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4.9.28. 맨발 달리기



  맨발에 고무신으로 걸어다니면 발바닥이 안 아프냐고 묻는 분이 참 많다. 그런데 예전에는 임금이나 나리나 벼슬아치를 뺀, 온누리 모든 사람이 맨발로 걸어다녔다. 고무신조차 없이 맨발로 걸어다닌다고 해서 발바닥이 아플 일이란 없다. 그저 오늘날 길바닥은 너무 더럽고 부스러기나 돌이나 쇳조각이나 쓰레기가 끔찍하게 뒹굴 뿐이다.


  열세 해 만에 놀이마당(운동회)에 마실해 보았고, 이 놀이마당에 함께하는 모든 분이 같이 뛰고 달리고 노는 터라, 이어달리기도 했다. 나는 마땅히 고무신을 벗고서 맨발로 너른터(운동장)를 달렸다. 또 이웃님이 묻는다. “운동장을 맨발로 달리면 발바닥 안 아파요?” 나는 빙그레 웃는다. “맨발로 달려 보셔요. 오히려 더 빨리 달릴 수 있어요.”


  이 나라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옛사람이 발에 뭘 꿸 적에는 볏짚으로 삼은 ‘짚신’을 가볍게 댔다. 일본이 총칼로 이 나라를 집어삼키던 무렵에 어린배움터나 푸른배움터에서 놀이마당을 펼 적에도 숱한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맨발로 달렸다. 어른도 으레 맨발로 달리기를 했다.


  고작 온해(100년)밖에 안 되는 지난날인데, 우리는 어떻게 이 발자취를 까맣게 잊을까? 맨발로 즐겁게 달린 하루를 돌아보는 밤에 혼자 생각에 잠긴다. ‘손짓기’를 잊다가 잃기에 ‘발걸음’도 잊다가 잃는 듯하다. 손수 빚으면서 스스럼없이 나누던 마을살림을 잊다가 잃기에, 누구나 스스럼없이 맨발로 걸어다니던 마을길과 고샅길(골목길)이라는 터전을 우리 스스로 내다버리거나 내팽개치고 만다.


  아이도 어른도 맨발로 걸어다닐 만한 길이 넓다면, 이곳에는 쇳덩이(자동차)가 함부로 밀려들지 못 한다. 아이도 어른도 맨발로 걸어다닐 수 없는 곳이라면, 이런 데에는 쇳덩이가 물결칠 뿐 아니라, 신을 꿰고도 느긋이 오가기 어렵거나 벅차거나 고단하다.


  맨손과 맨발을 잊은 곳에서 어떤 살림을 잃었는가? 맨눈으로 넋을 느끼고 마음을 읽고 숨결을 헤아리고 바람빛을 살피던 매무새를 잊은 사람은 어떤 삶을 보내는가? 꾸밈없이 말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말로 속내를 꾸밀까? 꾸밈없이 글쓰지 않는 사람은 무슨 글자락으로 겉치레나 허울을 내세울까? 맨몸을 잊기에 ‘맨말·맨글·맨마음·맨빛·맨삶’을 모조리 잃는다. 구태여 꾸밀 까닭이 없이 서로 마음으로 만나고 사귈 적에 언제나 아름답고 알뜰하고 참하고 사랑일 텐데, 자꾸자꾸 꾸미는 탓에 스스로 빛을 잃고 어설프고 바쁘고 허덕인다.


  아기는 맨발로 태어나고 맨손으로 쥔다. 아기는 굳이 옷을 안 입어도 된다. 우리는 어떤 손발이고 차림새이고 옷과 신을 두르는 하루인가? 옷을 안 입고 다녀야 하지는 않지만, 옷차림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그만 참마음을 잊고 참살림을 잃으면서 참사랑을 등진 이곳 이 나라 이 마을 이 별이지 않은가.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숲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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