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어원사전”을 써냈습니다

[책이 나왔습니다] ‘말·마음·삶’을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으로




2025년 이른봄에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철수와영희 펴냄)을 선보입니다. ‘말밑’은 ‘어원’을 가리키는 우리말입니다. ‘밑말’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말을 이루는 밑(밑동)이기에 말밑입니다. 밑(밑동)을 이루는 말이라 여기면 ‘밑말’이라 하면 됩니다. 우리말은 어느 하나를 굳이 한 낱말로만 안 가리킵니다. 앞뒤를 바꾸어 가리키곤 하며, 크기와 셈여림과 부피와 빛살을 살펴서 끝없이 비슷하면서 다른 낱말로 여밉니다. 우리말에는 ‘빨갛다’만 있지 않아요. ‘빨강’도 있고 ‘붉다’도 있으며, ‘울긋불긋’에 ‘발갛다’처럼 말씨를 슬몃슬몃 바꿉니다.


글을 씨앗(씨)으로 여기면서 돌보기에 ‘글씨’입니다. 글씨를 반듯하게 가다듬는 뜻을 돌아봅니다. 글이라는 씨앗을 종이에 얹을 적에 “밭에 씨앗을 심듯” 고르게 다스려야, ‘글로 담아낸 말’을 정갈하게 풀어낼 수 있다고 여기거든요. (44쪽)


‘꽃 + 샘 + 바람’에서 ‘샘’은 ‘새·새롭다’하고 맞물리는 ‘샘물·샘 2’이라고 느낍니다. 꽃망울하고 잎망울을 깨우는 바람 곁에는 ‘꽃샘비·잎샘비’가 내립니다. 꽃이 샘솟으라고 북돋우는 비입니다. (50쪽)


지난날 세종 임금님이 ‘훈민정음’이라는 글씨를 내놓았지만, 그무렵에 훈민정음은 “우리 모두 누리는 글”이지 않았습니다. 그무렵에 누가 붓종이를 건사했을까요? 그무렵에 누가 책을 읽고 글을 썼을까요? 논밭을 일구는 사람은 글을 쓰거나 책을 펼 일이며 까닭마저 없던 지난날입니다. 조선이 저물 무렵까지도 장사꾼·논밭지기·종·하님·가시내는 글이건 책이건 붓종이 모두 어깨너머라도 구경조차 하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데, 모든 사람이 마음을 말에 담아서 누리고 나누던 첫목이라면,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은 주시경 님이 살던 즈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주시경 님은 이녁 딸아이한테도 글을 가르쳤고, 주시경 집안에서는 딸아들이 똑같은 아이로 자랐다지요. 그러니까 ‘우리글’이라 여기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얻던 사슬나라(일제강점기)에 이르도록 우리는 우리글이 없었다고 해야 맞습니다.


새롭게 보도록 이곳에 있기에 ‘나다’이고, 새롭게 보도록 이곳에 있으면서 즐겁기에 ‘날다’라면, “오랫동안 많이 쓰거나 오래도록 비·바람·해에 바스러져서 더 쓸 만하지 않”을 적에는 ‘낡다’예요. (56쪽)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을 왜 썼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우리말을 우리글에 담는 우리길을 걷는 살림살이를 일굴 적에 곁에 두면서 이바지하는 꾸러미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말을 그려낸 무늬입니다. 말이란, 마음을 담아낸 소리입니다. 마음이란, 삶을 고스란히 담는 그릇입니다. 삶이란, 사람으로서 사랑으로 짓는 살림을 누리는 하루입니다.


모가 없이 아우르고 모이기에 ‘도란도란’ 이야기합니다. ‘두런두런’ 말을 섞기도 합니다. ‘도란도란·두런두런’은 ‘두레’하고도 얽혀요. 두레는 ‘둘레’하고도 만나는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나고 사귀고 아우르면서 크게 펴는 자리인 ‘두레’요, 하나를 두른·둘러싼 곳을 살핀다고 하는 ‘둘레’이며, 두레처럼 둘레를 아우르는 사이인 ‘동무’입니다. (68쪽)


그래서 ‘글 → 말 → 마음 → 삶 → 살림·사랑·사람’이라는 얼거리입니다. 글쓰기를 할 적에는 ‘살림쓰기·사랑쓰기·사람쓰기’를 한다고 여길 만합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을 스스로 글이라는 그림으로 옮길 적에, 바로 “우리 스스로 살림을 지어서 삶을 누리는 마음”을 저마다 또렷하면서 즐겁고 넉넉하게 펴려면, ‘말’을 제대로 알거나 넉넉히 익힐 노릇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인 우리말을 알려면 무엇보다도 ‘말밑·밑말’을 찬찬히 새기면 됩니다.


‘우리말’이란, “우리를 바라보는 말”입니다. ‘우리 = 나 + 너 + 뭇숨결’입니다. 나 혼자만 있다고 언뜻 여길 적에도 ‘우리’를 쓰는 우리나라인데, 사람은 나 혼자여도, 돌과 나무와 해와 바람과 새와 풀벌레처럼 뭇숨결이 둘레에 있다고 여기기에 ‘우리’를 씁니다. ‘우리말’이란 ‘순우리말(토박이말)’이라기보다는 “아우르고 어우르는 마음으로 쓰는 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우리말 ‘길·길이·길다’는 이곳·이때하고 저곳·저때가 어떤 사이인가를 나타냅니다. 이곳·이때에서 저곳·저때으로 나아가기에 ‘길’이고, 어느 만큼 나아가는가를 따지거나 재기에 ‘길이’입니다. 이곳·이때에서 저곳·저때으로 꽤 나아갔기에 ‘길다’라 합니다. (78쪽)


우리말 ‘바’는 ‘밭·바탕’을 밑뜻으로 나타냅니다. 씨앗을 심어서 가꾸는 자리인 ‘밭’이요, 무엇이 태어나거나 깨어나거나 자라는 너른 터인 ‘바탕’입니다. 가장 낮다고 여길 만하도록 넓기에 ‘바탕’이니, ‘바다’는 푸른별에서 ‘바닥’을 드넓게 덮으면서 이곳이 짙푸른 삶터가 되도록 북돋운다고 하겠습니다. (105쪽)





지난 2016년에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을 선보였습니다. 이 꾸러미를 선보이고 난 지 열 해 만에 《말밑 꾸러미》를 내놓습니다. 꽤 오래 걸렸습니다. 저는 혼자서 온일을 맡는 터라 낱말책을 더 일찍 묶어낼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살림을 가꾸며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기에, 이런 여러 가지를 하는 틈에 바지런히 손을 놀릴 뿐입니다.


2003년 8월까지는 서울에서 살며 일을 했으나, 2003년 9월부터는 이오덕 님이 돌아가신 충북 충주 멧골자락과 서울을 오가며 일을 했습니다. 2007년 4월에 인천으로 돌아가서 일을 하다가, 2010년 가을부터 다시 시골로 옮겼으니, 전남 고흥이라는 시골살림을 지은 지 제법 됩니다.


많은 결을 나타내는 말밑인 ‘수’입니다. ‘머리숱’을 가리킬 적에 쓰는 ‘숱’으로도 잇습니다. 머리숱이 적건 많건,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세기란 어렵거나 까다롭습니다. 아니, 못 센다고 할 만해요. ‘숱 + 하다(많다)’ 꼴인 ‘숱하다’는 “마치 머리카락처럼 셀 길이 없도록 많은” 결을 가리켜요. (125쪽)


서울과 서울곁에서 일할 적에는 ‘글·책·말’을 바탕으로 낱말책을 여미었고, 시골과 멧슾에서 일하는 요즈음은 ‘들숲바다·해바람비·풀꽃나무·시골·사투리·글·책·말’을 바탕으로 낱말책을 엮습니다.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써낸 뜻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들숲바다에서 해바람비와 풀꽃나무를 품는 살림살이를 일구는 수수한 시골사람이 스스로 지었습니다.


세종 임금님은 글씨를 지었되, 우리말을 짓지는 않았고, 이 나라 모든 사람이 살림살이를 말글로 옮겨서 널리 나누는 길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없던 무렵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들 ‘말(우리말)’을 했고, 이 말(고을말·사투리)은 단군조선보다 아득히 긴 나날에 걸쳐서 흘러왔습니다.


단군 옛이야기에 나오는 ‘곰·범’이나 ‘쑥·마늘(또는 달래)’ 같은 낱말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요? 김치를 담그는 ‘갓’ 같은 풀이름은 언제부터 썼고, 높게 솟은 땅을 가리키는 ‘메·갓’이란 말은 언제부터 썼을까요? ‘하늘’이나 ‘집’이나 ‘사람’이라는 말은 언제 어떻게 태어났을까요?


‘일구다’라는 낱말은 ‘일’이 뼈대요, ‘일다·일으키다·일어나다’도 ‘일’이 바탕입니다. 새롭게 펴거나 하는 몸짓을 나타내는 이 말씨는 외따로 ‘일’로 쓸 적에 ‘할거리·지을거리’를 가리켜요. “일하다 = 스스로 새롭게 짓거나 이루거나 나타나도록 하다” 같은 결이라고 읽어낼 만합니다. ‘이름·일컫다·이르다’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177쪽)


삶·살림·사랑을 지으려면 ‘하다’라는 낱말을 써야 합니다. 삶·살림·사랑을 누리려면 ‘있다’라는 낱말을 써야 합니다. 삶·살림·사랑을 배우려면 ‘보다’라는 낱말을 써야 하고, 삶·살림·사랑을 나답게 펴려면 ‘알다’라는 낱말을 써야 합니다. 삶·살림·사랑을 스스로 생각하려면 ‘가다’라는 낱말을 써야 하지요. (186쪽)


아직 우리는 이런 수수하고 오랜 삶말·살림말·사랑말이 어떤 뿌리인지 종잡지 못 하기 일쑤입니다. 글도 책도 없던 까마득히 오랜 나날에 걸쳐서, 모든 사람이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은 말씨와 말결과 말빛을 헤아리려면, 서울이 아닌 시골에서 들숲바다와 해바람비와 풀꽃나무를 스스로 품으면서 살필 노릇입니다.


동박새를 곁에 두지 않는다면, 동박새가 왜 동박새란 이름이었을는지 어림조차 못 합니다. 동박새가 겨우내 즐기는 꽃이 피는 나무가 ‘동박나무’여야 올바르다고 느끼려면, 동박새에 ‘동백나무’를 언제나 품는 살림일 노릇입니다.


‘철새’란 철을 읽고 익히면서 새끼를 낳아서 어질게 돌본 뒤에, 새로 바뀌는 철에 예전 보금자리로 함께 돌아가는 야무지고 씩씩한 새입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을 비롯한 숱한 낱말책은 ‘철새’ 뜻풀이가 매우 엉성합니다. 책상맡에 앉아서 옛글을 뒤적일 줄은 알되, 막상 여름새도 겨울새도 만날 일이 없고, 새노래와 새살림을 지켜볼 일마저 없거든요.


속으로는 빛나지 않고 겉으로만 번쩍거리려고 하기에 ‘거짓’이라고 합니다. 돈을 모두 잃은 사람을 ‘거지’라고도 하지만, 돈이 하나조차 없지만 마음이 넉넉한 사람한테는 ‘거지’라고 하지 않아요. 마음이 가난하면서 돈만 많은 사람한테 오히려 ‘거지’라는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236쪽)


‘텃새’란 터(터전)를 읽고 익히면서 새끼를 낳아서 어질게 돌보는 살림을 늘 한곳에서 잇는 듬직하고 어엿한 새입니다. 그러나 ‘텃새’가 어떤 결로 사람 곁에 머무는지 지켜본 적이 없거나 지켜볼 마음조차 없다면, 이러한 새를 다루는 뜻풀이와 보기글도 텃새살이하고는 동떨어집니다.


아기를 낳아 돌보는 집살림을 맡지 않는 삶일 적에는 ‘아기’와 ‘어버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다루지 못 하기도 하지만, 말밑을 어림조차 못 합니다. 서로 ‘동무’를 하는 사이로 돕고 돌보는 두레를 이루는 삶을 가꾸지 않을 적에도 ‘동무’라는 오랜 낱말에 숨은 수수께끼를 못 읽습니다.





모든 낱말은 서로 얽고 잇고 엮고 이르고 만납니다. 따로 뚝 하나만 덩그러니 떨어지는 낱말은 아예 없습니다. 이웃 여러 나라에서는 낱말책을 꾸리거나 여밀 적에 반드시 ‘모든 낱말’이 어떻게 만나고 맺고 어울리는지 차근차근 짚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러한 밑길을 제대로 못 열거나 안 엽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모든 것을 서울에 몰아놓다 보니, 말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서울에서 맴돌거나 큰고장 대학교 담벼락에 또아리를 틀기만 합니다.


좋은말이나 나쁜말은 따로 없습니다. 어느 말을 어느 마음이 되어 쓰느냐에 따라, 다 다르게 드러나는 삶을 낱말 하나에 얹어서 나타내고 나눌 뿐입니다. (262쪽)


사람은 속으로 ‘씨·알’을 품는 숨이요, ‘살다·삶·살리다·살림’으로 펴는 길입니다. 길이 숨을 만나고, 숨이 길을 마주하지요. 그래서 살고 살리는 씨이자 알로 있기에, ‘앎(알다)’을 맞아들이는 하루(삶)이고,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스스로 밝은 빛으로 섭니다. 사람 하나하나는 ‘빛알’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270쪽)


말을 알려면 말이 태어난 숲에서 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또는 숲을 곁에 두면서 내내 숲을 헤아려야 할 테지요. ‘아이돌봄글(육아일기)’을 쓰려면 아이를 한결같이 삼백예순닷새 내내 지켜보고 돌아보아야 하는데, 어쩐지 우리나라에서는 낱말책을 여미는 분들이 정작 “말이 태어난 곳”하고 너무 멀 뿐 아니라, “말이 태어난 살림”하고 담을 쌓는다고 느낍니다.


《말밑 꾸러미》를 ‘기존 사전 형식’으로도 엮을 수 있지만, 굳이 이렇게 안 했습니다. 어린이부터 스스럼없이 읽으면서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말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라기에 새틀을 짰습니다. 우리는 “정확한 표현”과 “문해력 증진”이 아닌, “살아가는 마음을 나누는 말을 서로서로 즐겁게 펴고 듣고 노래하는 하루”를 누릴 적에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봅니다.


‘말’이란, 마음에 담는 생각이고, 마음에 담으려고 심을 씨앗이 될 생각입니다. 또는, 마음에 깃든 생각을 꺼내어서 귀로 알아듣도록 그린 소리가 말이에요. ‘마음·말’은 밑뿌리가 같아요. 그래서 마음을 제대로 담아서 소리를 그려내는 말이 된다면, 마음이 안 맞거나 막히는 일이 없어요. 마음 없이 내는 소리는 그저 소리요, 마음 있이 내는 소리여야 비로소 말이랍니다. (350쪽)


스스로 어질게 살림하는 사람이기에 ‘어른’이요 ‘스승’입니다. 어른과 스승은 아이한테 심부름을 안 시킵니다. 어른과 스승은 그저 몸소 합니다. 어른과 스승은 아이와 젊은이가 스스로 온누리를 맞이하고 겪어 보도록 마당을 펴고 자리를 내주는 몫입니다.


말을 말답게 살펴서 익히는 길은 누구나 스스로 스승이자 어른으로 서는 길입니다. 낱말책 한 자락을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읽어냈기에 우리말을 다 알아내거나 알아볼 수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어느 낱말책이건 모든 우리말 이야기와 수수께끼를 담지는 않습니다. 모든 낱말과 이야기와 수수께끼를 담자면 5만 쪽은커녕 10만 쪽으로도 모자랍니다. 그저 낱말책이란, 그때그때 갈무리한 만큼 이웃하고 나누려는 작은 꾸러미일 뿐입니다.


다쳐서 구멍이 나거나 틈이 난 데에 넣어서 막는 ‘심’이기도 해요. 이런 쓰임새를 살려서, 초에서 불이 붙도록 안쪽 한가운데에 꼬아서 넣는 실도 ‘심’이란 이름으로 가리키지요. 글붓(연필) 안쪽 한가운데에 놓아 글씨를 쓸 수 있는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것도 ‘심’으로 가리킵니다. 우리말 ‘심’은 ‘힘’처럼, 겉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듯 부드럽고 단단하게 한가운데(한복판)를 이루면서 곧고 길게 이어주는 길을 나타냅니다. 촛불심도 연필심도 ‘힘·실’이라는 결을 ‘심’이라는 말꼴로 담아요. (399쪽)





낱말책을 스스로 새롭게 쓰고 엮는 배움길은 1984년에 처음 걸었습니다. 낱말책을 스스로 새롭게 쓰고 엮자는 마음은 1992년에 처음 했습니다. 1994년에 ‘우리말을 스스로 배우고 나누는 모임’을 조촐히 꾸리면서 한 땀씩 바느질을 해온 살림결 가운데 하나를 2025년에 살짝 풀어놓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말더듬이·혀짤배기’이던 몸이라 오지게 놀림받고 시달렸습니다. 여덟 살이던 1982년부터 열 살이던 1984년까지 날마다 얻어맞지 않은 날이 없고, 언제나 동무와 길잡이(교사)가 제 말소리를 놀려먹었습니다. 이러던 1984년에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이 “어째 마을 어린이와 푸름이가 모두 버릇없어 보이기에 ‘효’를 익히도록 천자문을 가르쳐 주겠다!”면서 온마을 어린이와 푸름이를 어르신집(경로당)에 날마다 불러모아서 한 시간 남짓 가르친 적이 있어요. 이때에 저랑 또래 하나만 할아버지한테서 끝까지 즈믄글씨(천자문)를 익혔는데, 즈믄글씨를 익힌 뒤에 돌아보니, 말더듬이에 혀짤배기가 소리를 못 내거나 엉키는 낱말이 모조리 한자말인 줄 깨달았습니다.


꽃은 열매로 나아가는 끝길입니다. 꽃송이가 숨을 거두는 끝에 열매가 익어요. “꽃이 곱다”고 말하는 밑자락을 들여다본다면, 기나긴 길을 거치면서 끝자락에 닿는 동안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고 애를 쓰며 힘을 다했나 하는 빛을 느낄 만하다는 뜻이로구나 싶습니다. (438쪽)


‘나비(나방)·알·애벌레’라고 하는 세 갈래 길입니다. 사람도 ‘어버이(어른)·알(씨알)·아이(아기)’라는 세 갈래 길을 나란히 걷습니다. 두 어버이는 서로 나무처럼 든든히 지키고 바라보면서 나란히 삶·살림·사랑을 그리는 사이입니다. 두 어버이가 즐거운 사이인 터라 ‘새(사이)’처럼 아이(아기) 사이에서 함께 손을 잡고 눈을 마주보면서 노래를 하고 놀이를 노느는(나누는) 나날을 지을 수 있습니다. (476쪽)


저는 이해 1984년부터 옥편과 사전을 샅샅이 뒤져서 “말더듬이와 혀짤배기가 소리내기 쉬운 우리말”을 찾아나섰습니다. 얻어맞기 싫고, 놀림받으면 괴롭거든요. 이러다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91년부터는 첫 수능·본고사·면접을 치르는 배움불굿(입시지옥)에 맞추어 “언어영역 시험 대비”로 ‘국어사전 통째읽기’를 두 벌 했습니다. 1992년에 두 벌째 다 읽었는데, 우리나라 국어사전이 아주 후줄근하고 초라하더군요. 차라리 내가 쓰고 말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아침에 ‘다만·단둘·단짝·달갑다·달다·단골’이라는 낱말이 어떤 말밑인지 풀어냈습니다. 그야말로 날마다 동박새 날갯짓마냥 천천히 보드랍게 나아갑니다. 〈말밑 꾸러미〉를 곁에 두면서 말빛을 익히는 이웃님이 그저 느긋하시기를 바랍니다. “안 서두르려는 마음”일 적에도 똑같이 ‘서두르’고 맙니다. “안 서두르기”가 아니라 “느긋이 노래하기”라는 마음일 적에 비로소 말씨앗 한 톨이 우리 마음밭에 깃들어 자라다가 어느 날 생각나무로 자라고 사랑꽃을 피워서 살림열매를 맺습니다.


울타리가 없고 담이 없으면서 넘나드는 데라서 ‘누리’입니다. 누구나 눈을 뜨고서 누리는 삶이기에 ‘누리’라고 할 만합니다. 이러한 누리에서 조금조금 금을 긋고서 나누는 동안 ‘나라’가 됩니다. 나라에는 울타리가 있고 담이 있어요. 섣불리 넘나들지 못하도록 해요. ‘누리’나 ‘나라’나 똑같은 땅이되, 한쪽은 울타리 없이 흐드러지는 홀가분한 빛이요, 다른 한쪽은 울타리를 세우면서 너랑 나를 가르고 힘으로 누르는, 억누르고 짓누르는 틀입니다. (485쪽)


나무 한 그루가 열매를 맺기까지 으레 열 해 남짓 걸립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열매를 넉넉히 베풀기까지 으레 스무 해 남짓 기다립니다. 우리말을 마음자리에 푸른숲으로 심고 가꾸고 돌보면서 파란하늘처럼 드리우는 말살림이며 글살림을 차분히 하나씩 일구어 가려는 뜻을 조촐히 꾸러미로 엮습니다.


참새가 노래합니다. 짹짹짹 소리가 아니라, 찌빗찌빗 찟찟 쫏 쫑 쭈루루 짯짯 쫌 쪼비비 째비비 째리리리 쮯 쭈룹 같은 갖가지 가락과 높고낮은 물결로 하루를 엽니다. ‘말’에 ‘마음’을 담는 ‘삶’에 한손을 거들려는 뜻으로 꾸리는 낱말책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쓰는 한국말사전”입니다. “새롭게 쓰는 우리말꽃”이기도 하고, “새롭게 나누는 낱말숲”이기도 합니다.





늦겨울이 저물던 지난 2025년 2월 18일 아침을 떠올립니다. 그날 우리 집 앵두나무 곁에서 해바라기를 하는데, 시든풀이 우거진 곳에서 동박새 둘이 고개를 빼꼼하면서 저를 쳐다보더니 쪼리쪼리쪼리쪼리 쯔릉쯔릉쯔릉쯔릉 소리를 내며 서로 쳐다보다가 포르릉 날갯짓 소리를 내면서 제 발치에서 멀잖은 곳에서 조금 날다가 다시 시든풀더미에 내려앉습니다.


목숨이 있는 집이 ‘몸’입니다. 우리말에서 받침 ‘ㅁ’은 ‘아우름·집·묶음’을 나타냅니다. 목숨이 집처럼 깃들 수 있는 곳이고, 여러모로 목숨을 움직이는 것을 아우른 곳이 몸이에요. (528쪽)


빨강은 ‘붉다’로도 나타냅니다. ‘붉다’는 ‘불’에서 비롯했습니다. 타오르거나 달아오르는 불길인 빛이에요. 불길은 확 번지고 이내 태웁니다. ‘빠르게’ 타오르거나 태우는 불기운을 담는 ‘빨강’이에요. (558쪽)


동박새를 눈여겨보는 서울내기도 제법 있으나, 여든 살이나 아흔 살에 이르도록 동박새는커녕 박새나 쇠박새는 아예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혀끝에 ‘동박새·박새·쇠박새’라는 낱말을 얹을 일마저 없는 분이 대단히 많습니다. 동박새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나무에 이 새가 앉았어도 새가 앉은 줄 못 알아채기도 하고, 동박새 노랫가락이 조금도 귀에 안 들어오게 마련입니다.


지난 2025년 2월 16일에는 부산 거제동 마을책집 〈책과 아이들〉에서 ‘이오덕 읽기 모임’을 꾸리고 난 뒤에, 이곳 뜨락에서 겨울볕을 함께 쬐었습니다. 이때에 “똥! 방!” 하고 굵고 그윽하게 울리는 소리를 한참 들었습니다. “똥! 방!” 하는 소리가 나고서 한동안 조용하더니 다시 “똥! 방!” 소리를 듣는데, 이 소리를 서른 벌째 들을 무렵, 〈책과 아이들〉에서 자라는 동박나무(동백나무)하고 소나무 사이로 동박새가 빼꼼 얼굴을 내밉니다.


‘하얗다(희다·흰)’는 빛깔은 ‘해’가 드리우는 빛을 가리켰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없이 탁 트일 적에는 파랗다면, 이 파란하늘이 눈부시도록 온누리를 밝히는 햇빛은 ‘하얗다’고 여겼고, 해처럼 맑아 ‘해맑다’라 하고, 해처럼 밝아 ‘해밝다’라 합니다. (561쪽)


우리나라 모든 새이름은 다 다른 고장에서 다 다른 시골내기가 문득 어느 새를 눈여겨보다가 저마다 다른 빛결을 가르면서 붙였습니다. 어느 새는 노랫가락을 고스란히 옮겨요. 이를테면 뜸부기·제비·꾀꼬리·소쩍새·왜가리는 노랫소리를 그대로 담았다고 여길 만합니다. 박새·딱따구리·뱁새·크낙새·한새(황새)·매는 매무새와 깃빛과 몸짓을 살펴서 담았다고 여길 만합니다. 여기에 까마귀·까치는 노랫결과 깃빛을 아울러서 담았다고 여길 만한데, 동박새도 노랫결과 깃빛을 아울렀구나 싶습니다.


모든 낱말은 모든 삶하고 잇습니다. 모든 말은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마음과 눈길을 생각 한 톨로 여미어서 나누려는 ‘빛씨’라고 여길 만합니다. 늘 쓰는 흔하고 수수한 말씨 한 마디부터 차분히 새기고 어린이하고 이야기할 적에 누구나 말빛을 틔우면서 말길을 새록새록 지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을 비롯한 조촐한 낱말책을 반가이 맞이하실 이웃님을 기다립니다. 고맙습니다.





‘하나 = 하 + 나’인 얼개를 눈여겨봐요. 하늘처럼 크고 넓은 ‘나(한 사람·개인)’를 가리키기도 하는 ‘하나’입니다. (593쪽)


‘하나’부터 연 셈값은 ‘울’로 마무르는데, ‘나’를 가리키기도 하는 ‘하나’요, ‘나너·너나’를 가리키기도 하는 ‘울’입니다. 곰곰이 보면, 우리말 셈값은 ‘나’랑 ‘너’ 사이를 삶이라는 길로 그려낸 이름이로구나 싶습니다. ‘너’랑 ‘나’는 즐겁고 홀가분히 드나드는 ‘너나들이’라는 사이일 수 있으면서, 땅하고 하늘 사이처럼 까마득히 먼 사이일 수 있되, ‘하나’에서 ‘울’로 오니 ‘한울(하늘)’입니다. (606쪽)


‘자람’은 스스로 높거나 크거나 튼튼하거나 기운차게 오르는 빛이요, ‘장다리’는 꽃을 피우려고 곧고 길고 곱게 오르는 빛이요, ‘장대’는 곧고 길며 단단하게 서려는 빛이요, ‘자’는 곧고 길게 서며 고르게 살피는 빛이라면, ‘자랑’은 스스로 꽃이라고 여기면서 곱게 보여주고 싶은 빛입니다. (646쪽)


그저 앞자리이기만 한 처음은 아닙니다. ‘참·찬찬·천천’이란 결을 품은 말씨인 ‘처음·첫’이에요. (687쪽)


꾸밈없고 스스럼없이 빛나는 ‘착하다’라면, 꾸미면서 스스로 잊거나 잃는 ‘척하다(체하다)’예요. 스스로 있으면 넉넉하면서 빛나는 ‘착하다’일 텐데, 겉으로만 좋게 보이려고 하면서 그만 나(스스로)를 잊어서 껍데기만 남는 ‘척하다(체하다)’입니다. (689쪽)


‘책’이란, 참답고 참하게 찬찬히 채우면서 살림빛과 사랑길과 삶넋과 사람씨를 챙기면서 착한 손길로 차분히 여미어 차곡차곡 이야기를 재우는 꾸러미이지 싶습니다. 우리는 여태까지 우리 숨빛과 눈길로 우리 발걸음을 차근차근 짚은 적이 없다시피 합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챙기고 생각을 참되이 밝히는 첫걸음을 내딛을 때라고 봅니다. (693쪽)


우리글 한글을 으레 ‘소리글(소리를 담는 글)’로 여기는데, 우리글 한글은 ‘소리뜻글(소리하고 뜻을 담는 글)’이나 ‘뜻소리글(뜻하고 소리를 담는 글)’로 여길 만하다고 느낍니다. 우리글뿐 아니라 이웃글(외국 문자)도 뜻뿐 아니라 소리를 함께 담게 마련이요, 소리에다가 뜻을 나란히 담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소리에는 마음소리가 흐르고, 마음소리를 담는 말소리를 옮긴 글씨이기에, 글은 소리랑 뜻을 아우를 수밖에 없습니다. (727쪽)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 어원사전)》

숲노래 기획

최종규 글

철수와영희

2025.3.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