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고 어떻게 먹고사느냐 걱정해 주는 분이 있어 고마운 한편 미안합니다. 책버러지 한 마리가 뜯어먹을 잎사귀 못 찾아 헤매일까 길찾기를 해 주니 고맙고, 아무리 책버러지인들 스스로 제 먹을 잎사귀를 찾아나서서 걱정을 끼치지 말아야지 이래서야 되느냐 싶어 미안합니다.

 저를 걱정해 주는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을 지난달에 만났습니다. 선배는 ‘아무리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하지만 그걸 다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이 말 저 말 하고 싶어도 꾹 눌러 가면서 사는데’ 하면서, 여러 사람들 보기를 듭니다. 그대로 되치거나 받아치기를 하기보다는 살며시 삭여내면서 ‘반사!’ 하듯이 맞은편으로 건네줄 수 있다고.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옛말처럼 살아가는 저이기에, 개 버릇 남 주냐(그나저나 이 옛말이 맞는지? 알쏭달쏭 헷갈립니다)는 옛말처럼 살아가는 저이기에, 참으로 좋은 말을 받아먹으면서도 좀처럼 제 매무새가 나아지거나 거듭나지 못합니다. 다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저지르는 잘못과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다’고 한다면 눈꼴시어서 보지 못합니다. 이럴 때마다 ‘그래,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니?’ 하고 되뇌입니다. 이러면서 더딘 걸음으로 모자람을 털어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런데, 아무리 엉덩이에 뿔나고 못난 버릇을 그냥 껴안고 사는 저입니다만, 얄딱구리한 책을 읽어야 하고, 게다가 그 얄딱구리한 책을 소개하는 글마저 써야 하는 형편에는 아주 기가 질리고 혀가 비죽 나오고 이마에는 밭고랑이 수두룩 쌓입니다.

 선배는 말합니다. ‘최종규 씨가 땅 파먹고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닌데, 혼자만 살아가는 살림도 아닌데’ 하고. 맞습니다. 이러하니 볼꼴사나운 곳에서 글 하나 써 달라는 부탁이 들어와도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받아먹으면서 절을 해야지요. 터무니없이 어설프고 덜 떨어진 책을 던져 주면서 ‘이 가운데 이달 추천책 하나 뽑아 주시오’ 하고 일을 맡겨도 ‘그러믄요 고맙습니다’ 하고 낼름 받아먹으면서 굽신굽신 해야지요.

 허허, 그렇지만, 그러하지만, 이 짓거리는 참 못할 짓거리입니다. 하루 세 끼니 밥먹고 살기가 아무리 고달프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싶어서. 제가 아직 덜 가난하게 살고, 덜 없이 살아서 배부른 소리를 내뱉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온삶을 바쳐서 책 하나 좋아하는 버러지로 살고 있고, 그동안 펴낸 책도 글삯을 안 받으며 출판사돕기를 한다며 살아온 몸으로서, 못 봐줄 책은 참말 못 봐주겠습니다. ‘이건 아니올시오다!’ 하고 외쳐야 할 때는 외쳐야 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제가 사는 동네 한복판에 너비 50미터에서 70미터에 이르는 찻길을 새로 뚫으려고 인천시장이며 인천시 종합건설본부장이며 또 여기 밑에 있는 도로국장이며 갖은 공무원들이 법석입니다(이 가운데 도시계획국장 ㅅ아무개씨는 건설업체 돈을 몇 억 받아먹은 죄로 엊그제 구속되었는데, 이런 막공사와 막개발 삽날은 멈출 낌새가 없습니다. 공권력을 투입해서 공사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만 울려퍼집니다). 조용하게 살아가는 동네 한복판인데, 또 이곳 주민들은 이런 찻길을 내지 말라고 반대를 하는데, 시청 공무원들은 “이 길은 주민 뜻에 따라서 낸다”는 말만 여러 해째 되풀이를 합니다. 이런 일도 그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요.

 오늘저녁, 어느 잡지사에서 ‘글 재촉 인터넷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곳에서 펴내는 잡지에는 ‘이달 우수추천도서’라는 꼭지가 있고, 이 꼭지에서 어린이책 추천하는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가 끼인 지 어느덧 세 해가 되고 있는데, 지난 세 해 동안 달이면 달마다 추천할 만한 책이 보이지 않아서 애를 먹습니다. 그렇다고 늘 이러하지는 않아서, 미처 모르고 지나쳤을 법한 훌륭한 책도 꽤 만났습니다. 《장미마을의 초승달 빵집》이라든지, 《숲에서 크는 아이들》이라든지, 《도서관에 간 사자》라든지 《앨피의 다락방》이라든지 《나의 를리외르 선생님》 같은 책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세 해 동안 이 몇 가지를 빼놓고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고, 별 다섯을 만점으로 했을 때 별 셋을 주기도 창피하거나 쑥스럽다고 느껴진 책이, 저로서는 4/5가 넘었습니다.

 글 재촉 편지를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이달도 허둥지둥 글을 마무리지어서 보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일삯이 없는 글, 자원봉사 글입니다. 돈도 안 되는 일이긴 하나, 심사위원이라는 다섯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무 책이나 함부로 추천을 못하겠습니다’는 말을 하고 싶고, ‘이 잡지사에서는 어떤 어린이책을 후보로 내세우고 어떤 책이 훌륭한 책이라고 소개할 터인가’를 궁금하게 여기어, 아직까지 심사위원이라는 이름을 걸쳐놓고 있습니다.

 ‘이달에도 추천할 만한 책이 한 권도 없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하나를 뽑으라 한다면 이 책을 ……’ 하는 말로 편지를 보내고 나서 길게 한숨을 쉽니다. 어찌해야 좋은가, 앞으로도 이대로 해야 하나, 세상은 뒤죽박죽이니 이런 데까지 마음을 안 기울이는 편이 나은가, 아니면, 아니면, 제가 보는 눈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거나 비뚤어져서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 책’인데 나 혼자서만 ‘그 책 참 구린데?’ 하고 말을 하는 셈인가요?

 그나마, 저한테 고마운 도움말을 건네주는 선배가 얼마 앞서 《88만 원 세대》라는 책에서 무엇이 어떻게 왜 말썽거리인지를 낱낱이 까밝히는 글을 하나 썼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옳거니! 나 혼자만 이 책을 얄딱구리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네!’ 하면서 손뼉을 쳤습니다. 한 달 벌이가 30만 원도 채 안 되는 가운데, 달마다 도서관 달삯 40만 원을 내야 하지, 틈틈이 책 사 읽어야지, 밥먹고 살아야지, 또 헌책방 사진 찍어야지, …… 돈 들어올 구석은 없이 돈 나갈 구석만 있이 사노라면, ‘한 달 88만 원 버는 일도 기쁨 아닌가?’ 싶어서, 무엇보다도 그 책이름이 영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또한, ‘짱돌을 던지라’는 말도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문제를 푸는 법이 그 하나뿐인가 싶은데, 글쓴이로서는 빗대는 말로 그렇게 꺼냈을지 모릅니다만, 글쎄요, 빗대는 말을 그만큼밖에 못한다면, 글쎄요. 지금 우리 나라에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지만, 중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 나아가 중고등학교만 마친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노동자가 몇 천만이라고들 말합니다만, 이 노동자 몇 천만이 손쉽게 읽고 받아들이며 새길 만한 책은 얼마쯤 될까요? 참말로 노동자들 눈높이를 헤아리는 책은 얼마나 되지요? 얼마 앞서 전희식 님이 《똥꽃》(그물코)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우리 나라에 동화는 있어도 노화는 없다’는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어린이책은 돈이 된다고 하니 너도나도 나서서 펴냅니다. ‘아이들 책은 수준 낮아서 안 낸다’고 하던 그 이름난 인문학 출판사들도 슬그머니 어린이책을 펴냅니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옛날에 하던 말을 뉘우치거나 바로잡지는 않아요. 바로 이들, 돈이 되니까 어린이책을 내는 출판사마다 돈이 안 되는 책, 바로 적게 배운 사람들이 읽을 책과 노동자가 읽을 책과 농사꾼이 읽을 책은 죽어도 안 펴냅니다. 여기에다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읽을 책도 죽어라 안 냅니다. 돌아가신 권정생 할아버지가 《몽실 언니》며 《초가집이 있던 마을》이며 어린이책으로 써 냈지만, 가만히 읽어 보면 아이들보다는 당신 권정생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에 있는 이웃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들려주려고 쓴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러나 골칫거리는 바로 저한테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말 그대로 ‘남들은 다 좋다고 별 다섯을 꾹꾹 눌러서 주는 책’을, 저는 ‘별 하나 주기도 아깝지만 겨우 하나를 달아놓는 책’으로 받아들인다면, 서로가 너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거나, 제 눈이 삔 셈이지 싶거든요.

 조금 더 생각해 봅니다. 제가 별 다섯을 주는 책들, 더없이 좋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섬기며 좋아하는 책들치고, 둘레에 두루 읽히는 책이 드뭅니다. 《숲을 지켜낸 사람들》이 얼마나 읽히며, 《숲속의 꼬마 인디언》이 몇 사람한테 읽히며, 《수달 타카의 일생》이 읽히기나 하고 있으며, 《나의 수채화 인생》을 알아보는 사람은 얼마쯤이며, 《한국의 일상 이야기》는 팔리기나 했으며,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를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사람은 몇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까요. 저는 《지는 꽃도 아름답다》를 백 권 사서 선물했고, 《똥꽃》은 쉰 권을 사서 선물할 생각이며,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고 쉰 권 사서 선물하고 있습니다. 돈이 닿으면 《슬픈 미나마타》라는 책도 쉰 권 사서 선물하고 싶은데, 이제는 은행돈도 바닥이 났습니다. 제가 쓴 어느 글 하나를 놓고 ㅈ일보 기자가 명예훼손 고발을 하는 바람에 벌금 200만 원마저 물어야 해서 빚을 져야 할 판입니다. 그래도 제 마음에 콕 박히는 책들을 사는 데에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주머니가 털털 털려서 눈물이 날 판이지만,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를 사서 읽습니다. 만화책 《소년 탐구생활》을 사서 넘깁니다. 《주식회사 물》을 사 놓고 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소비사회의 탐색》이라는 책도 사서 옆지기한테 선물합니다.

 한 번 더 헤아려 보면, 누구보다도 저는 세상을 ‘다 다름’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더 나은 자리에 서 있는 듯’ 엉뚱하게 바라보면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들은 ‘이 책 참으로 좋아서 별을 다섯 매기’는데, 저는 ‘고 책은 어디로 보아도 형편없어서 별 하나 주기도 아까운데’ 하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부디 이렇다면 반갑겠습니다. 제 눈이 비뚤어졌다면, 제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면, 제 매무새가 뒤뚱거린다면, 제 삶이 엉망진창이라면, 이리하여 저만 골치아픈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즐겁고 신나고 멋진 책을 알아차리는 마음그릇이 없는 책버러지가 깝죽을 떨고 있었다면 그지없이 좋겠습니다. (4341.3.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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