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6.19.
숨은책 1064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
정운현 글
한울
1995.10.2.첫/1996.1.10.재판
처음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를 만나던 1995년 가을을 떠올립니다. 갈수록 싸움터(군대)가 나아진다고 하지만, 지난 2024년 5월 23일에 ‘여중대장 가혹행위 훈련병 살인(제12보병사단 훈련병 사망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이 나라가 차츰 어깨동무에 가깝게 가더라도 ‘부산 돌려차기남 사건’처럼, ‘묻지 마’ 주먹질에다가 ‘일부러’ 주먹질이 판칩니다. 저는 1995년 11월 6일에 싸움터에 들어가는 날을 앞두고서 하루하루 ‘끝말(유언)’을 적었습니다. 1995년은 길에서도 주먹떼(깡패·조폭)가 버젓이 날뛰었고, 배움터에서는 ‘사랑매’ 아닌 그냥 주먹질이 흔했습니다. 저는 싸움터에서 ‘상병 5호봉’까지 날마다 얻어맞아야 했고, 이 바보짓을 동생들이 안 물려받기를 바랐기에 ‘상병 6호봉’부터 혼자만 주먹질을 안 했습니다. 또래(입영동기)는 저더러 “야, 너 혼자 신선이야? 너 혼자 하느님이야? 네가 얘들을 안 때리니까 우리만 나쁜놈 같잖아? 여태까지 맞은 게 얼마인데, 넌 분통도 안 터져? 제발 너도 좀 같이 때려!” 하고 외쳤지만, 귓등으로 흘렸습니다. 중대장만 순이가 맡는대서 싸움터가 안 바뀝니다. 아예 싸움터를 없애야 하는데, 정 못 없애겠다면, 아이를 낳아서 돌본 아주머니가 중대장·연대장·사단장·국방부장관을 맡을 노릇입니다. ‘아이 아줌마’는 슬기로나 힘으로나 마음으로나 으뜸인걸요.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는 줄거리가 훌륭합니다. ‘일제유산’이라는 이름을 이 책이 비로소 이 나라에 퍼뜨렸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글님은 ‘큰것’만 보려고 했습니다. ‘작은것’, 이른바 수수한 사람이 살아간 곳에 깃든 ‘작은 일제유산’은 아예 안 쳐다보았다고 할 만합니다. 일본말씨하고 일본한자말도 ‘일제유산’일까요? ‘국민학교’는 이름을 바꿔도 모든 벼슬꾼(정치인)은 늘 ‘국민’을 섬기겠다고 외칩니다. ‘국민’이란 뭔가요? “일본우두머리를 섬기는 나라를 이루는 사람”이 ‘국민’이요, “일본우두머리를 안 섬기는 몹쓸 부스러기”를 ‘비국민’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벼슬을 쥔 무리’를 섬겨야만 ‘국민’인 셈이고, 벼슬무리를 안 섬기면서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는 수수한 사람은 몽땅 ‘비국민’으로 여기는 끔찍한 일제유산이 아직도 온나라에 서슬퍼렇게 흐르는 판입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