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읽는 닳는
이웃을 만날 적마다 눈망울을 마주하며 생각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이·차림새·쌈지·얼굴·몸·노리개는 아예 볼 일이 없다. 서로 눈과 눈을 거쳐서 속마음이 맞닿을 적에 반짝반짝 별빛을 잇는다. 서로 별 한 톨로 이곳에 있으니 가만히 본다. 눈으로 보면서 별빛을 잇기에, 입을 열면서 말을 틔운다. 귀를 쫑긋하면서 빛소리를 담는다.
너랑 나랑 나란히 별 한 톨이지 않다면 굳이 한자리에 있을 까닭이 없다고 느낀다. 너이든 나이든 별빛이 없이 어둡게 잠긴 눈이라면 수렁과 늪에 빠져드는 덫일 테지. 바다에 잠겨서 깊이 헤아리는 눈이 아니라면, 바람에 잠겨서 널리 살피는 눈이 아니라면, 너하고 나는 이곳에서 마주할 일이 없지.
지난해에 문득 만난 이웃님 한 분이 다른 이웃님을 알려주었다. 이 이웃님과 저 이웃님이 함께 어울리는 배움자리를 지난해에 길고 느슨하면서 꾸준하게 이었다. 이렇게 한 해가 흐르고서 어느 달책에 글을 싣기로 했다. 달책에 이야기 한 자락이 실린 뒤에는 새롭게 또다른 이웃님을 만난다. 새롭게 만나는 또다른 이웃님은 다시금 다른다른 이웃님으로 잇고, 이제껏 어림도 하지 못 하던 숱한 이웃이 이곳에서 발걸음을 내딛는 하루를 지켜볼 수 있다.
늘 하듯 책과 노래를 띄웠다. 새로 마주하는 이웃님은 내가 띄운 책과 노래를 반갑게 맞이했다고 알려준다. 날마다 되읽으면서 더없이 기쁘게 배운다고 알려준다. 나는 덩달아 이웃님하고 쪽글을 주고받는다. 날마다 주거니받거니 쪽글 한두 자락씩 날아가고 날아온다. 나한테 작은아버지 또래일 ‘할아버지 이웃님’은 책 한 자락을 마르고 닳도록 읽어 주신다.
닳고 낡는 책을 살며시 쓰다듬는다. 나도 책이 닳도록 읽기는 하지만, 이웃님이 손빛으로 넘기며 닳는 책을 보니 새삼스럽다. 씨앗 한 톨을 고이 심었나 하고 돌아본다. 슥 스치는 글이나 책이 아니라, 서로 하나인 하늘마음으로 마주할 글과 책일 적에 별 한 톨이 밤마다 가만히 돋을 테지.
손끝은 빚고 짓고 일구는 사이에 굳은살이 밴다. 책끝은 읽고 새기고 나누는 사이에 보드랍게 부푼다. 손길을 담고 펼치는 동안에 솜씨가 무르익는다. 책길을 여미고 여는 동안에 책밭이 푸르게 피어난다.
모처럼 서울로 이야기마실을 나온 김에 책집 세 곳을 바람처럼 돌아본다. 거의 나아가던 왼뒤꿈치는 다시 절뚝절뚝. 왼발 앞꿈치에 제대로 힘주어 걷지 못 한다. 절뚝절뚝 기우뚱기우뚱 몸짓으로 이럭저럭 걸어다닌다. 저절로길(에스컬레이터)이 보이면 디딤돌로 오르내린다. 천천히 걸어서 신촌 〈홍익문고〉에 닿는다. 아침에 열자마자 들어간다. 책 한꾸러미를 느긋이 장만한다. 이윽고 〈알라딘중고샵 신촌가게〉에 들른다. 여기에서는 판끊긴 만화책을 한꾸러미 고른다. 마지막으로 〈숨어있는책〉 쪽으로 걸어간다. 건널목을 건너고서 골목으로 들어설 즈음 과일집을 본다. 길가 과일집에서 파는 복숭아는 고흥보다 알이 굵고 값마저 착하다. 들고 갈까?
끙 망설이다가 지나간다. 〈숨어있는책〉에서는 책짐을 두 꾸러미 더 장만한다. 이제 뒤뚱뒤뚱 걷는다. 등에 가슴에 어깨에 팔뚝에 손에 쥔 책짐이 수북수북하다. 버스나루까지 씩씩하게 온다. 땀으로 흥건히 젖은 등짐과 앞짐과 손짐을 다 풀어서 내려놓는다. 낯을 씻는다. 밑칸에 책을 실으려다가 모두 안고서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오롯이 읽으면서 돌아가자. 어제는 바삐 움직이느라 책읽기를 누릴 틈이 밭았다. 밤조차 등허리를 펴며 일찍 누웠다. 오늘 아침도 여러 곳에 보낼 글을 가다듬느라 책을 못 폈다.
손과 눈과 마음과 몸이 하나로 닿으며 함께 일어나는 오솔길을 달리면서 집으로 간다. 읽다가 자고, 다시 읽다가 자면 어느새 고흥읍일 테지. 고흥읍에 닿으먼 시골버스를 탈 수 있고, 택시를 부를 수 있다. 다 즐거운 길이다. 2026.8.26.물.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