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판 오르페우스의 창 17
이케다 리요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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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4.6.3.

발바닥이 없고 손바닥이 없는


《오르페우스의 창 17》

 이케다 리에코

 장혜영 옮김

 대원씨아이

 2012.9.15.



  《오르페우스의 창 17》(이케다 리에코/장혜영 옮김, 대원씨아이, 2012)은 막바지에 다다른 여러 사람들 마음하고 발걸음을 보여줍니다. 손아귀에 힘을 거머쥐었다고 여기는 쪽이 있고, 손아귀에 움켜쥐었다고 여긴 힘을 잃었다고 여기는 쪽이 있습니다. 새롭게 갈아엎겠노라 바라는 쪽이 있고, 오랜 틀을 이으려는 쪽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창’을 아예 모르지만 ‘아이 눈길’을 바라보는 쪽이 있는데, 이들은 이 그림꽃에 안 나옵니다. ‘꽃망울’과 ‘잎망울’을 늘 살피는 쪽이 있으며, 이들도 이 그림꽃에 안 나옵니다.


  우리는 으레 ‘러시아 혁명’처럼 이름을 붙이지만, 참으로 갈아엎은(혁명) 이들은 벼슬아치나 글바치나 힘꾼이나 돈꾼이 아닙니다. 벼슬·글·힘·돈으로 살아가던 이들은 ‘시늉’을 하는 허수아비예요. 낫과 호미와 쟁기를 쥔 수수한 사람들은 늘 갈아엎습니다.


  땅을 갈아엎으면서 씨앗을 심는 수수한 사람이 온누리를 바꿉니다. 힘이나 돈이나 이름을 물려주는 힘꾼이나 돈꾼이나 이름꾼은 언제나 담벼락을 높고 단단히 세워서 끼리끼리 놉니다. 들숲바다에서 씨앗 한 톨을 사랑하는 수수한 사람은 딱히 담벼락이 없이 울타리도 가볍게 놓고서 해바람비를 듬뿍 받아들이고 나눠요. 이리하여 시골사람과 흙사람과 들사람과 숲사람과 바닷사람은 ‘갈아엎기’조차 안 하는 살림길을 스스로 배우고 넉넉히 익히면서 널리 나누는 길을 걸어요.


  몇몇 우두머리나 임금이나 붓꾼이나 벼슬꾼이 러시아를 이끌거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하고 다른 모든 이웃나라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보금자리를 일구면서 살림을 지핀 작은 사람들이 온누리와 이 별을 즐겁게 사랑으로 아름다이 이끌거나 지켜 왔어요.


  《오르페우스의 창 17》에 이르러 “어째서 당신들은 그토록 죽음을 서두르는 건가요?” 하고 피눈물로 외치는 말이 나옵니다. 아니, 열일곱걸음에 앞서도 꾸준히 이런 피울음이 둘레에서 흘렀을 텐데, 힘·돈·이름만 쳐다보는 이들은 사람·사랑·숲하고 내내 등진 채 싸우기만 했습니다.


  참다이 갈아엎으려면 싸움이 아닌 사랑을 할 노릇입니다. 온통 갈아엎고 싶다면 서울을 떠나서 시골에서 오순도순 들숲바다를 품을 노릇입니다. 빛나는 어깨동무(평화·평등·자유)를 이루고 싶다면 그야말로 힘·돈·이름을 몽땅 내려놓고서 아기를 안고서 자장노래로 재우고, 아이들하고 맨발로 들숲바다에서 뛰놀면 됩니다.


  길은 누구한테나 스스럼없고 수월하고 수수하면서 아름답습니다. 길을 안 보려 하니 안 보일 뿐입니다. 씨앗 한 톨을 심는 길이 ‘갈아엎음(혁명)’입니다. 총칼로 마구 죽이는 짓은 ‘갈아엎음’이 아닌 ‘앙갚음(보복)’입니다. 앙갚음은 앙갚음으로 이을 뿐입니다. 씨앗을 심어서 낟알을 거두고 열매를 맺어야, 이 낟알과 열매를 둘레하고 나누면서 사랑으로 온누리를 다독이면서 일으키는 참누리(참다운 누리)를 이루게 마련이에요.


  발바닥이 없으니 걸아다니지도 않다가, 그만 죽이고 죽습니다. 손바닥이 없으니 남한테 시키기만 하다가, 그만 어떻게 살림을 지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죽이고 죽습니다. 들사람(민중)은 늘 발바닥으로 걷고, 손바닥으로 짓습니다. 숲사람(민중)은 언제나 발바닥으로 풀꽃나무를 느끼고, 손바닥으로 해바람비를 받아들입니다. 우두머리도 발바닥하고 손바닥이 없고, 벼슬아치하고 붓꾼하고 돈꾼하고 이름꾼도 발바닥하고 손바닥을 잊은 채 “담벼락 안쪽”에서 끼리끼리 헤매는 판입니다.


ㅅㄴㄹ


#池田理代子 #オルフェウスの窓


“나 혼자만 도망치라고요? 말도 안 돼!” “단념하세요. 당신만이라도 구하지 못하면 제가 온 의미가 없습니다.” (6쪽)


“시대의 흐름은 이미 우리의 존재를 요구하지 않아. 너도, 나도, 결국은 상당히 서툰 인간이었던 것 같구나.” (32쪽)


‘우는 건 언제나 여자. 권력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전쟁을 계속하는 남자들의 끝없는 시선 뒤에서, 얼마나 많은 어머니가, 아내가, 그리고 연인이, 누이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왔을까.’ (84쪽)


“좋아. 이제부터 철저한 보복이다. 이번 쿠테타에 참가한 장교들은 모조리 총살해!” (131쪽)


‘바보 같은 짓을! 어째서 당신들은 그토록 죽음을 서두르는 건가요? 죽는다고 대체 뭐가 해결되죠? 이기적이에요! 자신들이 한 일의 결과를 살아서 끝까지 지켜볼 용기도 없는 건가요, 겁쟁이들 같으니!’ (139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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