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왜 지켜야 하는가
김동수 지음 / 따님 / 1994년 5월
평점 :
절판


숲노래 숲책 / 환경책 읽기 2024.8.15.

숲책 읽기 226


《논, 왜 지켜야 하는가》

 김동수와 네 사람

 따님

 1994.5.1.



  서울에서 살던 무렵, 으레 둘레에 책을 건네었습니다. 이미 읽은 책을 일부러 여럿 더 장만해 놓고서 하나씩 쥐어 줍니다. 스스로 사서 읽지 않으리라 여겨서 따로 챙겨 주지만, 스스로 사서 읽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가 건네어도 달갑잖게 마련입니다.


  이리하여 몇 마디 말이 오갑니다. “날마다 밥을 먹지요?” “응.” “날마다 먹는 밥은 어디에서 올까요?” “가게에서 사지.” “가게에 들이려면 누가 어디에서 지을까요?” “뭐, 논이나 밭에서 짓겠지.” “그러면 우리가 날마다 먹는 밥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 꼭 알아야 하나?”


  밑도 끝도 없을 이야기를 자꾸자꾸 하지만, 지치지 않으면서 다시금 폅니다. “늘 마시는 바람인데, 어떤 바람인지 모른다면, 이 바람에 죽음재가 섞여도 못 느낄 테지요.” “아마 그렇겠지.” “서울에 익숙하면 서울바람에 익숙할 테니, 매캐한 바람도 싱그러운 바람도 못 알아채게 마련이겠지요?” “아마 그렇겠지. 그보다는 바람을 요새 누가 생각하니?”


  《논, 왜 지켜야 하는가》(김동수와 네 사람, 따님, 1994)를 진작에 읽고서 틈틈이 둘레에 건네었지만, 이 책을 다 읽었다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서울이나 큰고장에서 살면, 서울이나 큰고장에 논이 어디 있느냐면서 손사래를 칩니다. 시골에서 살면, 굳이 논밭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읽어야 하느냐고 고개를 돌립니다.


  그래도 용케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낸 동무나 뒷내기가 몇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 너무 어렵더라. 뭔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 쉽지는 않은 글일 수 있지만, 고등학교를 마친 사람이라면 읽을 수 있어. 이 책 하나로 마치려면 어렵겠지만, 우리를 둘러싼 숲과 들과 바다를 알아가려고 다가서면 조금씩 눈을 뜰 수 있어.”


  이제 와 돌아보면, 대학교에서 운동권이던 이들은 《논, 왜 지켜야 하는가》 같은 책을 안 읽었습니다. 교육대학교나 사범대학을 다니는, 앞으로 길잡이 노릇을 하려는 이들도 이 책을 꺼리기 일쑤였습니다.


  논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밥을 먹어도 될까요? 다만, 이 책을 쓴 여러 사람은 시골내기가 아닌 서울내기입니다. 논짓기를 하면서 쓴 글이 아닌, ‘논구경’을 한 글바치가 여민 글입니다. 늘 논에 둘러싸인 들에서 논바라기를 하면서 논살림을 담아내려고 한다면, 글결이 확 달랐으리라 봅니다. 고등학교는커녕 어린배움터조차 구경하지 못 한 시골 할머니가 읽을 만하도록 글결을 가다듬을 때라야, 비로소 온누리 어린이한테 이바지할 꾸러미를 엮을 수 있다고 느껴요.


  참말로 이제 시골에 시골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맨발로 논밭을 달리고 맨손으로 나무를 타던 시골아이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어디 있나요? 맨몸으로 일하는 시골어른도 다 사라진 듯싶습니다. 흙수레(농기계)가 아닌 쟁기와 삽과 호미와 낫을 쥔 손으로 차근차근 흙을 만지고 풀을 살피고 해바람비를 품는 어진 시골내기는 어디 있을까요?


  적어도 500억을 들이는 ‘스마트팜’이고, 2000억도 5000억도 아무렇지 않게 척척 쏟아붓는 ‘스마트팜’입니다. 그러나 해바람비하고 동떨어진 “바닥은 시멘트요, 유리로 둘레를 막고서, 전기로 와이파이를 돌리고, 손전화 단추로 꾹꾹 누르기만 하면서, 엘이디전구를 밝히는 스마트팜”에서는 무엇을 거두는지 짚을 때입니다. 우리한테 이바지하는 푸성귀가 스마트팜에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를 죽음길로 내모는 ‘푸성귀 흉내’만 그득하지 않을까요?


  어마어마하게 돈을 퍼붓는 스마트팜 둘레에는 아무런 풀이 못 자라고, 아무런 나무가 없습니다. 참새도 박새도 제비도 기웃거리지 못 합니다. 뭉게구름도 깃털구름도 얼씬하지 못 합니다. 산들바람도 돌개바람도 스미지 못 합니다. 햇빛도 햇볕도 햇살도 다 가로막을 뿐입니다. 풀벌레노래가 없고, 개구리노래가 없고, 매미노래마저 없어요. 우리는 ‘푸성귀 흉내’만 내는 ‘죽음덩이’를 값싸게 큰가게에서 사들이면서 밥자리에 놓는 셈입니다.


  이미 사라진 책을 굳이 되읽어 봅니다. 서울내기 글바치가 글을 좀 쉽게 쓰기를 바랄 수 없는 까닭을 떠올립니다. 시골에서 흙지기 할매할배랑 이웃하지 않는 글바치라면, ‘쉬운글’이 무엇인지 알 턱조차 없습니다. ‘쉬운글 = 삶글’이요, 삶글이란 ‘살림글’이며, 살림글이란 들숲바다를 품은 ‘숲글’이자 ‘사랑글’입니다.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는 ‘푸른글’일 때라야 비로소 ‘쉬운글’입니다.


  아기를 낳아 천기저귀를 대고는 보글보글 삶은 다음에 손으로 복복 비비고 헹구어 햇볕에 말리는 살림을 짓지 않고서야, 쉬운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아기를 업고 안으면서 하루 내내 자장노래에 놀이노래에 일노래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어버이 노릇을 하지 않고서야, 쉬운글을 쓰지 못 합니다.


  손수 쓴 쉬운글로 아이한테 한글을 가르칠 뿐 아니라, 언제나 아이 곁에서 함께 웃고 춤추면서 살림을 지을 적에 비로소 쉬운글을 척척 씁니다. 논짓기는 머리로 안 하거든요. 논짓기는 온몸으로 하는 살림짓기입니다. 논에서는 벼만 거두지 않거든요. 짚을 거두고, 한해살림을 이야기꽃으로 거둡니다. 뭇숨결이 어우러지기에 논짓기입니다. 논에 남은 이삭은 새가 훍고 벌레가 누립니다. 그리고 흙으로 가만히 돌아가서 흙을 새롭게 북돋웁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자면, 사람 곁에 새와 벌레와 짐승과 풀꽃나무와 돌흙모래와 해바람비가 나란히 어우러질 노릇입니다. 들숲바다에 깃드는 자그마한 숨결 하나인 사람일 때라야, 비로소 뭇숨결 사이에서 사랑을 지피는 살림으로 나아가겠지요.



전통 주거인 초가는 짚으로 만든 이엉과 용마름으로 지붕을 덮는다. 이같은 초가 지붕은 비와 바람을 막고, 겨울이면 열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 집안을 따뜻하게 해주고, 여름이면 뜨거운 햇살과 열기를 막아 집안을 시원하게 해준다. 우리 조상들은 해마다 지붕을 덧씌워 두껍게 하고 추녀에는 참새도 깃들이게 하였던 것이다. 집안에서 쓰는 가재도구는 짚을 쓰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짚을 알뜰히 사용했다. 멱서리, 씨오쟁이, 쌀가마니, 소쿠리, 삼태기, 방석, 멍석, 새끼, 둥우리, 짚독, 메주끈 등 온갖 도구와 장식에 짚이 사용되었다. (154쪽)


짚은 가축들의 여물과 깃이 되고 마침내 두엄을 만들어 훌륭한 거름이 되어 주었다. 또한 땔감으로 쓰인 짚은 재거름이 되어 다시 논밭으로 돌아갔다. 즉 자연의 순환 이치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155쪽)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기름진 땅과 쏟아지는 무한한 햇빛과 풍부한 물을 지닌 우리가 이들 자원을 놀릴 수는 없다. 앞으로 많은 인구가 좁은 국토에서 쾌적하게 살기 위해서는 화학 영농기술이 아닌 생물과 태양에너지를 토대로 한 영농기술로 농업생산의 지속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160쪽)


+


품종 개량을 통하여 환경 적응력을 더욱 높이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 둘레에 더욱 맞추려고 꾸준히 씨를 바꾼다

→ 둘레에 맞도록 꾸준하게 씨를 다듬는다

13쪽


벼농사는 소출 면에서 안정성이 높기 때문에

→ 벼짓기는 늘 넉넉히 거두기 때문에

13쪽


우리 조상들은 산자락의 밭조차 천수답으로 일군 것이다

→ 우리 옛어른은 멧자락 밭조차 논으로 일구었다

→ 우리 옛사람은 멧밭조차 다락논으로 일구었다

20쪽


이와 같은 흙의 여러 기능들은 토양 입자와 물 그리고 공기의 조성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 이처럼 흙은 알갱이와 물과 바람이 어떠한가에 따라 크게 다른데

→ 이렇게 흙은 속뭉치와 물과 바람에 따라서 몫이 크게 다른데

56쪽


이들 민구(民具)들은 외래문화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전통문화의 기반을 다져 온 예술품이다

→ 이들 세간은 바깥물결에 물들지 않고 맑게 내림멋을 다져 온 꽃이다

→ 이들 살림은 들온길에 물들지 않고 티없이 물림넋을 다져 온 빛살이다

154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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