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21 나무를 읽는 손
책벌레수다 : 휘두르지 않고 쓰다듬기
나무는 우람하게 자라더라도 굳이 큰소리도 작은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가만히 둘레를 아우른다. 나무가 맺는 씨앗은 더없이 작지만, 이 작은씨가 머잖아 아름숲으로 피어나는 첫길이다. 나무는 뭇새가 잔뜩 날아앉아도, 애벌레가 잎을 잔뜩 갉아도 그저 모두 내어준다.
우리는 아이라는 나날이던 때에 아무런 손길을 못 받고 자랐을 수 있는데, 오늘은 어른과 어버이라는 자리에 서서 새록새록 따스하게 손길을 펴는 나무로 설 만하지 싶다. 올해(2026해)로 쉰 살이 넘은 분이라면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는 하루”를 신물나도록 겪었으리라. 마흔 살이 넘은 분도 툭하면 얻어터지면서 살아야 했을 테지. 서른 살이 넘은 분 언저리는 거의 안 맞는 나날을 보냈지 싶고, 스무 살이 넘는 분은 주먹다짐이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터전이라고 느낀다.
“맞고 컸”으니까 “때리면서 키우”기 쉽다. 우리나라 싸움터(군대)가 꼭 이런 꼬라지였다. 윗내기는 새내기를 신나게 두들겨패고 괴롭히고 막말을 일삼는다. 새내기는 가운데(중간고참)에 이를 무렵에 “예전에 얻어맞고 시달리던 그대로” 새내기를 억누르고 괴롭히는 몫을 맡아야 한다. 이런 얼뜬짓이 안 끊이는 모습이 지겨우면서 괴로웠다. 석걸음(상병)을 지날 즈음부터 또래(입영동기)를 말렸다. “얘들아, 우리까지만 죽도록 맞고서 끝내자. 이 멍청한 짓을 물려줄 수 없어.” “무슨 소리야? 너도 그렇게 맞았으면서 어떻게 그냥 지나가? 야, 우리가 때리고서 나가야지.” “그럼, 우리한테 맞는 동생들도 걔네가 우리 자리에 오면 똑같이 때리잖아? 우리부터 끊어야 하지 않아?” “와, 여기 부처님이 다 계시네. 아니, 예수님인가? 야, 우리는 그냥 육군보병 똥개야. 똥개일 뿐이니까 똥개로 구르다가 가야지.” “뭐, 우리가 똥개는 맞지만, 내가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주먹을 안 들고 말로 하면서 바꿀 수 있지 않겠니?” “네, 네, 너 혼자 그러세요.”
책벌레는 책을 쥘 적마다 나무가 베푸는 빛이 무엇인지 돌아본다. 우리가 쥐는 모든 책은 아름숲에서 오고, 아름숲은 아름드리나무가 베푼 종이로 묶는다. 나무한테서 받은 종이에 어떤 글을 앉혀서 어떤 줄거리를 다루든, 책을 손으로 만질 때마다 나무를 만나고 느끼고 얘기한다고 느낀다.
책벌레는 누구보다도 나무를 곁에 두는 삶이다. 시골 아닌 서울에서 살더라도 책벌레는 나무가 베푼 사랑을 어마어마하게 누리는 나날이다. 나무 한 그루 심을 땅뙈기조차 없는 땅밑집(지하실)이나 하늘집(옥탑방)에서 살더라도, 그냥 잿더미(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책벌레는 누구보다도 푸른책(환경책)을 가까이할 노릇이면서, 푸른살림을 일구려고 온힘을 기울여야지 싶다. 온통 ‘나무몸’인 ‘종이꾸러미’를 이루는 책이니까.
나무는 언제나 베푸는데, 나무 스스로 ‘베푼다’고 여기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나무는 그저 작은씨를 틔우고 깨워서 천천히 줄기를 올려서 푸르게 노래하려는 길이라고 느낀다. 우리집에서 자라는 나무이든, 마을이나 길에서 스치는 나무이든, 서울이나 큰고장에서 슬프고 아프게 줄기치기와 가지치기에 시달리는 나무이든, 그윽히 바라보다가 살며시 쓰다듬고 폭 안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입맞춤을 한다. 나는 나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책벌레로 걷는 하루이고 싶다.
나무살림을 지켜보는 사람은 “아낌없이 베푸는 나무”로 여기지만, 나무는 늘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지을 뿐이라고 본다. 사람은 늘 나무한테서 받고 누리고 얻되, 나무는 “사람한테 베푼다”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푸르게 빛난다”는 마음이라고 본다. 어찌 이렇게 여기느냐 물을 만하겠지. 마주하는 모든 나무를 쓰다듬고 안고 뺨을 대면서 물어본다. “넌 어떤 숨결인 사랑이기에 이토록 사람한테 넉넉히 베풀 수 있니?” 나무는 으레 우리 마음에 울리는 고즈넉한 빛소리로 사근사근 들려준다. “네(사람)가 나(나무)를 바라보는 눈빛 그대로, 나(나무)는 너(사람)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춤추고 노래하는 하루야.”
나무는 나무 스스로 빛난다. 나무 곁에 선 사람은 사람으로서 나란히 빛날 수 있다. 나무한테서 얻는 살림을 기쁘며 반갑게 다루고 갈무리하면서 새롭게 오늘을 지으면, 나무도 사람 곁에서 어느새 ‘받고 누리’는 사랑이 있는 길이지 싶다.
지난날 싸움터(군대)에서 겪은 일을 더 떠올려 본다. 그때(1995.11.6.) 싸움터에 끌려가서 마지막날(전역일 1995.12.31.)을 함께 맞이한 또래가 열이었던가. 마지막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에 눈이 오지게 내려서 쌓였다. 한 길(1m) 넘게 쌓인 눈이라 어떤 수레(트럭)도 다닐 수 없었다. 마지막말(전역신고)을 외치는 우리한테 중대장과 대대장은 “야,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하루 더 자고서 가지 그래? 걸어서 어떻게 먼 멧길을 내려가려고?” 하면서 웃는다. 우리는 한목소리로 “눈밭을 헤치며 내려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죽더라도 오늘 집으로 가겠습니다!”
한나절 남짓 걸어서 내려가며 또래들하고 이야기한다. “최뱀, 너 대단하더라.” “뭐가?” “네가 꺾였을(상병6호봉) 때 우리를 다 모아서 동생들 때리지 말자고 했던 말 생각나?” “그럼, 생각나지.” “너 어떻게 애들 안 때리고 끝까지 버텼냐? 대단하다.” “난 너희가 더 대단해.” “에? 뭐가?” “아무리 얼뜬 놈들한테 신나게 얻어맞고 굴러야 했더라도, 어떻게 멀쩡하고 불쌍한 동생들을 그렇게 때릴 수 있냐? 우리가 뭘 잘못해서 맞은 적이 없잖아. 그놈(고참)들은 그냥 심심풀이로 때리고 괴롭혔잖아.” “그렇지.” “안 때리고도 함께할 수 있어. 이제는 주먹질은 지긋지긋하고, 사라져야 해.”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원당리에서 시골버스를 타고서 양구읍으로 나온다. 이제 다들 헤어질 때이다. 헤어지기 앞서 허름한 밥집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불술(소주)을 두 병씩 깠다.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우리, 살아남았지? 그 눈밭을 헤치고서 드디어 그 불바다에서 살아나왔지?”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춘천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마지막으로 몸을 싣는 ‘티엠오’이다. 청량리역에서 내린 뒤 용산역 앞 〈뿌리서점〉부터 들른다. 책집지기 아저씨한테 큰절을 올리며 “저 이제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 뻔질나게 책을 보러 오겠습니다. 군대에서는 책을 한 줄도 읽을 수 없었으니, 읽어야 할 책이 어마어마합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전철을 타는데, 어쩐지 쓸쓸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엠에프’라고 했다. 아이엠에프가 덮치면서 삽질(공사장 노가다) 일자리가 몽땅 사라졌다. ‘백두산부대 겉옷’을 입고 삽질을 나가면 일삯을 곱빼기로 준대서 잔뜩 별렸는데.
ㅍㄹㄴ
남성은 그들 내부의 여성과 융합할 때 창조적이 되고, 또 여성은 그들 안의 남성 속에 깃든 여성성과 닿을 때 창조적이 됩니다. 《지구, 우주의 한 마을》 22쪽
다른 사람의 문화를 파괴하는 것은 불멸성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사라예보의 올림픽 스타디움과 중앙도서관이 파괴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울었다. 신문에 실린 폐허가 된 도서관 사진이 무엇보다도 속상했다. 그 문화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251쪽
내가 혼자서 가만히 참고 있는 동안에, 유카리 일당뿐만 아니라 반 여학생 전체가 나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학교를 결석하지는 않았다. 누구 하나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도 선생님이 눈치 채지 못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불균형》 20쪽
“그렇습니다. 당신도 바벨2세도 바벨 님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입니다. 그러나 바벨2세 쪽이 보다 강한 바벨님의 피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 “내 최대의 힘을 쓸 수 없다는 건가. 그럼 이제 요마와 어떻게 싸우지?” “당신의 능력으로 싸우십시오. 당신이 수천 년 전에 그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켰다면 인류는 당신을 신으로 모셨을 겁니다. 그건 요마도 마찬가지겠지만요.” 《바벨 2세 2》 43, 226쪽
즉 항상 즐거운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자신은 기분이 나빠도 미소를 띄우고 활력과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 … 단순생산직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적 전문가들은 자기들 일의 최종 수혜자와 직접 접촉하는 일은 별로 없다. 191, 193쪽
《지구, 우주의 한 마을》(게리 스나이더/이상화 옮김, 창비, 2005.5.23.첫/2015.9.30.고침)
#APlaceinSpace #GarySnyder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템플 그랜딘/홍한별 옮김, 양철북, 2005.9.12.)
#ThinkinginPitures (1995년) #TempleGrandin
《불균형》(우오즈미 나오코/이경옥 옮김, 우리교육, 2004.10.22.)
#非バランス (1996년) #魚住直子
《바벨 2세 2》(요코야마 미쓰테루/이동섭 옮김, AK커뮤니케이션즈, 2007.1.30.)
#バビル2世 #橫山光輝
《國家의 일》(로버트 비 라이시/남경우 외 옮김, 까치, 1994.7.1.)
#RobertBReich #WorkofNation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