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까칠한 숲노래 씨 책읽기
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5.4.30.
《불태워라》
릴리 댄시거 엮음/송섬별 옮김, 돌베개, 2020.10.19.
인천 주안나루 곁 길손집에서 아침을 연다. 책짐을 이고 지면서 연수동으로 간다. 전철을 갈아타며 손으로 글을 쓰다가 내릴 곳을 지나친다. 부랴사랴 내려서 건너간다. 숨을 고른다. 밖으로 나오니 온통 네모반듯한 잿마을이다. 이 잿마을이 보기싫어서 1995년 4월 5일에 인천을 떠났다. 이때부터 땅밑집과 하늘집과 골목집에서만 살았고, 2011년에는 아주 시골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서른 해 만에 걷는 예전 잿길은 똑같이 휑뎅그렁하되, 그새 나무가 꽤 자라서 크고작은 새가 노래한다. 새노래를 들으며 땀을 훔친다. 〈열다책방〉에 들러서 책을 읽는다. 늘어난 책짐을 즐거이 이고 진 채 시내버스를 탄다. 낯익은 ‘송도놀이터(유원지)’하고 바닷가 옆을 달린다. 어릴적 보던 모습하고 그대로이되, 바닷가에 무섭게 있던 가시울타리는 사라졌네. 〈나비날다〉에서 책을 더 읽는다. 저녁에 〈아벨서점 시다락방〉에서 말밑수다(어원강의)를 펴고는 일찌감치 곯아떨어진다. 《불태워라》를 읽었다. 첫머리는 ‘사내놈’한테 불길(분노)을 퍼붓는 글이라면, 1/6부터는 ‘왜 사내녀석은 삶과 살림과 사랑을 안 배우려 하지?’ 하고 궁금한 마음에 새길을 찾는 글이 흐르고, 이윽고 ‘사내를 바보로만 여기고 미워하고 불태우면 같이 죽는 수렁’인 줄 알아차리는 글로 맺는다.
다만, 숱한 사내가 바보라는 대목은 맞다. 틀림없는 말이다. 그래서 ‘바보돌이’를 미워하거나 불태우기만 하면, 바보돌이는 총칼을 들고서 싸우려 한다. 이와 달리 ‘바보돌이’를 토닥이면서 살림길을 가르치고 삶길을 알려주고 사랑길을 보여주면, 어느새 ‘사람돌이’로 거듭난다. 사내라는 몸은 애벌레와 같다. 사내는 애벌레처럼 입과 똥구멍만 있는 몸으로 잎갉이만 하는 얼거리이다. 사내는 고치를 틀어서 날개돋이를 하기 앞서까지는 ‘아직 바보’이기에, 사내 스스로도 받아들이면서 가다듬을 길이요, 가시내는 곁과 둘레에서 차분히 기다리며 지켜볼 일이기도 하다.
왜 사람은 번거롭게 ‘가시내·사내’라는 두 가지 몸으로 태어나겠는가? 이미 깨달은 몸으로 태어나서 아기를 밸 줄 아는 가시내는 ‘어진순이’이다. 어진순이는 어질게 가르칠 몫을 타고난다. 갖은 일살림을 도맡는 나날을 한참 보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사내는 ‘바보돌이’인 터라, 끝없이 듣고 배우고 고치고 손보면서 드디어 눈을 뜬다.
집안일은 마땅히 둘이 함께해야지. 한 사람이 아프거나 앓으면 반드시 다른 한 사람이 도맡을 일이지 않은가? 사내는 ‘일하려고’ 태어난다. 가시내는 ‘일을 가르치고 물려주려고’ 태어난다. 총칼을 쥐거나 돈만 벌려고 하는 사내는 끝까지 안 배우려고 하면서 얼뜬 몸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가시내도 총칼을 쥐거나 돈만 벌려고 하면 그만 사내하고 똑같이 수렁에 잠긴다.
아무리 가시내가 아기를 밸 줄 아는 몸이라 하더라도, 가시내 혼자 아기를 못 낳는다. 가시내하고 사내는 ‘하나를 이룰 두 가지 다른 아기씨’를 저마다 하나씩 몸에 품는다. 서로 돕고 북돋우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천천히 스스로 사랑을 익히라는 뜻으로 두 갈래 몸으로 태어난다. 어느 쪽이 좋거나 나쁘지 않다. 그냥 다른 몸이다. 다르기에 다른 줄 받아들이고 바라보면서 바다처럼 아늑하고 바람처럼 맑게 서로 아끼고 돌보는 눈빛을 가꾸면, 바야흐로 새길을 일구면서 둘 다 ‘사람’으로 거듭나는 사랑을 씨앗(아기)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러니 불태우려고 하지 말자. 불태우기가 아닌 북돋우기를 하면 된다. 불질이 아닌 붓질(글쓰기)을 하면 된다. 불수렁이 아닌 풀꽃나무로 숲을 이루는 보금자리를 지으면 너나없이 아름답게 푸른별이 깨어날 만하다. 우리는 서로 뜻과 눈과 손과 마음을 모아서 푸르고 파란 이 조그마한 별을 ‘사랑별’로 틔울 몫을 맡으려고 이곳에서 하루를 누린다고 느낀다.
#BurnItDown #WomenWritingaboutAnger #LillyDancyger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