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떠한 낱말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  《김우창-궁핍한 시대의 詩人》(민음사,1977) 379쪽

 ‘단어(單語)’가 아닌 ‘낱말’이라고 적으니 반갑지만, “그 자체(自體)로서”와 “고정(固定)된 의미(意味)”라고 적은 대목에서는 서글픕니다. “그 낱말로서”와 “굳어진 뜻”으로 고쳐 줍니다. “갖고 있지는 않다”는 “담고 있지는 않다”로 손보거나 앞말과 이어 “뜻이 굳어져 있지 않다”로 손봅니다.

 ┌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
 │→ 하나로 붙박힌 뜻을
 │→ 하나로 굳어버린 뜻을
 │→ 한 가지 뜻만을
 │→ 한 가지 뜻으로 굳어져
 └ …


 세상 모든 분들이 훌륭한 이론과 논리만 펼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훌륭한 이론과 논리를 펼치는 분들이 모두 자기가 펼치는 이론과 논리대로 몸을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말만 하지는 말아 주셔요. 훌륭해 보이는 말만 들려주지는 말아 주셔요. 말하는 분부터 손쉽게 몸으로 옮겨내지 못할 말은 섣불리 펼치지 말아 주셔요. 말하는 분께서 가슴속 깊이 곰삭여서 받아들인 이야기까지 아니라면 되도록 삼가 주셔요.

 세상 모든 말은 움직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말은 없습니다. 따로 보기를 들고 싶지 않습니다만, ‘computer’가 언제부터 우리가 익히 쓰는 ‘컴퓨터’ 뜻이었을까요. ‘car’가 언제부터 우리가 즐겨쓰는 ‘자동차’ 뜻이었을까요.

 요즈음은 ‘다리’라는 말도 거의 안 쓰입니다. 한강에 수두룩히 놓인 저 다리뿐 아니라 부산에 놓인 다리, 또 인천시에서 빚까지 뒤집어쓰면서 지으려고 하는 어마어마한 다리도 ‘다리’인데, 이 다리가 짧으면 ‘橋梁’이라고 적고, 길면 ‘大橋’라고 적더군요. 우리 말 ‘다리’가 쓰이는 자리는 ‘돌다리’나 ‘출렁다리’쯤입니다. 그나마 ‘출렁다리’조차 쓰기 싫다며 ‘懸垂橋’를 쓰는 우리 나라 공무원입니다.

 우리는 왜 ‘긴다리’와 ‘짧은다리’라는 말을 빚어내지 않을까요. 우리는 왜 ‘큰다리’와 ‘작은다리’라는 말을 지어내지 못할까요. 우리 말로 가리키면 어설픈가요. 우리 말로 나타내면 모자란가요. 우리 말로 이름을 붙이면 알맞지 않은가요. 우리 말로 이야기하면 ‘form’이 안 나는지요.

 책을 이야기하는 신문자리에 ‘북’도 아닌 ‘book’을 쓰는 일, 나라살림이나 집살림을 이야기하는 신문자리에 ‘경제’나 ‘이코노미’도 아닌 ‘money’를 쓰는 일은 워낙 오래된 일입니다. 아예 이대로 굳어버린 듯합니다. 운동경기 핸드볼에서는 퍽 옛날부터 ‘도움주기’라고 써 왔으나, 농구나 축구에서 ‘도움주기’라고 쓰면 마치 ‘북녘사람들처럼 말하는 셈’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핸드볼 경기를 하는 사람은 뭐지요.

 배구 경기가 ‘프로’가 아닌 ‘아마’였을 때는, 경기를 알려주는 방송 사회자나 경기 소식을 담는 신문기자 모두 ‘가로막기’만을 말했으나, 이제는 ‘블로킹(blocking)’이라고만 말합니다. 또한, ‘아마’배구였을 때에는 없던 기록이 새로 생기면서, 지난날에는 ‘건져올렸습니다’ 하던 말을 ‘디그(dig)’라는 말로만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가로막기’를 살려놓지 못하고 ‘블로킹’만 북돋우는가요. 왜 우리는 ‘건져올림’은 내팽개치고 ‘디그’만 끌어당길까요.

 ┌ 어떠한 낱말도 한 가지 말뜻으로만 붙박히지 않는다
 ├ 어떠한 낱말도 한 가지 뜻에만 매여 있지 않는다
 └ 어떠한 낱말도 한 가지 뜻으로만 쓰일 수 없다


 거짓말 같아요. 아니, 우리 말만 울타리 밖인 듯해요. 우리 말만 쏙 빼야 하는가 봐요. (지식인들이 입이 닳도록 외치고 있는 말로 하자면) ‘한글처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글’ 한 가지만큼은 “한 가지 낱말이 한 가지 뜻으로만 매인 채 다른 뜻으로는 쓰일 수 없다”는 ‘이론’이나 ‘논리’로는 살피면 안 되는가 봐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잣대’라는 말을 키우지 않고 ‘무게’라는 말을 북돋우지 않고 ‘생각’이라는 말을 살찌우지 않으며 ‘믿음’이라는 말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사랑’이라는 말조차 다독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말쓰임새를 넓히지 않습니다. 그저 ‘담론(談論)’뿐이에요. ‘대화’요 ‘토론’이요 ‘토의’요 ‘논의’뿐이에요. ‘담론’ 한 가지로도 모자란지 ‘거대 담론’이라는 말까지 꺼내요. 우리 동네, 그러니까 인천시 공무원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분께서는 우리한테 ‘디스커션’을 하자고 말씀을 하더군요. 잠깐 벙쪘으나,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문화잔치를 한다고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데, 저 혼자만 ‘잔치’를 이야기하고, 다른 모두는 ‘축제(祝祭)’와 ‘축전(祝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나마, ‘비엔날레(이biennale)’라고 하지 않으니 나은 편인가요. ‘생일파티’를 한다는 자리에서 “‘생일잔치’를 하는가 보지요?” 하고 넌지시 한 마디 건네니 조용해집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예 주둥아리 꾹 다물고 살아야 하는가요.

 저는 동네에서 도서관을 조그맣게 열어서 꾸리고 있습니다. 그냥 ‘도서관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거나 ‘도서관지기’라고 말하는데, ‘관’에서 나오신 분들은 한결같이 ‘도서관장’이라고 말해서 듣기에 거북합니다. 기자 분들도 ‘도서관장’이라는 말을 꺼내니 떨떠름합니다. 왜 ‘지기’는 안 쓰고 ‘長’이라는 말만 써야 할까요.

 해마다 달력을 보내주는 분한테, ‘새해 달력을 만드실 때에는 부디 요일을 한글로라도 적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여쭙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일월화수……’는 한 글자도 안 들어가고 ‘s m t w ……’만 들어간 달력을 받습니다. 게다가 ‘1월 2월 3월 ……’도 없어요. 알파벳으로 쏼라쏼라 새겨져 있습니다. 나라밖 사람한테 선물할 달력이 아니라 나라안 사람, 그러니까 우리들 한국말을 하며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볼 달력인데, 정작 ‘한국’ 달력에는 명절 이름조차 한자로 적기 일쑤입니다. 한글을 찾아보기 어려워진 달력입니다. 달력을 보면서 영어 공부를 하고 한자 공부를 하라는 소리인가요.

 ┌ 어떠한 낱말도 새로운 뜻이 담기는 법이다
 ├ 어떠한 낱말도 새롭게 쓰이기 마련이다
 └ 어떠한 낱말도 새로운 뜻으로 쓰이게 된다


 모르겠습니다. 아니 믿지 못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국어사전을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 지식인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신문과 잡지를 모르겠고, 책과 논문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어디로 걸어가려고 하는 걸음인지, 어디로 나아가려고 하는 움직임인지, 무엇을 하려는 매무새인지, 누구와 함께 살고픈 어깨동무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와 살고 싶다고요? 가난한 이를 돕고 싶다고요? 어려운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겠다고요? 어려운 겨레한테 사랑을 나누겠다고요?

 참말 가난이 무엇이고 어려움이 무엇인지 머리로만 아는 테두리를 넘어서 몸으로 부대껴 보고서야 하시는 말씀인지요. 참말 가난한 삶이 무엇이고 가난이라는 굴레가 왜 되풀이되고 가난이라는 틀거리가 어떻게 짜여지는가를 뿌리깊이 파헤쳐서 알아내면서 거드는 손길인지요. 모르기에 여쭙습니다. 믿지 못하겠기에 믿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4341.4.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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