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ㅎ출판사에 원고뭉치를 보냈습니다. 계약서를 쓰고 책 한 권 내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ㅎ출판사 분들은 이 일에 치이고 저 일에 바빠서 제 원고뭉치를 책으로 묶어낼 낌새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원고를 보내고 반 해가 지나도록 제 원고를 살펴볼 틈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먹고살 돈이 바닥을 칩니다. 이 원고뭉치로 책 하나 묶어내면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데. 애가 타고 혀가 타고 입술이 타고 온몸이 바싹바싹 마릅니다.

 그러다가 지난달, 예전 원고뭉치는 없애기로 하고 새 원고꾸러미를 마련하기로 이야기합니다. ㅎ출판사 분들은 제 원고를 읽어 보지 않으셨으니 그 글 그대로 책 하나 묶어도 좋은지 모자란지 모르실 테지요. 반 해가 지나고 한 해가 되어 가는 동안 제 스스로 느낍니다. 예전에 쓴 제 글이 참 엉성하다고, 어줍잖다고, 어설프다고. ㅎ출판사에서 제 원고뭉치를 곧바로 책으로 묶어 주었다면, 저는 적잖은 글삯에다가 책 하나 세상에 더 내놓았다는 훈장을 가슴에 달 수 있었겠지요. 어쩌면 어렵지 않게 살림이 펴지면서 제 글을 좀더 단단하게 여미거나 튼튼하게 추스르는 쪽으로는 마음을 덜 기울여 버렸겠지요.

 프랑스 만화가 ‘기 들릴’이라는 분이 일 때문에 평양 나들이를 하게 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만화로 담아낸 《평양》(문학세계사,2004)을 보고 있습니다. 평양 시내에 큼직하게 걸린 포스터 하나를 17쪽에 옮겨 그렸는데, 포스터 아래쪽에 적힌 ‘한글’을 한국사람이 못 알아볼 만큼 옮겼습니다. 프랑스사람한테 한글은 낯설고 어렵고 꼬불탕꾸불탕거리는 지렁이 움직임이었을까요.

 스물네 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박병태란 분 글조각을 모아 엮은 《벗이여, 흙바람 부는 이곳에》(청사,1982)를 읽다가 “만약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발전을 막고, 인간으로서의 가치의 발현을 제거해 버렸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그 자를 벌해야 할까.(82쪽)” 하는 물음에 잠깐 책을 덮습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사람은 법에 따라 죄를 물린다지만, 마음에 생채기를 입히고 그지없는 꿈을 짓밟은 사람은 어떤 법으로 죄를 물릴 수 있을까요.

 서울 대방동에 있는 헌책방에서 《서울의 양심》(시인사,1988)이라는 시모음 하나 만납니다.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어 만지작만지작하다가 제자리에 놓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제 책꽂이에서 《서울의 양심》을 찾아내어 처음부터 찬찬히 다시 읽습니다. 세상은 정희수 시인을 절름발이라고 가리키지만, 정희수 시인을 가리켜 절름발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눈매가 바로 ‘절름발이’ 아니겠느냐고, “자네가 만든 그 팻션 중에 / 장애자가 입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증인신문 4―앙드레 김에게)”라는 말처럼 비장애인들이야말로 절뚝절뚝 걷고 있지 않느냐고 되뇌입니다. 〈시민사회신문〉 18호 1쪽에 실린 광고를 봅니다. “20년 간 안심할 수 있는 신개념 주택”이 “사기 위한 집이 아닌 살기 위한 집”이랍니다(SH공사가 지은 아파트). (4340.9.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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