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18 지키려면 짓는

책벌레수다 : 말더듬이로 보낸 어린배움터



  말 한 마디는 모두 씨앗이기에, 말씨를 눈여겨볼 수 있다면 이 작아 보이는 말씨 한 톨이 다 다르게 빛나는 줄 알아차리게 마련이다. 말은 처음에는 그저 ‘말’이었을 테지만, 우리 마음을 담아낼 소리로 깨어나면서 문득 ‘말씨’로 거듭나고, 이 말씨는 ‘말빛’으로 나아가면서, 어느새 다 다른 모든 사람한테 저마다 새롭게 ‘말길’을 잇는 ‘낱말(나를 나로 틔우는 말)’로 선다.


  나는 일곱 살까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며 잘 뛰놀았다. 여덟 살에 어린배움터에 들고부터 ‘한글’을 모른다며 길잡이한테 꾸지람을 듣고 따귀를 맞아야 했는데, 1982해 언저리에는 웬만한 어린이라면 다 겪은 일이다. 그래도 나는 이레 만에 한글을 익혔다. 한글을 익히자니 이제는 배움책을 소리내어 읽으라고 시키고, 내가 혀짤배기에 말더듬이인 줄 이때부터 알아챘다.


  1987해를 맞이할 때까지 혀짤배기에 말더듬이를 놀리는 또래한테 시달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 다만, 용케 안 죽었을 뿐 아니라, 어린배움터를 마칠 무렵 동무 하나가 “친구가 말할 때 웃는 거 아냐!” 하고 따끔하게 끊어 준 보람으로, 더는 놀림받지 않았다. 이미 어릴적부터 내도록 ‘말씨·말결·말빛·말소리’가 무엇인지 홀로 찾아나서는 길을 걸었다.


  나부터 말을 더듬고 제대로 소리를 못 내니,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더 더듬거나 힘든 동무가 어떤 마음인지 곧바로 느끼는 나날이었다. 이른바 “공부 못하는 아이”를 놀리는 아이하고는 안 놀고 싶다. “조금이라도 공부 잘하는 아이”는 언제나 “공부 못하는 아이”랑 모둠을 안 지으려고 하더라. 이럴 때마다 나는 “공부 못하는 아이”를 부르거나 곁에 앉아서 한모둠을 이루었다. 이러면 둘레에서 다들 움찔한다.


  ‘쟤 왜 저래?’ 하는 눈치와 말을 듣는데, 마음씨가 착한 동무가 선뜻 나서서 “공부 못하는 아이”가 잔뜩 있는 모둠으로 들어오더라. 어린배움터 여섯 해 내내 느낀 바 하나를 풀자면, “공부 못하는 아이란 없다”이다. “눈길과 마음길과 손길을 못 받는 아이만 있다”이다. 함께 모둠을 지어서 함께 실마리를 풀어가면 다 다른 빠르기로 다 잘 알아듣고 즐겁다.


  곧잘 어릴적을 떠올린다. 말더듬이 어린이가 아닌 어릴적이었으면 다른 길을 갔을 수 있는데, 말더듬이 어린이로 살아낸 나날이 있기에 한결 둘레를 헤아리면서, 누구보다 나 스스로 돌아보는 길을 가다듬었지 싶다. 더듬더듬 소리내는 말결을 마흔 해쯤 가다듬고 보니, 이제는 혀짤배기여도 이렁저렁 말하는 결을 찾는다. 여러 이웃말을 배우고 익히는 동안,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르게 말소리를 터뜨리는 줄 느낀다.


  시골에서 살며 시골말을 늘 듣다 보면, 이웃시골로 마실을 가서 이웃시골말을 듣다 보면,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이녁 몸과 입과 이와 입술과 마음에 맞게 말소리를 내는 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는 똑같이 서울말소리를 내야 하지 않다. 서울내기여도 서울말을 다 다르게 하면 된다. 어느 곳이든 어느 것이든 다를 바 없다. 이 삶과 나란히 바라보면 될 일이다. 우리는 글을 놓고서 ‘쓰다·적다·옮기다·담다’를 비롯해서 온갖 낱말로 나타내곤 한다. 쓰다듬듯 쓸 수 있고, 조금조금 적을 수 있고, 이쪽으로 안듯이 옮길 수 있고, 속으로 넉넉히 담을 수 있다. 어떻게 바라보든 스스로 길을 찾을 일이지 싶다.


  지키고 싶기에 짓는다. 지키는 동안에 지새우고 지내면서 가만히 바라보고 느낀다. 지키고 지새우고 지내는 곳이 바로 집인 줄 알아간다. 집에서 즐겁게 지낼 적에 동무랑 이웃하고 도란도란 어울리게 마련이라고 배운다. 어떤 말씀이더라도 우리가 속으로 밝게 바라보는 눈길이라면 서로 어울리는 어깨동무로 간다. 어떤 글과 책이더라도 우리가 마음을 틔워서 품는 손길이라면 서로 나누고 베푸는 이야기꽃으로 간다.


  한자를 쓰느냐 안 쓰느냐는 썩 대수롭지 않다. 우리말을 정갈하게 쓰느냐 마느냐도 그리 대단하지 않다. 먼저 우리 마음을 어떤 낱말에 어떻게 담으려 하느냐를 바라볼 노릇이다. 삶을 마음에 담기에, 마음을 말로 옮기고, 이 말을 새삼스레 글로 담는 얼거리를 가만히 바라본다면, 모든 실마리는 부드럽게 차분히 풀 수 있다.


  중국이건 일본이건 우리나라이건 같다. 글(한자)이 아닌 말(삶)로 보면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 수수한 사람은 어질게 마음을 나누었지 싶다. 중국말이란 중국사투리이자 중국삶말이요, 일본말이란 일본사투리이자 일본삶말이다. 우리말이란 우리사투리이자 우리삶말이다.


  ‘서울말(표준말)’이라 할 적에는 삶이나 마음하고 멀다. 서울이라는 곳으로 틀을 세우면, 모든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르게 나타내는 말씨와 말결과 말빛을 다 버려야 한다. 서울말을 쓰면 쓸수록 우리 스스로 삶을 잊거나 잃다가 마음까지 잊거나 잃는다. 게다가 국립국어원에서 틀을 잡는 서울말은 ‘우리말씨’하고 먼 ‘일본말씨·옮김말씨·중국말씨’가 뒤범벅인걸. 수수하고 쉽게 우리말을 쓰려고 한다면, 숲빛으로 푸르게 삶과 살림을 되찾으면서 나란히 손잡는 하루를 세우려는 길을 걸을 수 있다.


  이 끝에서 늘 저곳을 가만히 본다. 이곳에서 언제나 저 너머를 물끄러미 본다. 지키는 일은 안 나쁘지만, 거머쥐거나 움켜쥐려고 하면 다치다가 닳는다. 그저 품에 지니듯, 집에 두듯, 이러다가 둘레에 두레로 나누면서 동무하고 돕듯, 차근차근 풀어내면 된다. 모든 책은 씨앗이다. 좋은씨나 나쁜씨가 아닌 ‘삶씨’에 ‘살림씨’에 ‘마음씨’이다. 나는 책벌레로서 모든 책을 그냥 안 가리면서 차곡차곡 읽어내려고 한다. 다 다른 동무와 이웃이 어떤 삶과 살림을 어떤 마음과 눈길과 손길로 담았는지 느끼려고 한다. 씨앗을 받아서 함께 심고서 같이 돌보고 나란히 거둔다.


ㅍㄹㄴ


“악어의 입장이 돼서 비를 맞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그만!” 《나는 신기한 박물관에 출근한다 10》 92쪽


“그럼 슬슬 갈까요.” 현지 담당자 말에 차에 탄 그녀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여기 있는 일본인 아내 셋은 20대, 30대 때 니카타를 떠난 뒤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254쪽


‘그런 짓을 했다가는 스즈는 정말로 외톨이가 되니까. 아니, 그 녀석이라면 혼자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토모에의 딸에게 인생을 바치는 동안, 스즈는 엄마와 똑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되다니. 난 죽을 때까지 ‘짝사랑 인생’인 건가? 난 이제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행복한 15년이었어.’ 《나의 아빠 7》 187∼188쪽


그런데 도대체 모르겠다. 왜 아이들이 이 단순한 이야ㅣ에 빠져드는지.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 50쪽


“맞아. 호타카가 쌍둥이에게 해주고 싶은 만큼, 쌍둥이도 같은 마음인 게 당연해.” … “희생 같은 거 안 하고 있어. 애들을 구해주고 있는 것도 아니야. 내가 계속하고 싶어. 소중히 하고 싶어.” 《잘 잤니 그리고 잘 자 2》155, 183∼184쪽



《나는 신기한 박물관에 출근한다 10》(사와라 토모/나민형 옮김, 시리얼, 2025.2.25.)

#早良朋 #へんなものみっけ #I Found Something Strange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하야시 노리코/정수윤 옮김, 정은문고, 2020.8.10.)

#朝鮮に渡った日本人妻 #60年の記憶 #林典子

《나의 아빠 7》(니시 케이코/최윤정 옮김, 시리얼, 2025.7.25.)

#西炯子 #たたん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최은경, Denstory, 2017.5.1.)

《잘 잤니 그리고 잘 자 2》(마치타/장혜영 옮김, 대원씨아이, 2016.11.15.)

#おはようとかおやすみとか #まちた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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