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 말넋 2024.4.13.
오늘말. 하얗다
“하얗게 밤을 새운다”는 말을 처음 들은 날을 곧잘 떠올립니다. 퍽 어릴 적인데, “어떻게 밤에 잠도 안 들고서 새우나?” 싶어 갸웃했습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밤을 새운 어느 날 왜 ‘하얗다’를 말하는지 온몸으로 알아챘어요. “까맣게 속을 태운다”는 말을 처음 들은 어릴 적에도 갸우뚱했습니다. 어른들은 말을 어리둥절하게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러다가 비로소 속이 타는 고비를 겪은 어느 날 왜 ‘까맣다’를 말하는지 온마음으로 느꼈어요. 바쁘게 매듭지을 일을 붙잡다가 어느덧 날이 새하얗게 밝습니다. 캄캄한 밤에는 없던 빛살과 소리가 새벽과 함께 퍼져요. 밤새랑 낮새가 갈마드는 때가 있고, 밤개구리가 훅 노래를 꺾는 때가 있습니다. 따로 콕 집기는 어렵습니다만, 흐릿하게 트다가 조용히 번지는 때가 있더군요. 뜬금없는 허울질이 넘치면서 덧없고 어이없이 불거지는 빈수레가 보일 적에는 소리없이 지켜보다가 털레털레 떠납니다. 번들번들 빈그릇잔치를 더 구경할 일은 없거든요. 넋을 놓을 뜻이 없으니 이름뿐인 곳을 손사래칩니다. 혼자는 값없고 허전할까요? 얼핏 초라하고 보람없다지만, 넋을 차리는 사람은 빈손이 외려 빛납니다.
ㅅㄴㄹ
하염없다·덧없다·부질없다·어이없다·터무니없다·허전하다·쓸쓸하다·초라하다·싫다·넋나가다·넋놓다·얼나가다·어리둥절·어리벙벙·없다·있지 않다·보람없다·값없다·뜻없다·비다·속없다·붕뜨다·뜬구름·허울·그냥·그저·반드레·반들반들·번지레·번지르르·빈그릇·빈손·빈몸·빈수레·빈이름·우두커니·물끄러미·멀거니·멍하다·조용하다·소리없다·힘없다·어둠·이름만·이름뿐·이름치레·이름허울·털레털레·헐렐레·텅·텅텅·뻥·뻥하다·하얗다·새하얗다·흐리다·흐릿하다·흐리멍덩 ← 허망, 허무, 허무적, 허무주의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