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상문학전집 : 감꽃과 주현이 - 추모 정영상 30주기
정영상 지음, 이대환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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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4.10.23.

노래책시렁 378


《물인듯 불인듯 바람인듯》

 정영상

 실천문학사

 1994.1.30.



  바꾸려면 한동안 어지럽습니다. 그래서 안 어지럽기를 바라는 쪽에서는 안 바꾸려고 합니다. 익숙한 대로 하면 어지러울 일이 없고, 어지러울 일이 없으면 안 어렵습니다. 어느덧 적잖은 배움터에서 ‘두발자유’나 ‘자율학습 폐지’를 이루고 ‘학생인권조례’를 내놓습니다. 그러나 ‘두발’이나 ‘폐지’나 ‘인권’ 같은 일본말씨는 못 바꿉니다. 《물인듯 불인듯 바람인듯》을 곱씹습니다. “누구나 사람이다”를 외친 목소리였을 텐데, 오늘날 곳곳에 퍼진 ‘아동학대’나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은 어쩐지 어지럽게 춤춥니다. 아이들 스스로 안 배우려고 하면서 핑계처럼 내미는 허울로 널뛰기 일쑤입니다. 함께 배우고 같이 생각하며 나란히 걸어가려고 갖은 굴레에 수렁을 걷어치우려는 뜻을 모았어요. 새길을 내놓지만, 새길에 우리 스스로 못 따라가거나 안 따라가는 셈입니다. 왜 그럴까 하고 하나하나 짚노라면, 오늘날 아이어른은 으레 “안 걸어다니”고 “도시락을 안 쌉”니다. 스스로 배우는 길이 아예 막히거나 사라지다시피 합니다. 우리는 ‘스마트 교과서’가 아닌 ‘배움길’을 살필 때입니다. 배움터에는 차댐터가 아닌 텃밭을 놓을 일입니다. 어른(교사·부모)부터 걸어야 하고, 도시락을 쌀 일입니다. 아이한테 집살림과 마을살림을 보여주고 함께 소매를 걷을 노릇입니다. 비와 해와 바람을 잊은 나라에는 아무 앞날이 없습니다. 숲과 들과 바다를 모르는 아이는 철들지 않습니다.


ㅅㄴㄹ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보고 / 그놈의 자율학습인가 뭔가 강제로 붙들어두는 방법만이 / 꼭 옳은 것인가 따지고 싶었습니다. / 중학교 1학년 딸애가 전과목 보충수업을 받아야 할 만큼 / 정규수업이 부실할까? 깊은 회의가 일어났지만 / 차마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 학교에서 참고지, 문제지 일괄 채택하고 그저 학부모는 소리 없이 돈만 내야 하는가 싶었지만 / 항의는커녕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체육성금이니, 금강산댐 기금이니, 적십자 쌀모으기 운동이니 / 말로만 성금이지 일정한 금액을 꼬박꼬박 갖다 바칠 때는 / 이건 또 하나의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 속으로 원망도 했습니다. / 자유저축이라는 미명하에 적금 들듯 들어야 하는 강제저축, / 반공영화를 보여준다면서 체육관 강당에다 밀어넣고 돈 받고 보여주는 이상한 문화교실 …… (인질―어느 학부형의 넋두리/108쪽)


톱밥난로 가에 / 바삭바삭 시간이 데워지고 / 시간 속의 물이 끓는다 / 일찌감치 교감마저 자리를 떠나고 / 삼삼오오 늙은 선생들이 모여 앉아 / 희망 없는 앞날을 한탄하는 / 토요일, 재수 없는 일직날 / 교문 밖에는 하늘이 가라앉는 듯 어둡고 / 불이 불을 달구어 / 펄펄 주전자 뚜껑이 소리를 내지만 / 말은 돌면 돌수록 비겁해지는 건가. / 연구점수가 높은 누구는 / 평소에 교활했다드니 / 누구는 교감에게 잘 보였다드니 / 애꿎은 사람들 구설수에 올라가고 (일직날/119쪽)


누구의 짓인가 / 잔인무도한 저 병사들을 / 이끌고 진격하는 대장은 누구인가 / 쇠약한 국토처럼 / 짓밟히는 가을, / 누구를 목버힐 것인가 (내란/153쪽)


+


《물인듯 불인듯 바람인듯》(정영상, 실천문학사, 1994)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보고

→ 캄캄할 때 돌아오는 아이를 보고

→ 어두워서야 돌아오는 아이를 보고

→ 밤에 돌아오는 아이를 보고

108쪽


그놈의 자율학습인가 뭔가 강제로 붙들어두는 방법만이 꼭 옳은 것인가 따지고 싶었습니다

→ 그놈 혼배움인가 뭔가 억지로 붙들어두는 길만이 꼭 옳은가 따지고 싶었습니다

108쪽


이건 또 하나의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 이는 또 돈을 바치는 셈이 아닌가 하고

→ 이는 또 다르게 거두는 짓이 아닌가 하고

108쪽


누구의 짓인가

→ 누구 짓인가

153쪽


잔인무도한 저 병사들을 이끌고 진격하는 대장은 누구인가

→ 사납게 저 떨거지를 이끌고 달려드는 우두머리는 누구인가

→ 섬찟하게 저 놈팡이를 이끌고 뛰어드는 꼭두는 누구인가

153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숲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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