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 숲노래 책읽기

2024.8.24. 나는 야한 여자가 안 좋다



  1998년 어느 날, 서울 용산 헌책집 〈뿌리서점〉에서 책벌레 어른 한 분이 불쑥 묻는다. “그런데 최종규 씨는 마광수 교수를 어떻게 생각해요?” “네? 마광수요? 그런 사람 책을 뭣 하러 읽어요?” “읽어 보셨어요?” “아뇨. 굳이 읽어야 하나 싶어서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안 읽어 보고서 그렇게 말해도 되나요?” “어, 어, 그런가요? 음, 좀 생각해 볼게요. 그래요, 어르신 말씀이 맞네요. 마광수라는 사람을 읽어 볼 만한지 아닌지는, 먼저 그 사람이 쓴 책을 차곡차곡 읽어 보고서 말해야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끄러울 모습을 미리 짚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책 있잖아요? 그 책부터 읽어 보세요.”


  이날 헌책집 〈뿌리서점〉에서 바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샀다. 이날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깜짝 놀랐고, 책집에서 자주 만나서 말을 섞는 책벌레 어른한테 새삼스레 창피했다. “어르신, 마광수 교수 책 잘 읽었습니다.” “그래요? 어떻든가요?” “할 말이 없을 만큼 창피했습니다. 책이름만 보고서 무슨 씨나락 까먹는 “야한 여자가 좋다”인가 싶었는데, 크게 뒷통수를 맞았습니다.” “마광수 교수는 윤동주 전문가예요. 우리가 아는 윤동주 이야기는 마광수 교수가 정리했어요.” “네? 윤동주를요?” “나중에 찾아보세요.”


  1998년 첫봄에 처음 읽고, 2008년 즈음 다시 읽고, 2021년과 2024년 늦여름에 새로 읽으면서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그냥 태어난 책이 아니라고 느낀다. 1989년에 마광수 교수는 왜 책이름을 이렇게 붙였을까? 차디찬 사슬나라(박정희 독재)에서 겨우 풀려났고, 끔찍한 굴레나라(전두환 독재)를 겨우 떨쳐냈지만, 막상 이 나라는 온곳이 갑갑하고 ‘대학생·운동권’조차 ‘선후배 위계질서’를 내세워서 ‘대학교에서조차 주먹질(구타·폭행)’이 버젓했고, ‘목소리만 내는 허울(위장 진보)’이 글밭 구석구석에 고스란했다. 우리는 우리 민낯을 그대로 밝히고 짚으면서 새길을 열 만한 눈길과 머리와 손길과 발걸음과 마음이 있을까?


  이를테면, 마광수 교수가 1971년 11월에 쓴 어느 글을 보면, “우리 대학생들은 누구나 막연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학교 앞에는 술집들이 날로 번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해답을 찾기를 두려워하고 소극적인 소시민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큰 해답은 바라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선 나날의 일상에 행복하고 건강하고 활기있게 임할 수 있는 방도쯤은 있는 것이 아닐까.(281쪽)” 같은 대목이 있다. 1971년 11월이면, 전태일 님이 불꽃으로 스러지고서 고작 한 해 뒤이다. 숱한 서울사람도 시골사람도 가난에 겨워 입에 풀바르기조차 버겁던 즈음이다. 이런 때에 숱한 ‘서울내기 대학생’은 ‘대학교 앞 술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술값을 썼다면, 또 1980년대와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똑같은 쳇바퀴가 흘러온 이 나라요, 적잖은 ‘대학생·운동권’은 으레 술판과 노닥판에 절어서 보낸 속낯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이 나라가 왜 뒤틀리거나 비틀린 수렁을 못 씻는지 환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고 본다.


  술값과 옷값과 노닥값으로 10만 원을 쓸 적에 책값(배움값)으로 10만 원을 함께 쓸 줄 모른다면, 그이는 대학생도 운동권도 진보도 좌파도 보수도 우파도 아닌, 그저 바보라고 느낀다. 쇳덩이(자가용)를 장만하려고 1천만 원을 썼다면, 책값으로 적어도 나란히 1천만 원을 쓸 줄 알아야 비로소 사람답다고 느낀다. 잿집(아파트)을 얻으려고 10억 원을 들인다면, 책값으로 적어도 1억 원을 들일 줄 알아야 비로소 ‘철든 사람’이라고 느낀다.


  저이가 꼰대라고 나무라지 않아도 된다. 내가 나부터 바꾸면 넉넉하다. 그놈은 갑갑하고 갇혔다고 손가락질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스스로 서울을 떠나서 시골에서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꾸리면서 들숲바다를 언제나 품는 숲살림으로 걸어가면 아름답다.


  아직 애송이 책벌레로 뒹구느라 “나는 야한 여자가 안 좋다”고 중얼대면서 마광수를 뭣 하러 읽어야 하느냐고 투덜거리던 철바보를 넌지시 타이른 책벌레 어른을 떠올린다. 거짓말이나 눈속임이나 훔침질이나 베낌질을 하는 무리는, 언제나 감추거나 숨기거나 덮거나 가린다. 참말이나 참살림이나 참빛이나 참넋이나 참글로 나아가려고 하는 작은이는, 늘 환히 드러내고 밝게 나타내며 맑게 웃는 매무새로 온누리를 노래한다.


  글을 어렵게 꼬거나 꾸미는 이는 거짓말꾼이다. 글을 쉽게 안 쓰면서 멋을 부리거나 치레하는 이는 사랑을 모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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