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01.5.31. 일하는 보람
사람은 일을 안 하며 살 수 없다. 사람은 놀지 않고서도 살 수 없다. 일하고 놀면서 하루를 짓기에, 일과 놀이가 어우러지며 살기에, 비로소 사람이라는 이름이지 싶다. 그러나 적잖은 나날을 두고서 숱한 사람들은 일놀이를 누릴 틈을 빼앗기고 억눌린 채 고달팠다고 느낀다. 꼭두머리라는 허울이 들어서던 무렵부터 꼭두각시로 뒹굴어야 하는 사람이 생겼다. 처음에는 위아래나 왼오른으로 안 가르던 사람 사이일 텐데, 윗자리나 아랫자리로 가르는 굴레를 들씌우면서 빛을 잃고,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고 다투면서 사랑을 잊는다. 왜 햇볕 한 줌을 쬘 수 없는 곳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나? 왜 뙤약볕에서 새카맣게 타면서 하루가 버거워야 하나?
‘놀이·놀다’하고 ‘노닥거리다’는 다르다. ‘일’을 하면서 맞물리는 ‘놀이’이지만, ‘일’이란 없이 탱자탱자 바보짓을 부리기에 ‘노닥거리다’이다. 일하는 사람이기에 놀이하는 사람으로 나란히 서고, 일을 안 하는 사람이기에 노닥거리는 짓에 사로잡힌다. 일할 줄 알기에 이야기가 피어나고, 놀 줄 알기에 노래를 부른다. 일할 줄 모르기에 어리석고, 노닥거리기만 할 뿐이니 돈·이름·힘으로 이웃사람을 쥐락펴락 괴롭힌다.
한 해에 하루조차 안 쉬는 헌책집지기가 수두룩하다. “사장님, 그래도 설이나 한가위에는 쉬셔야 하지 않나요?” 하고 여쭈어 본다.
〈아벨서점〉 아주머니는 “모처럼 설이나 한가위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이분들이 헛걸음을 하시면 제가 더 섭섭하지요.” 하고 이야기한다.
〈신고서점〉 아저씨는 “나이를 많이 먹어가면서 힘들어서 요새는 한 해에 하루
나 이틀을 쉴 뿐이지, 여태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책방 문을 열었어요. 하루도 안 쉬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분이 많은데, 저는 오히려 한 해에 하루를 쉬는 날을 두니까 더 힘들어요.” 하고 이야기한다.
〈뿌리서점〉 아저씨는 “무슨 모임이라고 사람들이 불러서 어디 가서 노래 부르고 밥을 사먹는 데에 있으면 더 힘들고 거북하더라고. 집안 제사를 하러 멀리 가야 하더라도, 그곳에서 안 자고 얼른 책방으로 돌아와서 밤에 한두 시간이라도 열어야 마음이 놓여. 밤에 열고서 언제 자느냐고? 허허. 책보러 오는 손님들이 밤에도 오시는데 잠이 오기보다는 즐겁고 고맙지. 잠이야 새벽에 들어가서 자면 되고.” 하고 이야기한다.
〈헌책백화점〉 아저씨는 “손님이 없으면 문을 닫아 놓고 마음껏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지. 꽹과리도 치고, 북도 치고. 요새는 외국어도 공부해. 혼자서 사전을 큰소리로 읽지.” 하고 이야기한다.
일하고 놀이는 아주 다르지 않을 만하다. 기쁘게 맞이하기에 일이요, 즐겁게 누리기에 놀이라고 느낀다. 삶을 기쁘게 밝히기에 일이요, 살림을 신나게 펼치기에 놀이라고 느낀다. 논밭을 돌보고 들숲을 품으면서 바다를 헤아리던 모든 옛사람은 삶이라는 자리에서 늘 일하고 놀이가 하나로 흘렀으리라 본다.
이리하여 나는 책집마실을 ‘일놀이’로 여긴다.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엮는 밑책을 살피려고 날마다 하루를 마칠 무렵에 두세 곳 책집을 찾아가되, 시끌벅적한 서울을 잊으면서 마음 가득히 푸른숨결을 불어넣는 글결을 익히는 마실길이다. 책을 읽다가 찰칵 한 자락 찍는다. 다시 찰칵 한 자락 더 찍고서 책을 새로 읽는다. 어느새 등짐과 두 손을 가득 채울 만큼 책꾸러미를 장만한다. 집까지 책짐을 나르자면 땀을 뻘뻘 흘리는데, 집에 닿아서 씻고 책을 닦고 천천히 되읽으면서 풀벌레노래를 듣는다. 비록 삯집이어도, 조그마한 보금자리가 있는 종로구 평동 나무집(적산가옥) 둘레로 숲이 있다. 이 숲에서 들려오는 밤노래를 듣다가 책을 손에 쥔 채 스르륵 잠이 든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