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16 꽃을 먹다
책벌레수다 : ‘꽃’ 뜻풀이를 하려고
우리 어머니는 시골에서 나고자라며 오지게 일만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오빠들만 배움터에 보내는 가난한 시골집이었기에 어린배움터(국민학교)만 겨우 다닐 수 있었다지. 푸른배움터며 다른 배움터도 다니고 싶으셨다고 아쉬워하셨다. 나한테 제대로 말씀을 안 하셨으나, 어린배움터도 겨우 다니거나 못 마치셨을 수 있다. 내내 ‘배움앓이(더 못 배우고 만 응어리)’가 크셨는데, 집안일과 논밭일을 맡는 어린순이로 시골에서 살아가는 동안 풀꽃나무랑 새를 익히신 듯하다.
나는 어릴적에 어머니를 ‘풀꽃지기(식물학자)’로 우러르면서 늘 여쭈었다. 어느 날 우리 어머니가 꽃을 따먹는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 꽃도 먹어요? 꽃을 먹어도 돼요?” 하고 여쭈었다. 어머니는 웃으면서 얘기한다. “너도 먹잖아?” “네?” “왜 그거 있잖아. 단물 쪽쪽 빨아먹는 빨간 꽃. 사루비아인가?” “아!” “그리고 네가 즐겨먹는 모든 과일도 다 꽃이었어.” “네? 과일이 꽃이라고요?” “그럼, 쌀도 꽃이야.” “네? 쌀도요?” “학교에서 안 가르치니? 쌀이 될 벼는 벼꽃이 피어야 낟알이 익어.”
어머니와 달리 나는 인천이라는 큰고장에서 나고자란 터라 들일을 몰랐다. 들숲메라는 터전에서 어떤 풀꽃나무가 흐드러지는지 몰랐다. 띄엄띄엄 어머니를 길잡이로 삼아서 배우고 익히다가, 스무 살 무렵부터 제금나서 혼자 낱말지기(사전편찬자)로 일하면서 뒤늦게 조금씩 눈을 떴다. 그리고 스물아홉 살부터 시골에서 지냈다. 스물아홉 살이던 해에 이오덕 님이 이승을 떠났고, 그해 가을부터 얼결에 시골살이를 하며 ‘이오덕 글갈무리(유고정리)’를 맡았다.
지난날 《보리 국어사전》 엮음빛으로 일하던 때에는 으레 변산공동체학교에 일손을 거들러 길게 찾아가며 낫질을 익히기도 했되, 2003년 가을부터 충북 음성에 내도록 머물며 “눈에 보이고 손에 닿는 모든 풀잎과 꽃잎과 줄기와 가지”까지 다 먹어 보면서 천천히 하나씩 몸으로도 익혀 갔다. ‘꽃’을 풀이하려면 꽃을 머금을 노릇이고, ‘잎’을 풀이하려면 잎을 머금을 노릇이다. 동박잎과 후박잎이 다른 줄 알려면, 찔레잎과 꽃찔레(장미)잎이 다른 줄 알려면, 눈과 손과 코뿐 아니라 혀와 뱃속도 써야 할 일이더라.
요새는 고기밥·풀밥(육식·채식)으로 가르고, 풀밥도 ‘온풀밥’을 비롯해서 갖가지 다른 풀밥을 가르곤 한다. 우리가 고기라는 살점을 먹더라도, “사람이 먹는 고깃살이 되는 짐승”은 ‘풀짐승(풀을 먹으며 살아가는 짐승)’이다. ‘고깃살 = 풀내음으로 이룬 살점’인 얼개이다. 사람이 논밭을 일굴 적에 가장 널리 쓰는 거름은 똥오줌인데 “풀밥을 먹으며 살아온 사람과 짐승이 눈 똥오줌”이 푸성귀한테 이바지한다.
들숲메에서는 “목숨을 다하며 몸을 내려놓은 짐승이 남긴 몸”이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여러모로 보면, 푸나무는 짐승이라는 숨결을 받아들여서 푸르고, 사람과 짐승은 푸나무라는 숨결을 맞아들여서 맑다. 어느 밥이 낫거나 나쁘거나 좋거나 얄궂다고 가르기보다는, 온누리 뭇숨결이 어울리는 밑길부터 바라볼 노릇이지 싶다.
밥을 먹어 보지 않고서 ‘밥’이라는 낱말을 풀이할 수 없다. 바다를 바라보거나 바다에 잠기거나 바닷물을 맛보지 않고서, 바다에서 헤엄을 치지 않고서, 바닷속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바다’라는 낱말을 풀이한다면 엇나가기 쉽다. 쑥떡은 사먹은 바 있되, 막상 쑥이 언제부터 어떻게 돋아서 어떤 풀내음으로 번지는지 지켜보지 않는다면, 쑥꽃이 언제 어떻게 피고서 쑥씨가 어떻게 퍼지는지 살피지 않는다면, ‘쑥’을 낱말책에서건 풀꽃책에서건 엉뚱하게 다루고 만다. 어른스러운 어른을 만난 적 없다면, 스스로 어른답게 빛나고 어진 사람으로 서지 않는다면, ‘어른’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못 느끼거나 모르게 마련이라, 낱말풀이뿐 아니라 삶이라는 길도 흔들리거나 기우뚱하다.
모든 말은 모든 마음을 담은 소리요, 모든 마음은 모든 삶을 담는 그릇이다. 이곳에서 저마다 다르면서 새롭게 살아가는 모든 나날과 하루를 마음을 거쳐서 말에 담으니, 겉으로 드러나는 낱말만 쳐다볼 적에는 속빛을 자꾸 놓치겠지. 밥이며 바다이며 꽃이며 쑥이며 낱말풀이를 어질게 하고픈 마음이면서, 밥과 바다와 꽃과 쑥을 어질게 품으면서 살아가고 싶기에 찬찬히 다가서며 풀어내려고 한다.
‘어른’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풀이하고 싶은 마음이란, 스스로 어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려는 뜻이다. ‘사람’이라는 낱말을 자꾸 다시 풀이하고 손보는데, 스스로 사람답게 살림하는 푸른길을 새삼스레 배우면서 가다듬으려는 꿈이다.
바람을 먹으면서 바람이 들려주는 말을 듣는다. 비를 마시면서 비가 알려주는 길을 듣는다. 구름을 지켜보면서 구름하고 속삭인다. 새가 날아앉는 곁에 가만히 서서 눈을 마주보면서 함께 노래한다. 사람과 사람으로서 서로 만나고, 이웃과 이웃으로서 나란히 다가간다. 늘 쓰는 낱말에 놓는 마음을 읽고서, 언제나 들려주고 듣는 말씨에 숲빛이 감도는 길을 헤아린다.
바야흐로 꽃을 먹으면서 스스로 꽃으로 거듭난다. 잎을 갉는 애벌레는 잎빛으로 온몸을 물들이기에 비로소 고치를 틀어서 새빛으로 거듭나는 나비로 나아간다. 나무 한 그루는 풀잎이 받아들인 푸른빛을 머금으면서 꽃송이에 온숨을 그러모아서 씨앗과 열매를 내놓으니, 이러한 잎을 머금는 애벌레는 날개를 단 새몸으로 일어설 만하겠지. 꽃을 먹는 사람은 꽃사람이 되고, 잎을 먹는 사람은 잎사람이 된달까. 파란하늘을 이루는 바람을 먹는 사람은 파란사람인 하늘사람이 된다고 느낀다. 바닷물이 아지랑이로 피어올라서 이룬 구름이 베푸는 빗방울이 땅에 스미고서 솟아나는 샘물이 적시는 들녘에서 냇물 한 모금을 마시는 사람은 바닷사람과 멧사람과 숲사람과 들사람이 될 만하다.
머금는 숨결로 우리 몸과 살과 피와 뼈를 이룬다면, 주고받는 말로 우리 마음과 숨결과 넋을 이루지 싶다. 어느 말에나 사랑을 얹어서 나누기에 사랑을 지피면서 사랑으로 눈뜨는 사람으로 이곳에서 살아간다고 본다.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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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칸 건넛방에는 나와 같은 반인 여자아이가 살았다. 마르고 까맣고 냄새나고 공부도 못해서 아이들에게 바보라고 놀림을 받던 아이였다. 2학년 때였나. 구구단을 먼저 외운 친구들이 미처 못 외운 친구들을 한 명씩 맡아 책임지고 가르쳐 주라는 담임 선생님의 지시가 있었다. 나는 아이들 모두가 싫다고 피하는 그 아이와 자처해서 짝꿍이 됐다. 평소에는 그 아이와 같은 집에 산다는 게 알려지는 것도 싫어 알은척도 안 했는데, 그 순간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사실은 왜 그랬는지 안다. 그건 그냥 한마디로 잘난 척이었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 5쪽
‘그나저나 나츠밍이랑 스나오가 같이 영화를 보러 가는 사이라니, 그것도 단둘이.’ 《나쁜 X에게 행복 있으라 1》 139쪽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해. 내가 분명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해. 거짓말을 한 나 그대로 다시 시작해 보자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나쁜 X에게 행복 있으라 2》 85쪽
대기업에 원가 이하로 공급되고 있는 왜곡된 상업용 전기요금의 합리적인 인상을 통한 전기생산성을 높이도록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 존 번 교수는 서울의 건축물 지붕만 잘 활용해도 태양광으로 서울 전체 에너지의 30% 정도를 충당할 수 있다고 했다. 《탈핵으로 가는 길 Q&A》 166, 168쪽
“오늘은 커피 말고 주스 같은 거 마실까∼” “난 단 거 당기는데 아까 점심 너무 많이 먹어서 좀 그러네∼” 《은근 짜릿해》 49쪽
《참 괜찮은 눈이 온다》(한지혜, 교유서가, 2019.10.21.)
《나쁜 X에게 행복 있으라 1》(키시카와 미즈키/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24.11.25.)
《나쁜 X에게 행복 있으라 2》(키시카와 미즈키/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25.2.25.)
#岸川みずき #クソ女に幸あれ
《탈핵으로 가는 길 Q&A》(김해창, 해성, 2015.7.30.)
《은근 짜릿해》(슷카이, 창비, 2018.9.21.)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