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가맛길



  고흥을 떠난 시외버스는 빗길을 가른다. 부산에 닿으니 해가 나다가 소나기에 여우비가 지나간다. 그러려니 여긴다. 여러빛을 베푸는 하늘인걸. 가맛길(산복도로) 한켠에 깃든 마을책집 〈만만 meet_n_make〉으로 마실한다. 인천에서는 오르내리막이 물결치는 골목마을을 으레 ‘언덕·언덕길’이라 했다. 조금 높거나 가파르다 싶으면 ‘고개·고갯길’이라 했다. 부산과 인천은 일찍 나루를 열어야 했기에 일본사람이 우루루 몰려들며 일본말이 춤춘 고장이요, 두 곳에는 오래도록 일본말씨가 걷히지 않았지만, 이제 인천은 웬만한 일본말씨는 자취를 감추고, 부산은 ‘일본말씨를 부산말씨’로 여기면서 못 놓거나 안 놓기도 한다. 이를테면 ‘산복도로’는 부산에서 흔히 보는 골목마을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닌, 그냥 일본말이다. 요즈막에 부산과 마산은 서로 “우리가 ‘산복도로 원조’야!” 하고 내세운다. 일본말을 그냥그냥 안 버린대서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부산’은 ‘가마솥’을 닮은 숲터로 여기니, ‘가마’라는 말씨를 살린 ‘가마 + ㅅ + 길’ 얼거리로 ‘가맛길’ 같은 부산말씨를 오롯이 새로 지을 만하다.


  가맛길을 따라 걷고, 가맛마실을 하고, 가맛집에 깃들고, 가맛가게를 차리고, 가맛하루를 누리고, 가맛잔치를 열고, 가맛노래를 부르고, 가맛걸음을 나누고, 가맛빛을 헤아리고, 가맛꽃과 가맛나무를 아끼고, 가맛새를 만나고, 가맛나루를 이야기하고, 가맛살이를 즐기고, 가맛살림을 배우고, 가맛이웃을 사귀고, 가맛동무랑 어우렁더우렁 웃을 만하다.


  부산 동대신동2가 〈만만 meet_n_make〉은 버스나루하고 나란하다. 책집을 서성이며 책시렁을 돌아보노라면, 어느새 부산시내버스가 슥 멈춘다. 가맛길로 나들이를 온 이웃나라 사람들이 여러 이웃말을 주고받다가 버스를 타고서 떠난다. 느긋이 책을 읽고 장만한다. 등짐을 메고서 이곳에 다다른 등허리를 편다. 잎물을 마시고 이야기가 흐른다. 다시 등짐을 멘다. 이제 190 부산버스를 탄다. 얼추 열 몇 해 앞서 타본 버스로구나. 새삼스레 굽이굽이 도는 가맛길을 돌아보다가 책을 읽는다. 《망고와 수류탄》은 류우큐우 사람들 발자취를 짚는다. 버스에서도 읽고 쓰다가 내린다. 구름은 차츰 걷힌다. 곧 해가 눈부시다. 환하고 따뜻한 늦봄하루이다. 2026.5.12.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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