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미운나무
오늘은 미국으로 글월을 부치려고 읍내로 나온다. 책을 부치려다가 우표값이 세려나 싶어서 글종이만 꾸린다. 무게를 달고 보니 얼마 안 비싸다. 다만 배로 갈 테니 한 달은 걸리겠지. ems가 있다고 하니 이다음에는 그 길을 써 볼까 싶다. 나라안에서 주고받는 글월만 오래 쓰다 보니, 나라밖으로 글월을 보내는 길을 까맣게 잊었네.
고흥읍으로 나가는 시골버스를 마을앞에서 기다리자니, 마을할매 두 분이 나무를 미워하는(저주하는) 말을 한참 퍼붓는다. 옆에 서서 한귀로 흘린다. 그저 빙긋빙긋 웃으며 노래 한 꼭지를 새로 쓰고서 책을 읽는다. 아무래도 이 시골 어느 누구도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으면 나무가 무엇이고 풀이 무엇이며 숲이 무엇인지 그저 모를밖에 없다. 바다하고 비하고 샘과 내가 어떻게 얽히는지 마냥 모르겠지. 그런데 땅을 만지는 일을 하는 사람한테 땅빛과 흙빛과 풀빛과 숲빛과 나무빛을 제대로 들려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나라는 얼마나 더 망가지려는 셈일까.
풀죽임물(농약)을 뿌리면 ‘심은 씨앗’을 빼고서 다른 풀을 싹 잡는 듯 여기는데, 개미도 거미도 풀벌레도 개구리도 벌나비도 새도 몽땅 죽인다. 무엇보다도 시골사람 스스로 마시는 물을 망가뜨리고, 시골에 흐르는 바람도 더럽힌다. 죽음켜(비닐)를 땅에 덮으면 얼핏 풀잡이를 하는 듯 여기는데, 죽음켜는 고스란히 쓰레기요, 죽음켜가 해바람비에 닳아서 여기저기 뒹굴면 땅도 흙도 들도 숲도 마을도 더럽힌다. 죽음거름(화학비료)을 논밭에 들이부으면 얼핏 더 많이 거두는 듯 보이지만, 죽음거름을 쓰는 논밭은 해마다 싯누렇게 앓으면서 죽어간다. 죽음거름을 쓰면 그때부터 죽음거름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 거둔다. 박정희 새마을바람이 일으킨 짓은 ‘ㅅㅈ(세죽음 : 풀죽임물·죽음켜·죽음거름)’이다. 이 ‘ㅅㅈ’를 걷어치울 때라야 시골이 살아날 수 있다.
한집에서 아이랑 살아가는 나날이라면, 나무가 얼마나 이바지하는지 알 텐데, 아이가 있더라도 외려 아이한테 ‘미운나무’라고 자꾸 읊으며 길들일 수 있다. 곰곰이 보자. 우리 마을에서 나무를 돌보고 새로 심는 할배가 한 분 있는데,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다들 “나무 심는 할배”를 몹시 싫어하더라. “쓰잘데기없는 짓”을 한다는 뒷말을 숱하게 하더라. ‘나무할배’ 한 분을 깎아내리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아서 마을모임에 발을 끊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서 ‘나무할배’는 이제 등허리가 나가서 엉금엉금 다니시기에 나무를 더는 못 심는다. 언젠가 할배는 “내가 죽고 없어도, 이 마을에 늙은이가 다 죽고 없어도, 나무는 남지 않겠소? 나무가 남으면 나중에 마을도 다시 살지 않겠소? 그러니 나무를 심지. 보쇼, 최 선비. 저그 언덕에 자라는 나무는 내가 다 심었소. 허허, 봄마다 꽃이 발갛게 올라오는데 참 보기 좋지 않소?” 하며 웃으셨다. 아마 나무할배도 마을 다른 모든 할매할배가 이녁한테 “쓰잘데기없는 짓”을 한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을 익히 들었겠지.
나무가 서야 겨울이 포근하다. 나무가 둘러야 여름이 시원하다. 나무를 심고 돌보기에 마을을 비롯해서 이 별이 빛난다. 나무 한 그루 못 자라는 모래벌(사막)에 기름이 퐁퐁 솟기에 떼돈을 버는 나라가 제법 있는데, 돈과 기름만으로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숱한 ‘기름나라(산유국)’는 하나같이 먹을거리를 먼나라에서 사다먹는다. 숱한 기름나라는 기름을 팔아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돈으로 ‘아름살림’이 아닌 ‘겉멋내기’나 ‘싸움질(전쟁무기 개발)’로 치닫더라. 오늘날 우리나라는 잇(반도체)으로 먹고산다고 외치는데, “잇(반도체)을 판 돈으로 먹을거리를 사들이기”에 살아남을 뿐이다.
기름이나 잇을 팔아서 먹을거리를 먼나라에서 사들이면 ‘큰나라·좋은나라’일까? 나무 한 그루를 누구나 마당에 심고서 보살필 수 있어야 비로소 아름나라이지 않을까? 나무 한 그루가 푸르게 서지 않는 서울이나 시골이라면 이미 죽음터이지 않은가? 나무 한 그루가 어떤 숨빛인지 들려주거나 가르치거나 이야기하는 배움터나 마을이나 나라나 집이 아니라면, 이미 우리는 사람빛을 팽개친 셈이지 않은가? ‘밉나무’가 아니라 ‘푸른나무’와 ‘살림나무’인 줄 알아보고 얘기하고 아낄 노릇이다. 나는 어느 책을 손에 쥐든, 너른숲에서 부는 바람을 마신다. 모든 책은 나무요, 모든 책은 숲이며, 모든 책은 파란바람을 머금은 풀 한 포기요, 모든 책은 푸른들을 이루고 푸른숲으로 일렁이는 푸른빛이니까. 2026.4.29.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