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스미는 - 영미 작가들이 펼치는 산문의 향연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외 지음, 강경이.박지홍 엮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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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4.12.24.

인문책시렁 387


《천천히 스미는》

 G.K.체스터튼 외

 강경이 옮김

 봄날의책

 2016.9.20.



  요즈음에는 나래터(우체국)로 글월을 부치러 드나드는 사람을 아예 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제가 미처 못 본 사이에 누가 글월통(우체통)에 살며시 글월을 넣을 수 있을 테지만, 요 몇 해 앞서부터 나래터 일꾼은 ‘우표’나 ‘엽서’ 같은 이름을 아예 못 알아듣습니다. 사서 붙이려는 사람도 아예 사라지다시피 했고, 나래터 스스로 나래(우표)가 새로 나온다고 알리지 않을 뿐더러, 나래터 일꾼부터 글월을 손으로 써서 부치지 않는 탓입니다.


  앞으로 나래터로 찾아가서 글월을 손수 써서 부치는 아이나 어른이 한 사람씩 늘 수 있을까요? 누리글월이나 손전화로 톡톡 누리면 이내 날아가는 판이니, 애써 품을 들이고 돈을 들여서 여러 날 걸리는 손글월을 띄울 까닭이 없다고 여길 만한 나날입니다. 이리하여 구태여 책을 왜 읽느냐고 핀잔할 만합니다. 손전화를 켜기만 해도 ‘책 읽어 주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책이 아니어도 ‘들을거리’에 ‘볼거리’가 넘칩니다.


  이레쯤 앞서 큰아이하고 읍내 나래터에 들르고서 저잣마실을 하려는 길에 매 두 마리를 보았습니다. 큰아이가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 바로 위에 매!” “어, 이렇게 가까이에서 나네!” 우리는 고개를 꺾은 채 걷습니다. 해가 날개를 비치며 반짝이는 모습까지 또렷합니다. 부드러이 소리를 죽이면서 맴도는 매 둘인데, 이러다가 사냥감이 보이면 곧바로 매섭게 내리꽂을 테지요. 하늘을 나는 매를 으레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매가 왜 ‘매’인지 굳이 말밑풀이(어원분석)를 안 들려주어도 확 알아차리리라 봅니다.


  《천천히 스미는》을 2016년에 처음 읽었고, 2022년에 다시 읽었고, 2025년을 앞두고 새삼스레 읽어 봅니다. 이미 다른 책에 실린 글이라 여러모로 익숙합니다. 엮은이도 이 대목을 잘 압니다. 다른 책에 벌써 실린 글이지만 애써 하나로 묶었습니다. 책이름으로 붙였듯이 천천히 스미도록 천천히 읽어 보기를 바라는 마음일 테지요.


  요새는 무슨 일만 터지면 손전화부터 빼앗고 보는 듯합니다. 손전화에 웬만한 말과 자국이 고스란하거든요. 그만큼 종이를 멀리하고, 손으로 안 짓고, 마음하고 마음이 안 만나며, 살림을 짓는 길을 우리 스스로 팽개치거나 끊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나라에서도 나래터를 자주 찾아가서 손으로 글월을 부칩니다. 우리 집 두 아이하고 날마다 하루글을 함께 씁니다. 나눔글(교환일기)을 꽤 오래도록 썼고, 앞으로도 두 아이하고 나눔글을 길이길이 쓸 참입니다.


  책은 빨리 읽어야 하지 않듯, 살림을 빨리 익히거나 빨리 여미지 않습니다. 찬찬히 여미기에 살림입니다. 찬찬히 새기기에 책입니다. 느긋이 품기에 사랑입니다. 넉넉히 나누기에 빛이요 생각이며 웃음꽃에 노래입니다.


ㅅㄴㄹ


제비보다 먼저, 수선화보다 먼저, 눈물꽃보다 그다지 늦지 않게 두꺼비는 다가오는 봄에 나름대로 인사를 한다. (94쪽/조지 오웰)


키질하는 날개 하나하나에 바람이 다정하게 엉긴다. 기러기 떼가 먼 하늘의 희미한 얼룩이 될 무렵 마지막 울음소리가, 여름을 보내는 영결 나팔소리가 들린다. (108쪽/알도 레오폴드)


다람쥐는 다른 나무로 뛰어갔다. 매는 빙빙 돌며 점점 멀어져 새로운 둥지에 자리를 잡았지만 벌목꾼은 그곳에도 토끼질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112쪽/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


《천천히 스미는》(G.K.체스터튼 외/강경이 옮김, 봄날의책, 2016)


2년 전 그날 밤 내 불면이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 이태 앞서 그날 밤부터 잠을 못 잤다

26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동네의 저녁이다

→ 그러나 나는 이 마을 저녁을 말하려 한다

34


내 온전한 마음이 방황하거나 정지된 사이에 분명 매우 긴 시간이 흘렀다

→ 온마음이 헤매거나 멈추고서 한참 지나갔다

→ 오롯하던 마음이 맴돌거나 멈춘 지 한참 되었다

55


숨 돌릴 휴지기가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불행한 젊은이에게 삶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 숨돌릴 틈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줄 깨닫지 못하는 슬픈 젊은이는 삶이 괴롭다

→ 숨돌릴 틈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줄 깨닫지 못하는 딱한 젊은이는 삶이 지친다

85


가끔씩 하늘이 비둘기떼로 변하는 듯 보이곤 했다

→ 가끔 하늘이 비둘기떼로 바뀌는 듯하다

→ 가끔 하늘이 비둘기떼처럼 보인다

91


생각이 효과가 있으려면 생각을 발사할 수 있어야 한다

→ 생각이 빛을 내려면 생각이 솟구칠 수 있어야 한다

→ 생각이 보람 있으려면 생각이 솟아날 수 있어야 한다

150


책은 세 부류로 편리하게 나눌 수 있다

→ 책은 셋으로 쉽게 나눌 수 있다

→ 책은 쉽게 세 갈래로 볼 수 있다

→ 책은 가볍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231


어디를 가든 모두 변했는데도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 어디를 가든 모두 바뀌는데 끝내 안 바뀌는 사람은 어떻게 있는가

→ 어디를 가든 모두 달라지는데 왜 어떤 사람은 끝내 안 달라지는가

266


내가 처음 그녀에 대해 들은 것은 템블러 산맥에서였다

→ 나는 템블러 멧줄기에서 그분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28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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