이야기 한 자락’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대목을 짚어서 보여주기에는, 좀 이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살짝 섣부르다고 느낍니다. 조금 더 깊이 다가서지 못했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쉽습니다. 코르착이라고 하는 사람 삶, 그리고 코르착을 도와 고아원을 함께 지킨 스테파니아 선생님 삶, 여기에 코르착과 스테파니아 선생님하고 언제까지나 함께하면서 울고 웃던 아이들 삶을 한 번 더 곰삭여 내어 붓끝에 담아내지는 못했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움이 크고 싹을 틔우려고 하는 ‘코르착 알아가기’ 첫걸음인데, 이만한 그림책이라도 얼마나 고맙고 반가우랴 싶어요. 별 다섯 만점에서 별 넷을 서슴없이 붙입니다. 그러나 별 하나는 붙이지 못합니다. 기다립니다. 별 하나 더 붙일 그림책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코르착 스스로도 하루아침에 ‘아이들을 알아 가지’ 않았듯이, 코르착을 이야기하는 그림책도 아이들 걸음걸이와 삶에 맞추어 한 걸음 두 걸음 느긋하게 내디디면서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1.7.16.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