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156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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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8.4.

노래책시렁 507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장혜령

 문학동네

 2021.7.1.



  줄줄이 자리(계급)를 만들면, 첫째부터 둘째도 셋째도 막째도 모두 괴로울 뿐일 테지요. 나란히 누리는 자리를 마련하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막째도 없이 누구나 어울리며 즐겁습니다. 줄세우는 자리는 이른바 벼슬로 치닫고, 벼슬자리를 거머쥐려고 서로 다투고 치고받는 사이에 미움씨앗이 번지고 불길이 퍼져서 활활 몽땅 태웁니다. 어깨동무를 하는 나란한 자리에서는 서로 보금자리를 일구고, 일자리와 놀자리와 쉼자리를 느긋이 펴면서 바야흐로 숲이 깨어납니다.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를 곰곰이 읽었습니다. 워낙에 ‘벼슬’이나 ‘돈’은 처음부터 없던 부스러기인데, 이제는 벼슬도 돈도 종이(자격증·졸업장)도 마치 “없어서는 안 될 끈”으로 여기기 일쑤인 나날입니다. 글밭에서도 벼슬과 돈과 종이는 대수롭게 여긴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나라도 따분하고 글밭도 따분할 뿐 아니라, ‘노래하는’ 사람은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문학하는’ 몸짓과 ‘예술하는’ 손끝이 춤출 뿐입니다. 우리는 허울을 내려놓거나 벗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날개돋이를 할 수 있는가요? 벌레나 새만 껍데기를 벗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껍데기를 벗고서 맨몸으로 해바람비를 사랑으로 맞이할 적에 저절로 온노래가 깨어납니다.


ㅍㄹㄴ


내가 스물셋이었을 때, 남자는 서른둘이었다. 발을 심하게 다쳐 더이상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느꼈을 때, 그 사람을 만났다. (눈의 손등/12쪽)


검은 돌은 고요가 침묵과 다르다는 것을 비에게서 배웠다. 비는 부딪히면서 빛났고 부서지면서 끝없이 말하고 있었다. 비는 냇물이 되어 흘렀고, 흐르는 냇물은 거침이 없었고, 막힘이 없었으며, 자면서도 흘렀고, 흐르면서도 꿈꾸고 있었다. (검은 돌은 걷는다/23쪽)


사랑하는 곡예사 여인의 육체에서는 / 오직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 바람, 빛, 닿지 못할 먼바다 (어두운 숲의 서커스/90쪽)


사랑하지 않지. 텔레비전을 켜둔 모텔 방 / 침대 위에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당신은 / 내 허벅지에 다른 손을 뻗거나 / 목을 조르며 / 뒤를 파고들 뿐이지 (고해呱咳/93쪽)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장혜령, 문학동네, 2021)


그녀는 겹겹의 문(門)에 대해, 입구를 열면 다시 새로운 입구가 열리는 꽃의 내부에 대해 말했다

→ 그이는 겹겹길을, 길을 열면 다시 새길이 열리는 꽃속을 말했다

17쪽


그것은 기다린다. 공백. 포획하기 위해 기다린다

→ 기다린다. 빈. 붙잡으려고 기다린다

→ 기다린다. 가만. 잡으려고 기다린다

18쪽


누군가 오긴 올 거야

→ 누가 오긴 와

→ 누가 오긴 오지

21쪽


오래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이 쓰인 날로부터 내가 읽는 날까지

→ 오래된 책을 읽으면 책이 쓰인 날부터 내가 읽는 날까지

29쪽


저녁의 빛은 숲 그늘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 저녁빛은 숲그늘에 다른 곳으로 잇는 길을 낸다

→ 저녁에 빛은 숲그늘에 다른 데로 길을 잇는다

38쪽


크고 붉은 동백의 곁이었다. 잎사귀 아래 둥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 크고 붉은 동박 곁이다. 잎사귀 밑에 둥근 물방울이 맺힌다

43쪽


딸의 손은 / 없는 새의 등을 쓰다듬고

→ 딸은 / 없는 새등을 쓰다듬고

→ 딸은 / 없는 새를 쓰다듬고

50쪽


나의 비명에는 소리가 없었다

→ 나는 소리없이 외쳤다

→ 나는 말없이 외쳤다

65쪽


어둠 속이었다. 나는 이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나와 함께 숨쉬고 있다는 거북함 때문에 불을 켜려고

→ 어둡다. 어둔 이곳에서 뭐가 함께 숨쉬기에 거북해서 불을 켜려고

→ 어둡다. 어둔 곳에서 함께 숨쉬는 누가 거북해서 불을 켜려고

11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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